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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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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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2022.10.27.
서연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튀어’라는 말부터 떠올렸다.
갑자기 대표실로 회의 장소가 바뀐 것도, 이사장이 끝날 시간을 알고 극적으로 등장한 것도. 모두 민혁의 큰 그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윤선의 앞에서 내색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재단 이사장임과 동시에 원준의 어머니였으니까. 가능하면 권율과 연결된 사람에게는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서연 씨. 오랜만에 보니까 더 반가워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이사장님.”
“서연 씨가 저번처럼 언니라고 불러주면요.”
서연은 살갑게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윤선과 민혁이 함께할 경우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급한 일 있는 것처럼 양해를 구하고, 이사장님과 만날 약속을 따로 정하자.’
일단 플랜 A였다.
물론 윤선이 중요한 용건 때문에 민혁을 찾아왔을지도 모르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었다.
‘만약 그게 안 되면 식사 말고, 차 한잔. 무조건 여기서 끝내야 해.’
어영부영 밖으로 함께 나갔다가 윤선이 중간에 빠진다거나, 민혁에게 집까지 데려다주라는 불편한 상황을 차단해야 했다.
그러려면 가능한 대표실에서 벗어나지 않고 윤선과 함께할 수 있는 플랜 B도 정했다.
서연은 가방을 다 정리하자 슬슬 작별 인사를 고할 타이밍을 살폈다.
“대표님. 차량 대기 중입니다.”
센스 만점 최 비서가 서연의 불편한 기색을 파악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서연은 최 비서에게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는 커다란 명품가방을 팔에 걸었다.
“이사장님. 오늘 만나 뵙게 돼서 너무 반가웠습니다.”
윤선과 다음에 만날 약속을 정하고 슬며시 빠지면 플랜 A가 성공이었다.
“다음 주에 시간 괜찮으시면 찾아뵙겠습니다. 언니.”
언니라는 호칭까지 선보이며 친근함을 강하게 어필했다.
“어머! 벌써 가려고?”
“아. 네. 최 대표님이 보고서 숙제를 내주셔서요.”
서연은 지분 비율을 조정하고 싶으면 정식으로 보고서를 내라는 민혁을 탓하며 과장되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최 대표님이 어려서부터 공과 사는 확실하시지.”
윤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윤선이 부드럽게 손을 잡아끌었다.
분명 손만 잡혔을 뿐인데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직원들은 모두 나가고 서연의 앞에 유자에이드가 놓여 있었다.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혼자서만 시간을 건너뛴 기분이었다.
“이번에 행사가 그렇게 핫했다면서?”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 잠깐 방심했다가는 저녁까지 함께할 태세였다.
서연은 속으로 딱 1시간만을 외치며 얼른 표정을 고쳤다.
“다음 행사에는 티켓 보내드릴게요. 놀러 오세요.”
“나 같은 아줌마가 그런 행사 가면 민폐지. 대학생인 우리 큰아들 주면 모를까.”
아들이라는 윤선의 말에 서연은 속으로 뜨끔했다. 그 아들의 절친이랑 사귀는 사이였으니까.
“그래도 언제든 필요하시면 말씀 주세요.”
서연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 사이, 민혁은 상석에 앉아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대화에 전혀 끼지 않았지만, 회의 시간과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대표실에 있는 대표를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서연은 민혁이 신경 쓰여 자꾸 힐끔거렸다.
“오늘 용건이 있으셔서 오신 거면 제가 그만 일어날까요?”
“아니야. 괜찮아. 우리 재단에서 자선 행사하거든. 홈쇼핑에서 지원받을 게 있어서 나왔다가 도련님 얼굴이나 보러 온 거지. 뭐.”
얼굴도장이나 찍으러 왔다는 말에 서연의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정말 저녁까지 함께 먹게 될까 봐, 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일어날 타이밍을 쟀다.
“서연 씨.”
“네?”
“이번 행사에 서연 씨 회사도 기부 좀 할래?”
“얼마나 해드리면 될까요?”
현금인지, 현물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좋은 일을 쓸 테고, 이번 기회에 윤선에게 좋은 점수를 더 따면 그게 더 남는 장사였다.
“우리 서연 씨가 이렇게 시원시원하다니까. 현금…….”
대화 도중 윤선의 가방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양해를 구하는 윤선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연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어.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윤선의 심각한 반응에 서연의 시선이 그녀의 핸드폰으로 쏠렸다.
“아니야. 통화 괜찮아. 잠깐만, 율이 엄마.”
율이 엄마?
순간 서연의 눈동자가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이사장님하고 율이 씨 어머님도 친한 사이인가?’
권율과 원준이 절친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어서 심상치 않은 목소리로 전화했을까.
서연의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통화가 길어질 것 같은지, 윤선은 밖을 가리키며 황급히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침묵이 흐른 것도 잠시, 민혁은 상체를 돌려 서연을 쓱 쳐다봤다.
“율이 엄마라는 말에 놀랐습니까?”
뚫어질 듯 문만 쳐다보던 서연의 시선이 민혁에게로 향했다.
“혹시, 이사장님 일부러 부르신 거예요?”
“아니요. 하지만 회사에 오신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요?”
“믿고 안 믿고야 서연 씨 마음입니다. 난 회의 장소만 옮겼을 뿐이니까요.”
윤선이 온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의도하진 않았다라…….
의심스러운 상황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었지만, 문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가 더 신경 쓰였다.
