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 대단한 경쟁자 (68/130)


68. 대단한 경쟁자
2022.09.25.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 있는 30분이라는 시간.

권율은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물론 친구들의 거센 질문 공세가 이어졌지만, 성심성의껏 대답을 하면서도 서연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마치 마음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것처럼 줄어드는 시간을 계산하느라 초조했다.

정확히 30분이 흐르자,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권율이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은 서연과 약속한 30분이 전부였다.


“호진 씨.”

권율은 안면이 있는 호진을 나직하게 불렀다.


“네? 아……. 이제 서연이 데리고 오세요.”

눈치 빠른 호진이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대신 해줬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만 계세요.”

권율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운전석에서 재빨리 내렸다.

그러고는 서연이 민혁과 사라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려앉은 건물의 구석진 곳.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서연의 여린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쿵쿵―.

권율은 자신의 세찬 심장박동이 귓가를 때리는 기분이었다.


‘서연 씨를 보내는 게 아니었어. 처음부터 같이 있었어야 했는데.’

권율은 민혁과 마주 보고 서 있는 서연의 뒷모습을 보며 자책했다.

그때 민혁의 애틋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서연 씨는 그대로 있어요.”

“……안 돼.”

권율은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금방이라도 민혁이 서연을 빼앗아버릴 것 같은 위기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온몸에 피가 빠져나간 듯 눈앞이 흔들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권율은 차갑게 식어버린 손가락을 힘껏 말아쥐고는 서연을 향해 달렸다.


“그건 제가 안 되겠는데요.”

권율은 미친 듯이 내달리는 심장을 애써 모른 척하며 가쁜 숨을 삼켰다.


“권율, 네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순간 민혁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서연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치에 몹시 난감했다.

그러나 권율은 어떤 경고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저랑 따로 얘기하세요.”

민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뭐랄까.

조카인 원준을 대하듯 어른들의 대화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만 같았다.

날카롭지만 어딘가 모르게 느긋한 그의 눈빛.

오랜 경험을 통해 축적된 넘치는 자신감, 거기다 ‘너 같은 게?’라는 약간의 무시와 냉소가 섞여 있었다.

그러자 묘한 오기가 솟아났다.

권율은 서연을 두고 뭔가 대결을 벌이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이건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끼어든 게 아니라, 민혁이 자신과 서연 사이에 끼어든 것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더 확실히 행동해야만 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눈에 보이지 않는 대결은 이미 시작됐고, 이 싸움은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 지켜내는가의 문제였으니까.


“전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나도 마찬가지야.”

자신감으로 가득 찬 민혁의 시선이 서연에게로 향했다.

순간, 권율은 소리치고 싶었다.

서연을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마음 같아서는 민혁의 눈을 가리고, 서연을 숨기고만 싶었다.

권율은 손발이 저릿저릿하고 심장이 날뛰는 것처럼 초조해졌다.

그건 서연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욕망, 아니 참을 수 없는 소유욕이었다.

그는 질투심에 이어 새롭게 느껴지는 감정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권율은 솟구치는 낯선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서연 씨를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민혁이 시선을 내리깔며,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은은하게 빛나는 명함을 건넸다.


“따로 만나자면서. 할 얘기가 있으면 찾아와.”

권율이 민혁의 명함을 받아들자 서연이 불쑥 나섰다.


“최 대표님의 이런 행동,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매우 불쾌합니다.”

“기회를 달라는 게 아닙니다.”

서연은 예기치 못한 이 상황이 황당하기만 했다.


“내가 서연 씨한테 어떤 마음인지, 그저 지켜보기만 하세요.”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서연의 명확한 선 긋기에도 민혁은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서연 씨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이 뭔지. 신중했으면 좋겠군요.”

민혁은 권율의 취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그 미래는 내가 결정해요.”

“과연 서연 씨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순간 서연이 멈칫했다.


“안 그래도 어머님이 같이 식사하자고 하시던데요.”

“우리…… 엄마가요?”

서연은 권율과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기도 전, 부모님과 부딪히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권율의 시험이 모두 끝나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굳이 부모님을 걱정시킬 필요도, 권율을 긴장시킬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민혁의 말에 서연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니, 언제 그런 연락을…….”

씁쓸해진 권율의 눈동자가 서연과 민혁을 번갈아 쳐다봤다.


‘서연 씨 부모님과 따로 연락하는 건가?’

민혁이 서연의 부모님을 거론했다는 건, 그가 적어도 한 번은 만났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서연이 당황하는 걸 보면, 민혁과 연락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대단한 커리어를 가진 서연의 사업 파트너. 그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한 건지, 서연의 부모님도 차지할 생각인 것 같았다.


“집으로 놀러 오라고 하시던데요.”

“뭐라고요?”

흔들리는 서연의 눈동자가 권율을 올려다봤다.

뭔가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녀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안 서는 모양이었다.

순간 서연이 권율의 재킷 소매를 붙잡았다.

그러자 괜찮다는 듯 권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우리는 다음 주 신사업 회의에서 뵙죠.”

민혁은 거절할 수 없는 일을 핑계로 권율의 앞에서 당당하게 다음을 예고했다.

권율의 머릿속은 터져나갈 것처럼 복잡했다.

