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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책임질 기회 (73/130)


73. 책임질 기회
2022.10.13.



 
서연은 권율이 옆에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최민혁 대표를 왜 집으로 불러.”

안 그래도 어젯밤 민혁의 말과 행동이 거슬렸는데, 부모님 집에서 식사라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엄마.”

서연은 경숙을 향해 한바탕 짜증을 쏟아내려다 순간 ‘아차’ 싶었다.

힐끔 쳐다본 권율의 표정이 마치 세상을 다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해하는 그의 앞에서 불편한 이야기를 대놓고 꺼낼 수 없었다.


‘안 되겠다. 방으로 들어가서 대충이라도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지.’

서연은 반쯤 몸을 일으켰다.


“!”

그 순간 권율이 서연의 손을 잡으며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지만 다른 곳에서 통화하지 말라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서연은 스르륵 다시 주저앉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연아. 엄마 말을 좀 들어봐. 큰집 혜빈이가 이번에 날짜를 잡았다고 하잖아.]

어느 집이나 있는 친척들 간에 보이지 않는 자존심 경쟁.

경숙은 서연보다 어린 큰 집 막내가 괜찮은 남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부쩍 초조해졌다.


“혜빈이가 시집가는 거랑 최 대표가 무슨 상관이야.”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경숙의 돌직구에 서연은 한숨만 내쉬었다.

반박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지만, 권율이 옆에 있어 참아야만 했다.


[재벌 3세에 뭐 하나 빠지는 것도 없지. 너 좋아하는 눈치지.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어?]

있으면 말해보라는 경숙의 재촉에 서연은 할 말을 잃었다.

‘현실’과 ‘조건’이라는 강력한 전제를 무슨 수로 당해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민혁의 성격을 탓하기에도 그를 자세히 모르는 데다 구차한 변명 같아 보였다.


[서연아. 금방 서른이잖아. 엄마 마음이 불안해서 그래. 뭐 당장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라…….]

경숙의 설득이 길게 이어졌다.

서연은 현실을 직시하라는 경숙의 쓴소리를 들으며 눈으로 권율의 표정을 살폈다.

워낙 집안이 조용하다 보니 잔뜩 흥분한 경숙의 목소리가 스피커폰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권율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경숙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래도 엄마가 잘못한 거야? 최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가까이서 겪어봐야지.]

“하아. 나중에 다시 얘기해. 생각 좀 정리할게.”

논리적인 경숙의 말을 더는 들을 자신이 없었다.

사실 이 타이밍에서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간단하게 넘어갈 일이었다.

하지만 권율과 상의하지 않은 상황에서 선뜻 말하기가 부담스러웠다.

거기다 남자 친구의 존재를 밝히는 즉시 몇 살인지부터 물을 텐데. 첫 질문부터 말문이 막힐 게 틀림없었다.


[알았어. 그럼 정리되는 대로 엄마한테 전화해. 아니면 집에 와서 아빠랑 다 같이 상의를 하든가. 응?]

대충 알겠다고 대답했다.


[너도 앞자리가 바뀌는 순간 적은 나이 아니야. 어영부영하다가 금방 서른 중반 된다고.]

“하. 일단 알았어. 이만 끊을게.”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경숙의 목소리가 뚝 하고 끊어지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조금 전까지 밥을 먹여주며 달달했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각자 생각에 잠겨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보다 못한 권율이 먼저 나섰다.


“괜찮아요?”

서연은 최대한 멀쩡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쩌지’와 ‘모르겠다’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를 권율에게 해결해 달라고 떠넘길 수는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고, 이미 예상했던 시나리오였다.


“율이 씨. 엄마 말은요. 그게 좀 복잡한 집안 얘기예요.”

좋지도 않은 집안 이야기를 꺼내는 게 구구절절했지만, 권율이 민혁 때문에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하. 그게 우리 엄마가 아들 때문에 눈치 아닌 눈치를 받아서요. 그래서 큰 집 일에 좀 예민해요.”

아무래도 사촌 동생의 결혼이 경숙의 ‘예민 버튼’을 누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엄마한테 잘 얘기해서 최 대표님이랑 만나지 말라고 할게요.”

서연의 설명에 권율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기분 나쁜 건…… 아니죠?”

서연은 저도 모르게 눈치를 봤다.


“서연 씨.”

권율이 커플링을 낀 서연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나한테 기회를 줄 수 있어요?”

“어떤…… 기회요?”

“서연 씨 부모님께 인사드릴 기회요.”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 권율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아직…….”

서연이 그와 잡았던 손을 놓으며 손사래를 쳤다.


“알아요. 아직 졸업도 안 한 대학생이고, 직장도 없고, 최종 합격을 받은 게 아니라는 걸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율이 씨도 알잖아요.”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잔잔한 바다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권율은 뭔가 진지하면서도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물론 그 칼날의 방향이 서연은 아니었다.


“어머님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게 없어요.”

그는 너무도 솔직했다.


“충분히 하실 수 있는 걱정이세요.”

권율은 경숙의 말을 공감했지만 그렇다고 서연과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사귀는 것 때문에 서연이 부모님의 잔소리와 압박에 시달리는 건 싫었다.

그러려면 뭔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정면 돌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어젯밤 우리 둘, 진심이었잖아요.”

“…….”

“물론 어젯밤 때문만은 아니에요. 처음부터 책임감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요.”

