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팩트 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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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팩트 폭행
2022.10.16.
‘내 연애?’
권율은 자신이 민혁보다 한발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왜 궁금하신데?”
[그야 삼촌이 너한테 이것저것 꿀팁을 전수해줬으니까. 잘하고 있는지 중간 점검하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떤 정보가 넘어갔는지 확인은 해야 했다.
“그래서 다 말했어?”
[내가 뭘 다 알아야 말하지. 그냥 누나랑 잘 사귀는 것 같다라는 거랑…… 또 뭐라고 했지? 아!]
제발 이상한 말을 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누나가 저번에 학교 찾아왔을 때 진보라가 난리 친 거 말해줬지. 나의 멋진 활약상을 양념처럼 곁들여서.]
역시나…….
너무도 해맑은 원준은 제일 중요한 사실을 발설해버렸다.
도대체 아군인지 적군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원준 때문에 짜증이 솟구쳤다. 하지만 대놓고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자신이나 민혁에게 상대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원이 원준이었으니까.
“설마 보라에 대해서 자세히 말한 건 아니지?”
[자세히? 날 뭐로 보고. 당연히…… 했지.]
“뭐!”
[자꾸 널 귀찮게 하니까. 그냥 너를 향한 지독한 짝사랑 중이라는 거랑, 어느 집안인지 정도?]
“하아. 원준아.”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건 마치 민혁에게 공격당할 수 있는 모든 패를 내어준 꼴이었다.
[왜. 내가 너무 떠들었어?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삼촌 마음이 헛헛해서 잠깐 놀아준 거야.]
“헛헛?”
그는 헛헛하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서연을 뺏어갈까. 그 생각뿐인 것처럼 보였다.
[나랑 삼촌이랑 얘기하고 있는데 우리 엄마가 막 눈짓하더니. ‘집으로 언제 초대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었거든.]
“어. 그런데?”
[삼촌이 당분간은 안 된다고 기다려달라고 하더라. 뭔가 원활하지 않다는 신호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시간을 번 김에 긴장감을 최대한 올려야 하나.
권율의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아, 참. 너 누나한테 물어봤어? 내 소개팅 말이야.]
“아직.”
곧 얘기하겠다고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원준의 재촉이 시작됐다.
[내일 꼭 좋은 소식 가지고 와라. 내가 점심 먹으면서 확인할 테니까.]
전혀 무섭지도 않은 원준의 협박에 순간 피식하고 웃었다.
워낙 꾸밈없는 스타일이라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 원준의 투정을 잠시 더 들어줬다.
“일단 알았어. 얘기해 볼게.”
권율은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때 핸드폰 너머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준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통에 정확한 대화 내용을 알 수 없었지만, 민혁이었다.
[율아. 나 심부름 가야 해. 내일 학교에서 보자.]
뚝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권율은 어두워진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저도 모르게 민혁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최민혁…… 최민혁…….”
만약 해맑은 원준이 은연중에 더 많은 정보를 흘렸다면 민혁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순간 민혁의 말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다음 주 신사업 회의에서 뵙죠.’
너무도 당당하게 서연과 만날 약속을 잡았으니 분명 적극적으로 나올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서연이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민혁이 그녀의 부모님을 만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뭔가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했다.
‘따로 만나자면서, 할 얘기가 있으면 찾아와.’
권율의 머릿속에는 ‘찾아와’라는 그의 말이 빙빙 맴돌았다.
“하아…….”
깊은 한숨을 토해낸 권율이 그의 명함을 꺼냈다.
-DN 홈쇼핑 대표이사 최민혁
범접할 수 없는 그의 명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무언가에 홀리듯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곤 11자리의 숫자와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울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서연 씨만 생각하자. 서연 씨만.’
손발이 축축해질 만큼 긴장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서연을 생각하며 그의 목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여보세요.]
차분한 저음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권율입니다.”
민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가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권율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 그래.]
피식하고 새어 나오는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생각보다 일찍 연락했다는 의미인지 몰라도 그의 짧은 웃음이 몹시 거슬렸다.
“만나 뵙고 싶습니다.”
[언제?]
“오늘은 어려우실까요?”
아직 일요일이고, 그가 집에 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평일까지 미룰 필요가 없었다.
[권율, 술 좀 마셔?]
대뜸 술을 마시냐는 그의 말에 처음으로 자신의 주량을 후회했다.
모범생처럼 술 한 방울 못 마시는 자신을 얼마나 어리게 생각할까 싶어서 말이다.
“아니요. 하지만 커피숍에서 뵐 수는 없으니까. 장소 말씀하시면 거기로 나가겠습니다.”
피식, 그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또 들려왔다.
순간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쓸데없는 자존심인지 몰라도 그의 작은 행동이나 말투, 심지어 웃음소리에도 잔뜩 예민해졌다.
[이 번호로 장소랑 시간 보내줄게. 거기로 와.]
“네. 곧 뵙겠습니다.”
나름 예의를 차린 권율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가 뚝 하고 끊어졌다.
“하…… 젠장.”
권율은 자신의 어휘 사전에 있는 최고 수준의 험한 말을 내뱉었다.
도대체 뭐가 이렇게 제멋대로인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서연에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접근할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권율이 커다란 주먹을 말아쥔 사이, 바로 알림이 울렸다.
<저녁 7시. 청담동 L37>
장소를 확인하자마자 권율이 ‘쿵’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둠이 내려앉은 왕복 12차선.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고, 고층 빌딩들의 불도 대부분 꺼져 있었다.
달칵달칵―.
