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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운명에 대하여 (69/130)


69. 운명에 대하여
2022.09.29.



 
친구 지연의 결혼이라면 3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아무래도 가족 같은 친구이다 보니 다들 제 일인 것처럼 지연의 결혼을 축하했었다.

좋은 날을 받아야 한다는 친구의 말에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용하다는 역술가를 찾아갔었다.

거기서 서연이 나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 당시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며 다들 장난처럼 넘겼었다.

서연은 그때 그 이야기가 이렇게 연결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뭔데 그러세요? 우리도 좀 같이 알아요.”

다들 당황스러운 감탄사를 연발하자 현우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아. 이 얘기를 어디서부터 꺼내야 하나.”

빈티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켠 호진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서연이랑 율이 씨가 만날 운명이었나 봐요.”

“어떤 점에서요?”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현우의 몸이 앞으로 잔뜩 기울어졌다.


“나 방금 소름 돋은 것 좀 봐.”

호진은 오한이 든 사람처럼 어깨를 부르르 떨며 팔을 쓱쓱 문질렀다.


“추우면 이거 입어요.”

서희는 무심한 척 자신의 재킷을 벗어서 호진의 어깨에 툭 걸쳐줬다.


“3년 됐지?”

“응. 3년 6개월.”

“얘가 결혼했거든요.”

제일 예쁜 친구가 결혼했다는 말에 현우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결혼하기 좋은 날을 잡으러 다 같이 역술가를 찾아갔어요.”

“거기부터 얘기하면 너무 길어. 핵심만 딱딱 짚자.”

참다못한 리나가 나섰다.


“어어, 쓸데없는 것 다 생략하고. 그때 그분이 서연이한테 뭐라고 말했느냐면요.”

호진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을 멈추자 현우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지금 한서연 씨 남편감은 대치동에서 공부 중입니다’라고 했어요.”

“에이……. 진짜요?”

현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우리도 안 믿었다니까요. 서연이가 지금 몇 살인데 남편감이 대치동에서 공부하냐고 막 그랬죠.”

서연은 그때 일이 떠올라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나 권율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진지하기만 했다.


“하도 황당한 얘기라 그냥 장난처럼 넘겼었는데…….”

친구들의 시선이 단번에 권율에게로 쏠렸다.


“뭐…… 이렇게 될 줄 알았나요. 안 그래. 서연아?”

“난 싹 다 잊어버렸어.”

사실 서연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났지만, 일부러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여기서 친구들의 말에 격하게 호응하기에는 아까부터 미간을 구기고 있는 서희가 신경 쓰였다.


“그분이 또 뭐라고 했어요?”

권율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뭐라고 했더라……. 나라의 큰 인재인가, 기둥인가?”

“나 생각났어! 서연이한테 남편이 나라의 큰 인재가 될 사람이니까. 항상 바르게 살라고 했어요.”

권율은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현우는 뭐에 홀린 표정이었다.

믿음의 문제를 떠나 신기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떻게 우리 율이 씨는 나라의 큰 인재가 될 준비가 되셨을까요?”

리나의 물음에 서희가 권율의 대변인처럼 나섰다.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율이가 얼마나 똑똑한지 아십니까?”

권율은 서희의 과도한 자랑에 손사래를 치며 그를 말렸다.


“뭐 어때. 율아. 사실인데.”

현우도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수능 만점! 전국 수석! 한국대 수석 입학!”

서연의 친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서연이 자신의 핸드폰에서 권율의 기사를 검색해서 쓱 내밀었다.


“어머! 진짜네.”

“난 뉴스에서나 봤지. 수능 만점인 사람을 직접 본 건 처음이야. 신기하다.”

서연은 친구들의 칭찬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동안 서희와 현우는 입을 쉬지 않았다.


“그것뿐인가요. 제대하자마자 행정고시 1차 붙었고, 이번에 2차도 봤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아마 무난하게 합격할 겁니다.”

이건 뭐랄까.

마치 극성스러운 부모가 하나뿐인 자식을 자랑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서희와 현우는 1등으로만 살아온 권율의 지난날을 브리핑하느라 바빴다.


“공부 말고도 예술적인 재능도 뛰어나고요.”

“인성은 또 어떻고. 우리 율이는 그냥 걸어 다니는 도덕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형, 이제 그만해도 돼.”

민망한 권율이 아무리 말려도 서희는 멈추지 않았다.


“가만있어 봐. 재력도 빼놓을 수 없죠.”

“우리 율이가 여기서 제일 어리지만, 아마 제일 부자일 겁니다.”

현우는 권율이 다 갖춘 남자라는 걸 재차 강조했다.


‘호진이한테 강남 K 타워 얘기를 듣긴 했는데. 율이 씨도 부자구나.’

서연은 그의 집안이 강남에 고층 빌딩을 여럿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워낙 뭘 꼬치꼬치 묻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었다.

그런데 다 갖춘 똑똑한 재력가라니. 나쁘지 않으면서도 뭔가 부담스러웠다.

그의 집안에서 자신과 사귀는 걸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몹시 신경 쓰였다.


“오케이. 다 알겠고. 이제 가장 중요한 걸 물어볼 차례네요.”

“내가 물어볼게. 율이 씨, 우리 서연이 어떻게 생각하세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권율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우연히 서연을 처음 목격한 호텔 주차장 일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을 빠짐없이 털어놨다.

물론 거기에는 서연에게 남자로 보이고 싶어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자신의 잘못도 포함되어 있었다.

권율의 입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이야기가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서희는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자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집안에서 이 일을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도 명확했으니까.