모든 감각을 귀에 집중한 사이, 민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까 형수님과 율이 어머니, 아주 가까운 사이더라고요.”
안 그래도 심장이 조마조마해 죽겠는데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자주 만나는 기본이고, 집안 사정도 훤하고요.”
서연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민혁은 아주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율이 여자친구가 서연 씨라는 걸 알면, 형수님이 많이 놀라시겠네요.”
“이 상황이 재미있으세요?”
“그럴 리가요.”
말은 아니라고 해도 민혁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앞으로 서연 씨한테 다가올 현실이 만만치 않을 텐데 재미있을 수가 있나요.”
“제 현실이 어떤데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잖아요. 지금 서연 씨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민혁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서연의 미간을 가리키자 버럭 소리칠 뻔했다.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것 봐라, 권율이랑 사귈 때부터 알아봤다’라고 탓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편하고 쉬운 길을 찾아봐요.”
그는 자신을 대놓고 지칭하지 않았지만, 입꼬리를 느긋하게 올리는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막 한 마디를 쏘아주려던 그때, 윤선이 급하게 들어왔다.
“하. 서연 씨, 미안해. 대화하다 말고 통화가 길어져서.”
“급한 일이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서연은 혹시라도 윤선이 통화내용을 말해줄까 싶어 억지로 미소를 지어냈다.
그러자 한숨을 푹 내쉰 윤선이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내가 남의 말 하는 것 같아서 좀 그런데…….”
서연은 대놓고 괜찮다고 말할 수 없어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윤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같은 여자로 꼭 조언해주고 싶은 게 있어.”
“어떤…… 말씀이실까요?”
초조한 마음을 감추려 서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서연 씨, 결혼은 현실이야. 아무리 남자를 사랑해도 시집살이 시킬 것 같은 집안이면 시작도 하지 마.”
시집살이라니. 도대체 그의 어머니와 무슨 통화를 하고 왔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앞뒤 맥락을 알 수 없어 서연은 혼란스러웠다.
“시어머니나 시할머니는 같은 여자니까 힘들게 대하셔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
“…….”
“그런데 시아버지나 시할아버지가 이상하면. 후우…… 그건 답도 없다.”
절대불변의 진리라는 듯 결혼 선배 윤선의 조언에 서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 시아버지가 하도 별나서 매일 눈물로 사는 친구가 있거든.”
‘대체 얼마나 별나기에 율이 씨 어머니가 매일 눈물로 사신다는 거야. 하아. 궁금하다.’
솔직히 민혁만 없었다면 어떤 사연인지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싶었다.
“오늘 그 집이 발칵 뒤집힌 모양인데. 아니 며느리만 잡는다고 일이 해결되느냐고.”
같은 며느리로 이해가 안 된다는 윤선의 다음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서연의 머릿속에선 오로지 ‘발칵’이라는 단어만 커다랗게 박혀 있었다.
“서연 씨도 주위에 결혼한 친구가 있으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 거야.”
사실 무슨 말인지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서연의 친구들은 시집살이는커녕 모두 존중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니까.
“하. 괜히 나까지 심란한 바람에, 바쁜 사람 붙잡고 쓸데없이 말이 길었네. 그런데 말이지…….”
윤선이 씽긋 웃으며 서연과 눈을 마주했다.
“참고로 우리 집안은 시집살이를 시키실 분이 아무도 없어.”
순간 민혁이 피식하고 웃었다.
“아마 뉴스에서 봤을 거야. 우리 아버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도련님이 결혼 마음만 먹으면 만사 오케이라고 하셨거든.”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인 윤선의 말에 서연은 가슴에 거대한 돌덩이가 얹어진 기분이었다.
“대표님이 어서 좋은 분과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서연은 자신과 민혁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손목을 쳐다보며 과장되게 말했다.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가려고?”
“네. 회사에 가봐야 해서요. 자선 행사는 가이드 주시면 성심성의껏 준비하겠습니다.”
서연은 권율의 집안에 무슨 난리가 났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몹시 조급했다.
“내가 비서 통해서 자료 보내줄게.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DN 그룹 스케일로 주시면 큰일 납니다. 구멍가게 수준으로 부탁드릴게요.”
서연은 괜히 쓸데없는 농담을 섞어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 대표님. 다음 회의에 뵙겠습니다.”
서연이 대외적인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건네자 민혁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쓱 손을 내밀었다.
‘악수 참 좋아해’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단단한 민혁의 손가락이 손등을 덮자 묘하게도 권율이 떠올랐다.
“한 대표님의 올바른 판단 부탁드립니다. 보고서든 다른 무엇이든요.”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서연은 일부러 민혁의 손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러자 민혁이 또 피식하고 웃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연은 다급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철컥―.
대표실 문이 닫히자마자, 민혁의 비서가 보거나 말거나 앞만 보고 내달렸다. 그러고는 권율의 번호를 찾아 재빨리 통화버튼을 눌렀다.
“하.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진짜 심각한 일이 생긴 건지, 전화를 5번이나 걸었는데 그는 받지 않았다.
차도 없는 상황에서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권율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집으로 가야 하나. 회사에서 기다려야 하나. 서연은 다음 목적지를 고민했다.
홈쇼핑 로비를 빠져나와 6번째 전화를 걸려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라 받을까 말까 머뭇거리다 서연은 혹시 몰라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여보세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그때 미세하게 흔들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저…… 한서연 씨 핸드폰인가요?]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율이…… 엄마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