방향 지시등을 켜고 이면도로 안쪽으로 들어가자 블랙 간판에 붉은 색으로 쓰인 ‘L37’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권율은 입구에서 발렛 주차를 맡기고 커다란 문을 열었다.
어두우면서도 고급스럽고, 어딘가 모르게 묘하게 화려한, 정말 이상한 곳이었다.
커다란 권율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예약하셨어요?”
“네. 최민혁 대표님이요.”
그저 민혁의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순간 직원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원은 대단한 손님을 맞이하듯 깍듯한 몸놀림으로 앞장섰다.
바닥에 박힌 은은한 불빛을 따라가자 커다란 방문이 열렸다.
“일행분이 오셨습니다.”
직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민혁의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했다.
위스키 온더록스를 마시던 민혁의 입가가 쓱 올라갔다.
달그락거리는 얼음 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을 뿐, 그는 또 가벼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편하게 앉아.”
그는 가볍게 툭 던지는 말투와는 달리 권율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권율은 망설임이 없이 민혁의 바로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와 사적인 대화를 나누자고 만난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가능하면 협상을 하듯 대등한 위치에서 당당하고 싶었다.
“재밌네…….”
그의 나직한 혼잣말에 권율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에게 말려드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수 있었다.
최대한 이성적 접근하고, 꼭 해야 할 말만 빠짐없이 할 생각이었다.
“술은 원래 못하고?”
“네. 마시고 싶지 않아서요.”
“하긴 너나 원준이나 술맛을 알기에는 아직 어리지.”
굳이 이 자리에서 조카 원준을 꺼내며 어리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의 기선제압에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나중에 사회 생활하려면 적당히 마실 줄도 알아야 해.”
권율은 가르치려는 그의 태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 그래.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은?”
다양한 경험에서 오는 여유 때문인지. 민혁은 크리스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자연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서연 씨는 저랑 사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서연 씨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크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달 사귄 남자 친구의 참견이라…….”
“참견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경고? 허.”
이 상황이 기가 막힌 건 마찬가지인데도 민혁은 헛웃음을 대놓고 웃었다.
“사귄 지 오래되면 참견해도 되고, 한 달 남짓이면 안 되는 겁니까?”
권율의 반박에 민혁의 눈동자가 순간 번쩍였다.
“서연 씨가 저와 함께하기로 결정했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는데?”
“그거야 당연히…….”
권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혁이 탁하고 잔을 내려놨다.
“5년? 10년? 아니면 네가 결혼 적령기가 될 때까지?”
압도적인 민혁의 시선이 권율을 꿰뚫을 듯 쳐다봤다.
“지금은 좋겠지. 연애 한 번 못 해본 모범생이 예쁘고 능력 있는 서연 씨를 만났으니까.”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라는 말이 비아냥처럼 들렸다.
“그런데 서연 씨가 한 살, 두 살 너와 예쁜 사랑만 나누다 나이가 들면. 그땐 어쩔 건데?”
“그 전에 제가 미래를 함께할 생각입니다.”
“어떻게?”
“최 대표님께 말씀드릴 이유도 없고,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단호하게 그의 질문을 잘랐다.
“내가 대신 말해볼까? 행시 붙으면 프러포즈라도 할 생각이겠지.”
민혁은 권율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간 사람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대학은 어쩌려고. 아무리 행시가 된다고 해도, 학교는 마쳐야지. 안 그래?”
비수 같은 말들이 끝도 없이 날아왔다.
“똑똑한 네가 다 알아서 한다고 치자. 그럼 집에는 뭐라고 할 건데?”
권율은 그가 어디까지 하려는지 빤히 지켜봤다.
“너희 할아버지 성격이 그렇게 대단하시다면서. 그런 분이 서연 씨한테는 어떻게 하실까?”
“…….”
“난 그림이 딱 그려지는데. 넌 어때?”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걸 알고 있는지. 민혁은 모르는 게 하나도 없었다.
“네가 아무리 고집을 부린다고 해도 집안의 반대를 만만하게 넘어갈 수 없을 거야.”
“아무것도 단정 짓지 마세요.”
민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쓰디쓴 충고를 시작했다.
“우리 형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너도 잘 알 거야.”
“…….”
“그런 사람도 반대하는 결혼 앞에서는 눈물을 쏟고, 무릎을 꿇더라.”
‘하물며 네까짓 게. 서연 씨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겠다고?’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권율의 머릿속에 소리 죽여 눈물짓는 연희와 서연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똑같은 불행을 반복할 순 없으니까.
“게다가 JS 보험에서 너를 탐내는 것 같던데. 아니야?”
민혁은 좋게 말하면 정보력이 뛰어났고, 나쁘게 말하면 용의주도했다. 그 며칠 사이, 민혁은 권율의 모든 약점을 손에 쥐었다.
“서연 씨가 나에게 온다면 말이야.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축복할 거야. 상처나 시련 따위는 전혀 없다고. 너와 난 상황이 다르니까.”
그는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서연만 불행해질 거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권율은 그 말을 듣자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까지 연애도 해볼 만큼 해봤고. 솔직히 서연 씨를 만난 이후로 다른 여자는 쳐다보고 싶지 않아.”
민혁은 두 사람이 사귀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그러니까 너에게 걸맞은 상대를 찾아. 서연 씨 말고.”
걸맞은 상대라니.
순간 복잡했던 권율의 머릿속이 단순해졌다. 그는 허리를 바짝 세우고, 넓은 어깨를 일직선으로 쫙 폈다.
“하고 싶은 말씀 다 하셨어요?”
권율의 눈빛이 차갑게 돌변했다.
“이제 제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