권율은 ‘책임’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거침없이 꺼내 들었다.


“내가 서연 씨한테 책임을 다할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서연은 그를 말릴 수도 그렇다고 잘 생각했다고 격려할 수도 없었다.

당사자이면서도 방관자처럼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조심스럽기만 했다.


“율이 씨. 나도 율이 씨한테 책임감을 느껴요. 우리 관계가 남다르니까요. 하지만…….”

“아니요. 난 서연 씨랑 미래를 함께하고 싶어요. 그 생각은 한 번도 변한 적 없었고. 부담스럽지도 않아요.”

너무도 단호한 그의 반응에 괜찮다는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부모님께 인사할 기회만 줘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서연 씨가 힘들지 않도록요.”

권율의 말에서 뭔가 거절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지금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서연 씨 부모님께 가장 솔직하게 모든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이렇게까지 진심이라니.

서연은 권율이 어떤 생각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더는 말릴 수 없었다.


“알았어요. 그래도 더 신중하게 생각해봐요.”

고개를 끄덕인 권율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안고 싶어요.”

순간 서연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권율의 다리 위에 앉았다.

그러자 기다란 팔이 포근하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는 서연 씨를 믿고, 서연 씨는 나를 믿고. 그러면 모든 게 다 잘 될 수 있어요.”

 

 
정수리에서 울리는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 때문에 어머님이랑 싸우지 말아요.”

걸어 다니는 도덕책 아니랄까 봐.

권율은 서연이 언성을 높여서 깜짝 놀랐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난 서연 씨 부모님께 너무 감사해요.”

빼꼼 고개를 젖힌 서연이 권율의 입술을 바라봤다.


“이렇게 예쁜 서연 씨를 낳아주신 분들이니까요. 나중에 꼭 업어 드리고 싶어요.”

순간 커다란 권율에게 업힌 경숙의 모습이 떠오르자 서연이 킥킥거렸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우리 율이 씨는 왜 이렇게 예쁜 말만 하지?”

“더 예쁜 말도 할 수 있는데. 들어 볼래요?”

권율은 서연의 귓가에 너무도 솔직한 말들을 쏟아냈다.

그러자 서연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지, 지금이요?”

허락을 바라는 권율이 눈빛이 진지하다 못해 뜨거웠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이 서연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말했다.


“예쁜 입술 망가져요.”

자상한 권율의 행동에 서연은 마음을 굳혔다.


“알……았어요. 나도 좋아요.”

서연의 대답에 권율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내 어깨 꼭 잡아요.”

서연은 마치 놀이기구의 안전벨트를 매듯 권율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순간 ‘붕’ 하고 몸이 떠올랐다.

권율은 서연을 안고 가뿐히 걸음을 옮겨 욕실로 향했다.

***

햇볕이 따가운 일요일 오후.

권율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에어컨부터 켰다.

다들 외출했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느 때라면 재킷부터 가지런히 걸어놨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복숭아같이 달콤한 서연과 떨어진 순간, 기다렸다는 듯 모든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집으로 오는 내내 권율은 한 가지 생각에만 집중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사랑하는 서연을 지키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다 서연에게 했던 말을 곱씹었다.

호기롭게 내뱉은 것처럼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만약 그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 실망감을 어떻게 수습하지?

수많은 계획과 다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무리 방안을 서성여도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두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처음으로 그녀와 오랜 시간 함께 보내서인지. 서연의 따듯했던 체온과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소중한 것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천천히 손을 오므렸다.


“하아…….”

그러곤 재킷이 구겨지거나 말거나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천장을 향해 깊은 한숨을 쏟아내다가 민혁을 떠올렸다.

자신만만한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것이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타개할 방법은 과연 있는 걸까.

자신을 향한 수많은 질문 속에서 난데없이 친구 원준이 생각났다.

직접적인 도움은 안 되더라도 민혁의 현재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그게 어렵다면 민혁의 연애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나선 원준 어머니의 계획이라도 듣고 싶었다.

권율은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원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율아. 일요일 오후에 웬일?]

‘여보세요’를 하기도 전에 원준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오전에 골프 치고 힘들어서 쉬는 중. 왜 심심해?]

원준은 힘들다면서도 부르면 당장 나올 것 같은 기세였다.


“골프 쳤구나. 누구랑?”

[누구긴 누구야. 우리 집 무서운 사람들이랑 치지. 괜히 나가서 잔소리만 실컷 듣고 왔다.]

권율은 민혁의 상태를 대놓고 물을 수 없어 빙빙 말을 돌렸다.

그러다 원준의 입에서 민혁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때를 놓치지 않았다.


“삼촌은 주말인데 집에 계시나 봐.”

[너도 우리 삼촌한테 관심 있냐?]

관심?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무슨 뜻이야?”

[아니. 금요일 밤에 우리 삼촌이 갑자기 내 방에 찾아왔더라고.]

금요일 밤이라면 행사가 끝난 직후였다.


[삼촌이 워낙 바빠서 평일에는 볼일이 없거든. 그날은 심심했는지 괜히 이것저것 묻더라.]

“뭘 물었는데?”

[내 소개팅 얘기랑 네 시험이랑.]

“그리고?”

[흐음……. 아! 내 계절 학기랑 네 연애랑.]

자신의 연애라는 말에 권율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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