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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예정된 스캔들 (72/130)


72. 예정된 스캔들
2022.10.09.



 
순간 보라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한서연이 스물아홉이라니.

보라는 서연의 화려한 이력과 사진에 정신이 팔려 나이를 유심히 보지 못했다.

이게 다 어찌 된 일인지.

서연이 나이를 숨기지 않았다면 권율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기사가 날 정도로 능력 있는 대표가 대학생 남자를 만나기 위해 굳이 나이를 속인다?

아무리 권율이 매력이 넘친다고 해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스물아홉과 스물둘.

지금 당장은 사귈 수 있어도 미래를 함께할 수 없는 나이 차였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흣. 한서연, 별거 아니네.”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자신감이 빠르게 차올랐다.

보라의 잇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오며 자꾸만 피식거렸다.

조금 전,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리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희망의 빛이 드리워졌다.

보라는 물기가 어린 눈가를 빠르게 닦아냈다.

더는 나약해질 이유가 없었다.

그 잘난 한서연이 권율과 끝까지 갈 확률은 ‘0’에 가까웠으니까.

잔뜩 움츠러들었던 마음을 추스르자 확실한 목표가 떠올랐다.

보라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을 하루빨리 갈라놓고 권율을 되찾아 올 생각이었다.

재빨리 침대에서 벗어난 보라가 책상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켰다.

어떻게든 이 좋은 기회를 활용할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모든 정신력을 집중해 서연의 SNS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중요한 과제를 하듯 엑셀을 켜서는 서연의 친구, 일로 만난 동료, 연예인과 패션 업계 종사들을 보기 좋게 정리했다.

그러고는 필요한 사진과 자료들을 캡쳐했다.

작게 나온 사진 하나, 특별한 댓글 한 줄도 눈에 띄는 것이라면 빠짐없이 폴더에 집어넣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누가 그녀와 긍정적인 관계인지, 아닌지 관계도를 그렸다.

겉으로는 친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사람들은 따로 정리했다.

혹시라도 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은 서연을 응원하고 진심으로 좋아했다.


“별것 아닌 것들끼리 칭찬이나 떠들어라.”

보라는 서연이 화려한 포장지로 사람을 홀린다며 부정적인 말을 쏟아냈다.

바로 그때, 안면이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 이 남자는…….”

백화점에서 서연과 함께 있던 그 남자였다. 검색을 하던 손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DN 홈쇼핑 대표…… 최민혁?”

DN 홈쇼핑이라면 권율의 친구인 원준의 집안이었다.

갑자기 얘기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튀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연상녀, 대학생 남자친구, 절친의 삼촌인 재벌남.


“허! 이거 봐라.”

마치 결정적인 증거를 잡은 사람처럼 보라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DN 홈쇼핑 패션 부문 최고의 브랜드 하니블랙…….”

두 사람이 회사에서 일로 얽히다가 긴밀한 관계로 발전했다고 가정하자, 뭔가 말이 되는 것만 같았다.

비슷한 나이. 거기다 평일 한낮 백화점에서 따로 만나 쇼핑하는 공적인 관계가 몇이나 될까.

그것도 다정하게 웃고 떠들며 점심까지 같이 먹는다?

나름 보험회사와 건설회사의 손녀라 비즈니스 관계를 잘 아는 보라도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멋진 연하남과 사귀던 한서연이 능력 있는 재벌남과 일로 만났다가 슬쩍 양다리를 걸쳤다라…….

순간 밋밋했던 그림이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너무도 착한 권율이 나쁜 여자에게 말려들었다고 생각하자 보라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권율을 위기에서 구해내야만 했다.

보라는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아! 지라시.”

증권가에 도는 일명 ‘지라시’.

두 사람이 열애 중이라거나 아니면 결혼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지라시’에 실린다면 인터넷에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결혼 적령기인 한서연과 최민혁이 사귀는 사이인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일이 생각보다 쉬워질 것 같았다.

DN 그룹의 유능한 재벌 3세와 연예인 같은 외모를 뽐내는 여성 대표의 사랑과 결혼.

충분히 오해할 만한 사진을 떡밥으로 뿌린다면 기자들이 알아서 핑크빛 기사를 쏟아내겠지.

거기에 목격담 몇 개를 진짜처럼 붙인다면 서연의 결혼이 기정사실로 확정될 것만 같았다.


 
만약 두 사람이 결혼설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서연과 권율의 관계에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대대적으로 결혼 스캔들이 난 연상의 여자를 권율의 집안에서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권율이 서연 때문에 죽고 못 산다고 해도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만만치 않은 석구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기막힌 해결책이 떠오르자 손가락 끝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처럼 짜릿했다.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오르자 보라는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각종 매체의 경제부와 연예부 기자 이메일을 모조리 긁어모았다.

그러고는 인터넷을 뒤져 비밀 계정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 정도 사진이면 충분하겠지?”

백화점에서 찍은 서연의 사진과 동영상을 오해하기 좋게 손을 봤다.

어차피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권율과 백화점에 함께 갔던 친구뿐이었다.


‘남의 사진 함부로 올리거나 유포하면 처벌받을 수 있어.’

순간 법무법인 집안의 딸인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보라는 처벌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에 멈칫했다.

하지만 모든 계획이 너무도 완벽한데 처벌이 두려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텐데…… 그게 뭘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자 슬슬 짜증이 솟구쳤다.

바로 그때, 핸드폰이 웅웅 울렸다.


<보라야. 우는 건 아니지? 괜히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잊어버려.>

잊어버리라니. 이게 잊는다고 잊을 수 있는 문제인가.

심란한 보라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뭐가 좋을까…… 어떻게 하면 걸리지 않고…….”

