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인내의 시간이 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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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인내의 시간이 지나면
2022.09.18.
민혁은 싸늘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볼 뿐 나서지는 않았다.
서연이 괜찮다는데 무리수를 둘 수도, 그럴 명분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권율에게 열심히 공을 들이는 여자가 따로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민혁은 권율의 행동이 거슬리긴 했지만, 특별히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서연이 권율을 남자로 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생인 권율을 귀여운 동생 정도로 대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 이상을 생각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여기요. 다 찍었어요.”
호진이 권율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자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 공기가 사뭇 어색해졌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뭔가 묘하긴 한데, 딱히 꼭 집어서 말하기에는 애매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권율이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서연과 특별한 사이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도 잠시.
김 실장과 최 비서가 서연에게 다가와 중간보고를 시작했다.
“대표님. 행사 선물은 모두 나갔습니다.”
서연은 시간을 빠르게 확인했다.
행사 종료까지 2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초대장은 얼마나 돌아왔어요?”
“네. 10장을 제외하고 모든 초대장이 돌아왔습니다.”
나름대로 성공적인 결과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들은요?”
“잡지사에서 나온 사진기자가 시작부터 행사장을 스캔했고,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다행이네요. 끝까지 수고해주세요.”
서연의 말이 끝나자 김 실장과 최 비서가 권율을 힐끔거렸다.
그가 입고 있는 셔츠가 눈에 익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은 셔츠의 주인공에게 대놓고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인 만큼 사적인 질문으로 서연을 부담스럽게 할 수는 없었다.
“인턴들은 어떻게 할까요?”
“입구는 안내 요원에게 맡기고, 선물 부스 정리하라고 하세요.”
“네. 대표님.”
“그리고 신나게 즐기라고 하세요. 잘 놀아야 일도 잘하죠.”
김 실장과 최 비서는 서연의 지시 사항을 전달하려 자리를 떠났다.
순간 음악이 더 빠른 비트로 바뀌면서 여기저기서 세찬 환호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연아. 요즘은 잘 놀아야 돈도 잘 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이야.”
“나름 SNS 스타께서 이렇게 몸을 사리면 되시겠습니까? 한 사장님아, 우리도 춤추러 가자!”
서연은 친구들의 성화에 샴페인을 빠르게 넘겼다.
그러면서 권율에게 같이 가자고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형. 우리도 같이 가서 놀아요.”
“어, 어?”
권율의 제안에 서른 중반의 형들은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매혹적인 레드 드레스를 입은 호진이 살랑살랑 리듬을 타자 서희의 눈이 번쩍거렸다.
“그래! 가자. 언제까지 기둥처럼 서 있을 수는 없지.”
그러자 현우도 마지못해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눈길이 가는 곳곳마다 여니블랙 티셔츠를 입은 직원들이 야광봉과 팔찌를 나눠주고 있었다.
서희와 현우는 생소한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면서도 야광봉을 흔들며 열심히 분위기를 맞췄다.
“여기, 무슨 외국 클럽 같지 않냐?”
현우가 서희를 툭 치며 물었다.
“너나 나나 외국은커녕 우리나라 클럽 근처도 안 가봤는데. 뭘 알겠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서희의 말에 현우가 중얼거렸다.
“저기 모델 좀 봐봐. 역시 한 대표님 행사는 재미있다니까. 율아. 너도 그렇지?”
여니블랙 신상품을 입은 세련된 모델들이 사각형의 런웨이에서 워킹을 하고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빠른 비트의 음악과 화려한 조명, 거기다 사람들이 내지르는 기쁨의 탄성까지.
여기에선 돌멩이를 가져다 놓아도 춤을 출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모든 것이 서연의 철저한 계획대로 구현됐고, 너무도 트렌디했다.
친구들은 야광 팔찌를 주렁주렁 손목에 걸고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서연도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나왔지만 절대 빼는 성격이 아니었다.
몸을 살짝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느낌이 있어 보이는지.
권율은 서연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지경이었다.
서연은 춤을 추면서도 중간중간 아는 척을 해오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셀카를 찍었다.
패션 업계 관계자나 모델들이 많아서 그런지, 모두가 과감했고 스타일이 남달랐다.
서연이 사는 세상은 마치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권율은 그런 서연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물론 민혁의 시선 또한 서연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서연은 두 남자의 시선 안에서 환하게 웃고, 즐겁게 춤을 추고, 사람들과 반갑게 사진을 찍었다.
행사가 막바지로 흐르자 분위기가 한층 고조됐다.
순간, 펑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반짝이는 꽃가루가 함박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율이 씨.”
서연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권율을 불렀다.
“이리 와요. 우리 같이 사진 찍어요.”
서연의 말에 권율이 가까이 다가와 섰다.
그러고는 흩날리는 꽃가루를 배경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사실 권율은 이 순간 서연을 다정하게 감싸 안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30분만 더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이 고통스러운 인내의 시간도 곧 끝날 테니까.
“한 대표님!”
권율이 핸드폰을 내리자마자 민혁이 서연에게로 불쑥 다가왔다.
“우리도 기념으로 사진 좀 찍죠.”