하지만 서희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권율이 아직 대학생이고,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섣불리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권율이 거세게 항의할 테고 동시에 두 사람 사이가 더욱 애틋해질 수도 있었다.


‘나중에 율이랑 따로 얘기해 봐야겠네.’

서희가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사이, 친구들은 다시 질문에 들어갔다.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서연이의 어떤 점이 가장 좋아요?”

리나가 핵심만 짚었다.


“아니, 뭘 그렇게 직접적으로 묻습니까?”

서희가 말을 자르려 하자, 권율이 그의 팔을 잡았다.


“한 가지만 말할 수 없이, 다요.”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서연 씨는 일할 때 눈이 별처럼 반짝거려요.”

“그건 그렇지.”

현우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웃으면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울면 지켜주고 싶고, 약간 빈틈이 있는 것도 인간적이고, 그리고…….”

권율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서연을 지그시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또 뭐요?”

“키스요.”

서희는 사촌 동생인 권율의 키스 발언에 깊은 탄식을 쏟아냈다.


“키, 키스가 왜요!”

친구들은 궁금해 미치겠다는 듯 아예 몸을 돌려 권율의 입만 쳐다봤다.


“첫 키스였으니까요.”

신중하고 진지한 남자가 당당하게 처음을 선포했다.


“하아, 권율. 너 때문에 미치겠다.”

서희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현우는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게임 끝났네.”

호진은 서둘러 게임 종료를 선언했다.


“그렇다고 봐야지.”

리나는 마치 심판인 것처럼 완벽한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당사자를 앞에 두고 이렇게 얘기하는 건 좀 우습지만…….”

리나가 서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서연아. 너 없을 때 우리가 율이 씨한테 막 질문을 퍼부었거든. 그런데 사람이 참 바르고 착하더라.”

“그래. 그러니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거 잊지 말고, 예쁘게 만나.”

지연도 진심으로 축하했다.


“난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이었어. 내가 춥다니까 율이 씨가 옷도 막 벗어주고. 암튼 난 덮어놓고 찬성.”

서연은 친구들의 후한 평가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서희의 눈치를 살피느라 대놓고 반응하기 어려웠다.

서희는 시종일관 부정적이었고, 나이 차이를 이유로 자신을 싫어하는 게 틀림없었다.

서연이 표정 관리에 들어간 사이, 권율은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친구들의 허락과 응원이 권율에게는 큰 힘이 됐다.


“율이 씨, 우리 남편들이랑 언제 다 같이 식사해요.”

“리나 씨도…… 결혼했어요?”

현우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요. 이제 호진이만 분발하면 되겠다.”

“그러게. 우리 호진이는 다이아몬드 같은 남자랑 결혼한다고 했는데.”

리나의 말에 서희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다, 다이아몬드요?”

“네. 3년 전 그날, 결혼 날짜 잡으러 가서 여러 얘기를 들었거든요.”

“아! 맞다. 그 다이아몬드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호진이 테이블을 콩콩 두드렸다.


“호진아. 내가 저번에 얘기한 TS 전자 본부장님 만나볼래?”

리나의 말에 서희는 못마땅한 감정을 대놓고 드러냈다.


“TS 전자 배터리 폭발 이슈, 아십니까?”

서연이 그 순간을 빠르게 포착했다.


‘지금인가? 서희 씨에게 점수를 딸 기회.’

서연은 호진과 서희의 은밀한 사건을 알고 있는 데다,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것을 눈치껏 파악하고 있었다.


“리나야. 그 본부장은 됐어.”

“그 사람은 배터리랑 상관없어. 그리고 호진이 이상형이라니까. 사진 보여줄까?”

서연은 리나가 사진을 찾으려 하자,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고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권율과 진지한 관계로 나아갈 경우 서희가 든든한 아군이 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두 사람을 어떻게든 연결해 주는 것이 최고의 선택지였다.

서연이 호진을 막 부추기려는데, 권율이 불쑥 나섰다.


“호진 씨. 우리 서희 형 어때요?”

서연은 권율이 두 사람 사이를 알고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야, 그래. 뭘 멀리서 찾아.”

두 사람은 의기투합이라도 한 것처럼 꽤 적극적이었다.


“응? 누구?”

리나와 지연이 어리둥절한 사이, 호진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여기, 법무법인 서우의 후, 계, 자이신 서희 변호사님이 계시잖아. 같은 법조인이고 얼마나 좋아.”

서연의 말에 권율이 열심히 말을 보탰다.


“우리 형이 겉은 차가워 보여도 속은 안 그래요. 얼마나 따듯하다고요.”

서희는 권율의 계속되는 칭찬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눌렀다.

하지만 빈말이라도 그만하라고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하라는 듯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의 미혼 여성이 각자 짝을 찾는 분위기에 가장 당황한 건 현우였다.


“서희야. 혹시, 호진 씨한테 관심…… 있어?”

현우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서희에게 물었다.

까칠한 성격의 서희는 어떠한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건 격한 긍정의 의미였다.


“호진아. 이번 기회에 서희 변호사님이랑 진지하게 얘기를 좀 해 봐.”

“그래요. 호진 씨. 우리 형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서연은 전략적으로 든든한 아군이 필요했고, 권율은 서희의 사랑을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했다.


“아, 뭘. 또.”

호진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희를 쓱 쳐다봤다.

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에서 작은 열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차가운 남자인 서희가 피식하고 웃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너무도 강렬한 눈빛으로 호진을 쳐다봤다.


“여호진 씨.”

하얗고 기다란 서희의 손이 호진에게로 향했다.


“잡아요.”

모두가 숨을 죽여 두 사람을 바라봤다.

호진이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자, 서희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가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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