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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눈치 게임 (65/130)


65. 눈치 게임
2022.09.15.


190cm가 넘는 키, 압도적인 근육질 어깨에 딱 맞게 떨어지는 블랙 슈트.

거기에 서연이 만들어준 화이트 셔츠를 받쳐입은 권율은 여느 모델보다 멋있었다.

게다가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내자 뚜렷한 이목구비가 한층 돋보였다.


 
그런 권율을 발견한 서희가 손을 높게 흔들었다.


“율아. 여기!”

너무도 매력적인 권율의 모습에 샴페인 잔을 비우던 민혁의 고개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어!”

민혁은 조카의 친구인 권율이 왜 여기에 왔는지 의아한 듯 쳐다봤다.


“역시 정확하네. 30분 늦는다더니.”

현우가 아는 척을 하자 민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 이사님도 율이를 아십니까?”

민혁의 말에 현우가 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 네. 여기 있는 서희 변호사의 사촌 동생이자 제가 많이 아끼는 동생입니다.”

현우는 민혁에게 대놓고 묻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 ‘그러는 너는 우리 율이를 어떻게 아냐’라고 묻고 있었다.


“신기하네요. 제 조카 친군데.”

“그렇습니까? 세상 참…… 좁네요.”

현우는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속으로 ‘젠장’을 외쳤다.


‘혼자 온 것 같은데, 율이까지 알고. 이건 뭐, 꼼짝없이 같이 있게 생겼네.’

현우가 절망하는 사이, 서연은 민혁이 권율을 알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지금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권율에게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블랙 슈트를 입은 그는 멋지다 못해 너무도 완벽했다.

거기다 자신이 만든 셔츠를 얼마나 잘 소화하는지, 원래 세트였던 것처럼 무척 매력적이었다.

서연은 권율의 착장 상태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화답이라도 하듯 권율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안녕하세요. 좀 늦었습니다.”

권율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와요.”

서연이 사르르 웃으며 권율을 올려다봤다.


“어. 진짜 권율 장군님이네. 오랜만이에요.”

호진이 권율을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장군님?”

지연이 확인하듯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요즘 장군님들은 생각보다 어리시네. 육사 나오셨나?”

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이름이 장군님이랑 똑같아서 장난삼아 불러본 거야.”

“아, 난 또. 근데 스타일이 괜찮으시다. 권율 장군님.”

리나가 호진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서희 변호사님의 사촌 동생. 참고로 대학생이야.”

호진의 간단한 설명에 친구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서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권율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진짜…… 대학생이라고?”

“그렇다니까.”

권율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슬며시 서연의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서연은 갑자기 아는 척을 하는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미처 알지 못했다.


“여기서 다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권율은 민혁과 눈이 마주치자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 그래. 율아. 여기서 만나니까 영 이상하다. 김현우 이사님과 친한 사이라고?”

“네. 제가 제일 좋아하는 형이에요.”

“아―. 너 오는 줄 알았으면 우리 원준이도 데려오는 건데.”

민혁의 말에 권율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형식적인 안부를 주고받고, 원준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나눴다. 그 사이 서연의 친구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민혁을 유심히 살폈다.

서연이 기자에게 붙들려 VIP들을 만나는 동안, 궁금한 걸 못 참는 그녀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제일 먼저 나선 건 리나였다.


“저기, 홈쇼핑 대표님?”

“최민혁입니다.”

“아. 네. 최민혁 씨.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요? 낯이 좀 익은 것 같아서요.”

민혁은 낯이 익는다는 리나의 말에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 그때 한 대표님이랑 같이 있던 친구, 맞습니까?”

“그 커피 싸가지? 허! 죄송합니다.”

말실수를 한 리나가 황급히 입을 가리며 사과했다.

민혁은 서연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리나를 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 커피 싸가지 맞고요. 여기서 또 만나네요.”

민혁의 서글서글한 반응에 리나는 당시 상황을 친구들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권율은 민혁과 서연이 오래전에 만났다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 서연의 일이 끝나지 않았고, 중요한 행사를 마칠 때까지 신경 쓰이게 하기는 싫었다.

서연이 어떻게 열심히 준비했는지 알기에 그녀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럼, 홈쇼핑 일로 만나신 거예요?”

“그렇죠. 한 대표님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뉴욕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놀랐습니다.”

민혁은 긴가민가했는데 리나가 찍어준 사진을 보고 알아봤다는 말을 덧붙였다.

권율은 서연의 회사에 자주 갔었지만, 사무실에는 아직 올라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민혁이 이미 가봤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씁쓸해졌다.


“정말 신기하다. 안 그래, 얘들아?”

리나가 양쪽에 선 친구들에게 동의를 구하자 다들 격하게 호응하고 나섰다.


“이 정도 우연이면, 로맨스 드라마 각이지.”

호진은 서연과 민혁을 곧 맺어줄 것처럼 적극적이었다.


“그런가요? 그럼 친구분들이 한 대표님께 말 좀 잘해주십시오.”

“그러려면 몇 가지 확인할 게 있는데. 긴밀하게 대화 좀 나눠보실까요?”

친구들은 민혁을 둘러싼 채 간단한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모든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권율과 서희, 현우의 미간이 똑같이 구겨졌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한 대표님이 훨씬 아깝지.”

현우는 안 그래도 눈엣가시 같은 젊은 대표가 서연에게 관심을 보이자 대번에 반대하고 나섰다.