“최 대표님, 뭐라고요?”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서연이 큰 소리로 되묻자, 민혁이 아예 근처에 있던 포토그래퍼를 손짓해 불렀다.
그러고는 자신의 직함을 밝히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포토그래퍼가 흔쾌히 다가와 말했다.
“두 분, 나란히 서 보시겠어요? 제가 멋지게 찍어드리겠습니다.”
서연은 수많은 사람과 사진을 찍은 터라 민혁의 제안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마지못해 민혁의 옆에 서자 포토그래퍼가 카메라 셔터를 쉼 없이 눌러댔다.
“조금 더 옆으로 다정하게 서보시겠어요? 아 네. 최 대표님처럼 웃어보세요.”
그의 주문에 서연은 민혁을 빤히 올려다봤다.
그 순간 ‘촤라라락’ 하고 셔터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연아. 왜 이렇게 뻣뻣하게 그래.”
“최 대표님. 아까 율이 씨처럼 서연이 어깨에 손 좀 올려보세요. 자연스럽게요.”
리나의 코치에 민혁이 씽긋 웃었다.
“한 대표님께 친한 척 좀 하겠습니다.”
사실 오늘 서연은 남녀 불문하고 친한 연예인이나 기자, 지인들과도 얼굴을 맞대거나 어깨를 감싸며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권율이 보는 앞에서 민혁과 사진을 찍으려니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서연이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려는데 민혁의 커다란 손이 어깨에 와 닿았다.
묵직한 무게에 놀란 서연이 민혁을 올려다봤다.
“빨리 찍어주시죠.”
민혁이 입꼬리를 보기 좋게 올리자 카메라 셔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머! 너무 잘 어울린다.”
친구들은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응원하고 나섰다.
“서연아, 뭐 이렇게 부끄러워해. 웃어. 활짝!”
서연은 친구들의 훈수에 난감해하며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민혁이 포토그래퍼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오늘 찍은 사진 여기로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민혁이 사진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서연은 권율의 표정을 빠르게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눈빛만큼은 어딘가 서늘해 보였다.
서연이 권율의 눈치를 살피는 순간, 김 실장이 다가왔다.
“대표님. 이제 슬슬 마무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네. 가시죠.”
서연은 권율에게 무대를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조금 더 올렸다.
무대 위로 다시 올라간 서연은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네!”
열렬한 반응에 서연이 빙그레 웃었다.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어요.”
서연의 손에는 입장 시 선물로 지급한 투명 백이 들려 있었다.
“오늘 남자분들께 드린 선물 안에 이런 티셔츠가 들어 있어요.”
그건 서연이 권율에게 선물했던 티셔츠와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남성용 라인을 한정판으로 만들어 봤습니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레터링이 돋보이는 반소매 티셔츠였다.
“여러분이 뜨겁게 반응해주시고, SNS에 적극적으로 홍보해주시면…… 내년에는 더 핫한 파티로 찾아올게요!”
사실 서연은 권율의 옷을 만들면서 남성복이 갖는 색다른 매력과 재미를 동시에 느꼈다.
어차피 오늘은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인 만큼 마지막까지 다양한 걸 알리고 싶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서연의 그 말을 끝으로 모든 행사가 종료됐다.
아쉬움이 남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2차 약속을 잡거나 야광봉을 흔들며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서연은 그 와중에 셀럽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권율은 행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서연이 돌아오기만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다.
자신이 예약한 와인 바로 이동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너무도 바쁜 서연은 VIP들을 배웅하고, 직원들 앞에 섰다.
“오늘 행사가 성공적이었던 건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서연이 환한 얼굴로 직원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고는 행사의 마지막을 부탁하며, 김 실장에게 블랙카드까지 건넸다.
“김 실장님, 소고기 회식 부탁드립니다.”
민혁은 직원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서연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서연이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친구들에게로 다가왔다.
“서연아. 수고 많았어.”
친구들의 격려에 서연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한 30분만 기다려 줄 수 있어?”
“왜. 아직 일이 남았어?”
“아니. 최 대표님이 할 말이 있다고 하셔서. 오래는 안 걸려.”
그러자 친구들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어서 가 봐. 더 길게 얘기해도 돼. 우린 밤새도록 기다릴 수 있어.”
그때 권율이 서연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서연 씨. 차 가져왔어요?”
그러고는 점점 거리를 좁히며 서연과 마주 봤다.
“아니요. 술 마실 것 같아서 안 가져왔어요.”
권율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서연의 앞머리를 매만졌다.
그러자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친구분들이랑 모두 제 차로 이동해요.”
“그래요. 오늘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오늘 너무 수고 많았어요.”
권율이 서연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현우와 서희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소와는 달리 과감하게 구는 권율의 행동이 너무도 이상했으니까.
“잠깐만 더 기다려 줄 수 있어요?”
서연의 물음에 권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르륵 손을 잡았다.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의 마주 잡은 손으로 향했다.
더는 참을 수 없는 민혁이 나섰다.
“……한 대표님.”
다소 경직된 그의 목소리가 서연을 불렀다.
“두 사람, 도대체 무슨…… 사이입니까?”
다들 궁금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민혁이 먼저 물었다.
권율의 깊은 눈매가 민혁을 쳐다보며 서연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