하지만 최대한 이성적으로 접근해야만 했다.


‘여기서 흔들릴 수 없어. 그건 최민혁 대표가 제일 바라는 거야.’

그러다 자신의 소매 끝에서 전해지는 작은 움직임을 감지했다.


‘아!’

권율은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눈앞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저 잘나고, 대단한 최민혁을 제대로 흔들 방법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건 단순하면서도 가장 확실했다.

권율은 보란 듯이 서연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그러자 민혁의 턱 근육이 사납게 불거졌다.


“서연 씨. 얘기 끝났으면 그만 가요. 친구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어요.”

잠시 잊고 있었던 친구들을 소환하자 서연도 빠르게 자리를 정리했다.


“어! 그래요. 그만 가요.”

“대표님. 제가 정식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권율은 더 깍듯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감정이 흔들린다고 해서 지켜야 할 선을 넘을 필요는 없었다.

민혁이 사랑에 있어서는 경쟁자이지만, 동시에 친구의 삼촌이었고, 서연에게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민혁은 권율의 바른 모습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런 관계로 만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약해지는 감정을 숨긴 채 여전히 애틋한 눈으로 서연을 쳐다봤다.


“오늘 행사 좋았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서연 씨.”

서연은 흐리게 웃고 있는 민혁의 모습에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서연도 막 나갈 수는 없었다.


“회사에서 곧 뵙죠.”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권율이 서연을 더 다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민혁에게서 서서히 멀어졌다.

민혁은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못 박히듯 서 있었다.


“하아…….”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정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민혁은 그동안 권율에게 내뱉었던 모든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처음 겪는 참담한 현실에 민혁은 견딜 수 없이 초조해졌다.

그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려 제 자리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하. 젠장.”

차라리 사업이라면 이렇게까지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일이야 미친 듯이 노력하면 어떻게든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애초부터 얘기가 달랐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것을 떠나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순간 서늘한 바람이 그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오늘 서연의 빛나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한없이 예쁜 그 눈으로 자신만 바라봐줬으면……. 그러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텐데.


“하. 미친놈이 따로 없네.”

그는 진짜 미친 사람처럼 피식거렸다.

그런 것도 잠시, 민혁은 침착하게 다음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지금 그에게 제일 필요한 건 강력한 아군이었다.

민혁은 생각이 정리되자마자 거침없이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셨어요. 어머님. 최민혁입니다.”

그의 통화 상대는 서연의 어머니인 경숙이었다.

***

남산의 전경이 황홀하게 펼쳐지는 파노라마 창.

빈티지한 가구와 버건디 컬러로 장식된 프라이빗 룸에선 모던 재즈 선율이 잔잔하게 흘렀다.

다정하게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과 어색한 헛기침을 내뱉는 다섯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영 정리가 안 되는 분위기 사이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율이 씨. 이건 또 언제 준비한 거예요?”

서연은 권율이 준비한 커다란 꽃다발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행사 준비하느라고 수고 많았잖아요.”

화사한 서연의 눈동자가 탐스러운 꽃송이를 내려다봤다.


“제일 크게 축하해주고 싶어서요.”

서연의 친구들은 당황한 것도 잠시, 두 사람의 달달한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물론 서희는 인상을 제대로 구긴 채 연신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율이 씨. 이제 보니까 굉장히 로맨티시스트다.”

리나의 말에 서희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는지, 호텔 와인 바에 도착하자 이미 최고급 와인과 안주들이 테이블에 가득했다.

거기다 직원이 서연의 몸보다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가져왔다.


“율이 씨가 손편지도 써줬어. 한 30통 돼.”

기분이 좋아진 서연은 친구들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진짜? 요즘에 누가 손편지를 써줘. 율이 씨 참 괜찮다.”

친구들의 후한 평가에 서연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그러게. 편지에 꽃에…….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표현을 안 하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호진의 뾰족한 시선이 서희를 힐끔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낀 서희가 속으로 ‘미치겠네.’를 외쳤다.

‘모태 솔로’인 권율이 이렇게 과감하고도 용의주도하게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으니까.

서희는 안 그래도 호진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곱지 않은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서희가 권율을 가볍게 원망하는 사이, 현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한 대표님. 저번에 저랑 점심 할 때요. 그때도 율이랑 만나고 있었습니까?”

“아, 그때는 데이트를 2번 정도 한 사이였어요.”

서연은 권율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현우를 찾아갔던 일을 떠올렸다.


“그날 이사님을 만나고 율이 씨가 대학생이라는 걸 확실히 알았어요. 그래서 헤어지려고 했고요.”

현우는 자신 때문에 두 사람이 헤어질 뻔했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면 그 이후 회식에서 힘들어 보였던 것도 다…….”

뭔가 퍼즐이 착착 맞춰지자, 눈치 빠른 현우가 흠칫했다.


“그때는 율이 씨가 보고 싶어서 힘들었어요.”

그러자 호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야. 한서연! 나 기억났어!”

호진은 뭔가 거대한 비밀을 발견한 듯 잔뜩 흥분해 있었다.


“뭐. 뭔데.”

“지연이 결혼 날짜 잡으러 가서, 우리 다 같이 들었던 그 말. 기억나?”

순간 서연을 비롯한 친구들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