물론 민혁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이다.


“아니, 여호진 검사는 뭐 저렇게 딱 달라붙어서 난리야. 저러다 자기가 사귀겠다고 나서겠네.”

서희는 호진이 민혁에게 친근하게 굴자 벌컥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권율은 말을 아꼈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민혁이 서연에게 호감을 가진 게 아닐까 의심만 했었다.


‘결국…… 이렇게 됐네.’

오늘 민혁을 직접 마주하자 권율은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도저히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민혁의 눈빛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권율은 민혁이 그동안 했던 말과 그의 연애 스타일을 떠올렸다.

물론 그를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전에 들었던 내용만으로도 그를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여자를 만났는지 알기에 가볍게든, 무겁게든 서연에게 접근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이건 단순한 위기감이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중한 사람을 기필코 지켜내야만 하는 전쟁 같은 것이었다.

권율은 이렇게 된 이상 더욱 신중해야만 했다.

민혁은 서연과 공적으로 엮인 사이인 데다 하니블랙 매출에 큰 축을 담당하는 회사의 대표였으니까.

어설프게 나섰다가는 서연에게 원치 않는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조바심 낼 것 없어. 서연 씨만 생각하자.’

권율은 서연의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민혁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 행사가 끝나는 즉시 서연과 사귀는 사이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예약해놓은 분위기 좋은 와인바에서 모조리 설명하겠다고 말이다.

권율은 불안한 마음을 어렵게 다잡으며 행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에잇. 내가 여기서까지 와서 대표 면상을 봐야겠냐. 끝나고 술이나 마시러 가자.”

현우는 서연의 친구들에 둘러싸여 웃고 있는 민혁을 불만스럽게 쳐다봤다.


“잠깐만, 좀 더 있어 봐.”

서희는 호진과 얘기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호진만 괜찮다면 따로 나가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니까.


“율아. 시간 괜찮지?”

참다못한 현우의 말에 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저분들이랑 같이 가는 건 어때요?”

권율이 서연의 친구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서희의 고개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어떻게?”

“제가 물어볼게요. 끝나고 같이 나갈 수 있는지요.”

조용한 권율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서자 현우와 서희는 좋으면서도 동시에 낯설었다.


“네가 웬일이야. 이렇게 다 나서고.”

권율은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율아. 좋아, 다 좋은데. 저 최민혁 대표는 안 된다. 내 소중한 토요일 밤을 불편하게 보낼 순 없으니까.”

“형,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눈치껏 잘 얘기해 볼게요.”

그때 권율의 코끝에 달콤한 복숭아 향기가 스쳤다.


“왜 다들 서 있기만 하세요. 춤도 추고 노셔야죠.”

행사장을 한 바퀴 돌고 온 서연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요. 다들 낯을 가려서.”

현우가 멋쩍게 웃는 사이, 권율은 때를 놓치지 않고 서연의 곁을 차지했다.


“축하드려요.”

권율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내가 너무 바빠서 심심했죠?”

“괜찮아요. 참 이따가요…….”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대화를 방해하자, 권율은 아예 상체를 숙여 서연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그러자 서연이 배시시 웃으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와 서희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순둥이 권율이 오늘따라 너무도 낯설어 보였으니까.


“아 참. 율아. 아까 한 대표님 인사말 하는 거 못 봤지. 어마어마하게 멋있었는데.”

현우의 칭찬에 서연이 피식하고 웃었다.


“막 도착했을 때 뒤에서 봤어요.”

권율은 서연에게 멋있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세 분이서 사진은 찍으셨어요? 율이 씨가 늦게 와서 못 찍은 거 같던데.”

서희는 남자들끼리 무슨 사진이냐며 거절하다가 호진이 친구들과 함께 다가오자 얼른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럼, 사진 좀 부탁드립니다.”

“네. 멋지게 찍어드릴게요.”

그러자 두 남자가 권율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섰다.

포즈가 똑같다는 서연의 지적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사진을 찍었다.


“서연아. 민혁 씨하고 같이 놀자.”

친구들은 어느새 민혁과 친해졌는지, 다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응?”

서연이 갑 중에 갑과 어떻게 노냐고, 불편하다고 말하려던 그때.

권율이 서연을 제 쪽으로 슬쩍 잡아당겼다.


“우리도 사진 같이 찍어요.”

그러고 보니 오늘 권율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다.


“좋아요.”

서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권율은 호진을 쳐다보며 부탁했다.


“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요. 주세요.”

권율이 호진에게 핸드폰을 건네고는 서연의 옆으로 가 섰다.

그러고는 아무도 들리지 않도록 서연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다정하게 어깨 안아도 돼요?”

권율의 정중한 부탁에 서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서연의 긴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정리해줬다.


“음, 어…….”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놀란 호진이 액정과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율아. 너 왜 그래.”

더 놀란 서희가 권율을 제지하고 나섰다.

그는 형의 반응을 가볍게 넘기며, 서연의 어깨에 살포시 팔을 올렸다.


“그러면 안 돼. 왜 한 대표님 어깨에 팔을…….”

현우는 당장이라도 권율을 제지할 태세였다.

사진을 찍으려던 호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만약에 서연이 불쾌하다고 느꼈다면 분명히 정색했을 테니까.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서연은 씽긋 웃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이사님, 괜찮아요. 호진아, 얼른 찍어.”

“어? 어어.”

호진이 카메라 버튼을 누르자 권율이 서연을 쳐다보며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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