알리바이. 나중에 걸리더라도 손쉽게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했다.

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넓은 방 안을 서성이며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했다.

우웅웅―.

걱정이라도 됐는지, 참다못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순간 보라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아! 핸드폰.”

뭔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보라가 큰소리로 외쳤다.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사진을 유출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밝히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진짜로 핸드폰을 잃어버리면 간단했다.

누군가 잃어버린 핸드폰 안에 들어 있는 사진과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린 게 아니냐고 하면 될 것 같았다.


“일단 핸드폰부터 사자.”

보라는 마치 기다리고 기다리던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한껏 들떠 버렸다.

***



“서연 씨. 밥 먹고 자요.”

권율은 서연의 머리를 쓸어올리며 속삭였다.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이 든 서연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으음. 지금 몇 시예요?”

“5시요.”

“……벌써요?”

오후 5시라는 말에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난 데다 권율과의 관계도 한층 가까워져 긴장이 제대로 풀려버렸다.

사실 서연은 밥이고 뭐고 잠이나 실컷 자고 싶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권율은 잠에 취한 서연의 이마를 짚었다.


“어, 어. 일어날 거예요. 어, 금방 벌떡 일어나서…….”

서연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권율이 서연을 번쩍 안았다.


“한 숟가락이라도 꼭 먹어요. 어서요.”

권율은 서연이 잠든 사이,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로 식사를 차렸다.


“으음…… 알았어요.”

서연은 권율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웅얼거렸다.

그는 가볍게 걸음을 옮겨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나, 배고파요. 서연 씨.”

배고프다는 권율의 말에 서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무리 졸리고 피곤해도 저 커다란 남자를 굶길 수는 없으니까.


“미안해요. 많이 배고팠죠? 냉장고에서 뭐라도 꺼내 먹지 그랬어요.”

그의 다리에서 슬금슬금 내려온 서연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권율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지근한 물을 서연의 입에 가져다 댔다.


“물부터 마셔요.”

꿀꺽꿀꺽 물을 넘기자 그는 서연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듯 매만졌다.


“자요. ‘아’ 해요.”

“내, 내가 먹을게요.”

“내가 먹여주고 싶어서 그래요.”

그는 새우볶음밥을 한 숟가락 떠서는 서연의 입에 얼른 넣어줬다.

얼떨결에 입안으로 들어온 밥을 씹으려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자다 일어나서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앉아 커다란 남자가 먹여주는 밥을 아기 새처럼 받아먹고 있다니.

뭔가 바뀐 것 같기도 하고, 살짝 민망하기까지 했다.


“율이 씨는 왜 안 먹어요?”

그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서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실 2시간 전에 너무 배고파서 이것저것 먹었어요.”

“잘했어요. 그래도 더 먹어요. 배고프다면서요.”

그가 배시시 웃으며 서연의 입에 밥을 또 넣어줬다.


“부모님 마음이 이런 건가 봐요.”

“부, 부모님이요?”

갑자기 소환된 부모님 마음이라는 단어에 서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서연 씨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서요.”

그는 너무도 행복한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서연이 어떤 버튼을 잘못 눌렀는지. 권율은 봇물이 터지듯 자신의 감정 상태를 여과 없이 쏟아냈다.

그는 오물오물하는 게 다람쥐 같다며 서연의 뺨을 연신 쓰다듬었다.


“입을 벌리는 모습이 아기같이 귀여워요.”

아기? 아기라니.

예쁘다, 섹시하다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아기같이 귀엽다는 말은 생전 처음이었다.

당황한 서연이 놀란 표정을 짓자 권율은 또 참지 않았다.

그는 서연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고는 ‘귀여워요’와 ‘사랑해요’라는 말을 백 번쯤 중얼거렸다.

치명적인 그의 달콤한 사랑에 서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웅웅―.

그때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다.


“앉아 있어요. 내가 가져올게요.”

권율이 재빨리 일어나 핸드폰을 서연의 손에 쥐여 줬다.

서연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잠시 망설였다.

타이밍도 참…….

방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의 옆에서 통화를 하는 것도 곤란했다.

서연이 고민하는 사이, 권율의 눈빛이 왜 안 받느냐고 묻고 있었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어렵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엄마.”

안 그래도 민혁 일로 물어볼 게 있었지만, 권율이 옆에 있어 지금은 묻지 않기로 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걱정했잖아.]

“걱정할 게 뭐 있어. 너무 피곤해서 자다가 지금 일어났어.”

[어제 행사는 잘 끝났고?]

단순한 안부 전화인 것 같아 내심 안도했다.

서연은 경숙이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줄줄이 읊었다. 그래야 전화를 빨리 끊을 수 있으니까.


[사진 찍은 것 있으면 단톡방에 보내봐.]

“응. 알았어. 바로 보낼게.”

서연은 경숙에 말에 무조건 알겠다고 대답했다.


[집에는 언제 올 거야?]

“가긴 가야지. 근데 오늘은 좀 피곤하니까. 다음에.”

[그래, 그럼. 서연아.]

“응. 나도 엄마 사랑해. 아빠도 사랑하고. 단톡방에 사진도 얼른 올릴게. 밥도 잘 먹고 다니고.”

서연이 해야 할 말을 마구 쏟아내고는 ‘전화할게’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나도 사랑해, 우리 딸. 그러니까 최 대표랑 집에서 밥 좀 먹을게.]

은근슬쩍 넘어가는 경숙의 말에 하마터면 알겠다고 대답할 뻔했다.


“누, 누구?”

최 대표라니. 서연과 경숙이 아는 최 대표는 한 사람뿐이었다.


[DN 홈쇼핑 최민혁 대표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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