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책임질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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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책임질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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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책임질 일
2022.11.03.
서연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간절하게 이별을 부탁하는 이유가 권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라니.
선뜻 이해되질 않았다.
“제가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절 위해서요?”
연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못 할 말도 없겠죠.”
그녀는 반대하는 결혼을 해 어떤 일을 겪었는지, 결혼한 지 25년이 지났어도 남편의 앞길을 막은 죄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꺼냈다.
“왜 그런 대접을 받고도 참고 사는지 묻는다면…….”
연희의 깊은 한숨이 허공을 향해 쏟아졌다.
“아버님 때문에 소중한 가족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할게요.”
차마 말로 담을 수 없을 만큼 억울한 일이 많았지만, 연희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 참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연 씨는 나랑 다르잖아요. 이렇게 큰 회사의 대표고, 멋진 사람이고.”
“…….”
“또…… 앞으로 더 좋은 기회가 얼마든지 있고요.”
‘굳이 우리 율이가 아니더라도’라는 말을 덧붙이진 않았지만, 그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우리 아버님은 율이를 절대 포기하실 분이 아니세요. 저한테 하시던 것보다 10배 아니 100배는 더 하실 거라고요.”
아직 구체적으로 결혼 얘기가 나오지도 않았는데도 앞선 경험자의 무시무시한 경고가 쏟아졌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그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되잖아요.”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도망치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그의 어머니에게 듣다니.
마치 이상한 꿈속을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연희는 잡아먹을 듯한 표정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꼬리처럼 달고 촉촉한 눈동자로 조용히 설득했다.
가슴을 후벼파는 말은커녕 더 힘들어하는 얼굴로 쉽지 않을 거라는 말만 반복했다.
도대체 그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지. 서연은 마음이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어머니가 안타까웠다.
“서연 씨만 독하게 마음먹으면 내가 당장 오늘이라도 아버님께 정리했다고 말씀드릴게요.”
“제가 만약 거절한다면 연희 님 신상에 곤란한 일이 생길까요?”
서연은 진심으로 걱정스러워 물었다.
“아마 오늘의 저처럼 찾아오실 수도 있어요.”
서연은 잠시 고민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그의 할아버지를 맞닥트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찾아가는 편이 나았다.
“제가 율이 씨 할아버님을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정말 보통 분이 아니세요. 괜찮겠어요?”
“저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서요. 물론 율이 씨나 연희 님한테는 예외고요.”
절대 웃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울 수 없어 씨익 하고 웃었다.
“만날 약속 잡아주시면 좋고. 아니면 연락처를 주시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연희가 몇 번을 더 말렸지만, 서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꼭 거쳐야 하는 길이라면 피할 생각은 없었다.
서연의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는지. 연희는 만날 약속을 잡아서 알려주겠다며 한 걸음 물러났다.
“점수 따고 싶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렇게라도 율이 씨 어머님을 뵐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서연은 연희에게로 쓱 다가가 슬며시 손을 잡았다.
“율이 씨가 누굴 닮아서 그렇게 착한가 했더니. 어머님이었네요.”
어머님이라는 말이 물꼬를 트자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제가 2살만 어렸어도 어머님께 허락해달라고 떼라도 써 볼 텐데. 너무 염치가 없어서요.”
“서연 씨…….”
“양심상 지켜봐달라는 말씀만 드릴게요.”
“환영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괜찮다고 속삭였다.
“이렇게 진심으로 대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려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걱정해주는 그 마음이 고맙고, 안절부절못하는 연희를 왠지 지켜주고 싶었다.
순간 서연의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저 눈물을 말리려 시선을 아래로 내렸을 뿐인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이별을 부탁하러 온 그의 어머니는 찾아온 이유도 잊은 채, 덩달아 눈물을 쏟았다.
***
서연이 홈쇼핑 회의가 있는 수요일.
권율은 조용한 도서관에 앉아 회의에 간다는 서연의 톡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율이 씨. 나 회의 열심히 하고 슝 하고 올게요.>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면서도 정작 머릿속을 맴도는 건 민혁의 목소리였다.
‘너희 할아버지가 양쪽 회장들과 구체적인 얘기를 끝냈다는데. 알고 하는 소리야?’
사실 그날 이후 민혁의 그 말이 목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렸다.
석구가 뒤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이사가 결정된 후부터 석구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이상해졌으니까.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데다 여러 핑계를 대며 만남 자체를 피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너무 조용해…….’
권율은 그동안 서연과의 달콤한 평화에 취해 혹시 놓친 것은 없는지 천천히 따져봤다.
‘설마…… 요즘도?’
순간 권율의 머릿속에 부쩍 말이 없어진 연희가 떠올랐다.
원래 조용한 성격이긴 하지만, 평소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묘하게 달랐다.
한번 시작된 의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태연하게 앉아 공부만 할 수 없었다.
‘뭔가 있어.’
권율은 입을 꽉 다문 채 빠르게 책을 정리했다.
서연의 톡에서 출발한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일단 석구의 집으로 향했다.
명확하게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권율의 촉이 깜빡깜빡 경고등을 켜고 있었다.
‘진보라가 잠잠한 것도, 할아버지가 너무 쉽게 물러나는 것도 이상해.’
후덥지근한 날씨만큼이나 짜증스러운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석구의 집 앞에 다다랐다.
높다란 담벼락에 대충 차를 세우고 막 내리는데,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
석구네 가사도우미 2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오는 모습에 권율이 얼른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두 사람은 권율을 보자 흠칫 놀라며 당황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지금 좀…….”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 뭔가 수상해 보이자 권율은 더 예의 바르게 말했다.
“문만 열어주시면 돼요.”
눈치를 살피던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키를 가져다 대자 스르륵 문이 열렸다.
“우리가 열어줬다고 하지 마세요.”
권율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얼른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있다는 확신이 들자 빈주먹을 말아쥔 권율의 맥박이 요란하게 팔딱거렸다.
그림 같은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열자 사나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이 집에 들어와 한 일이 뭐냐!”
석구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연희뿐이었다.
“아들을 앞세워 이사 가겠다고 하질 않나.”
“…….”
“어디서 가당치도 않은 여자랑 사귀는 것도 모르고. 내가 나서기 전에 알아서 해결해!”
석구가 허공에 대고 떠드는 것처럼, 연희는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러자 한심스럽다는 듯 석구의 혀 차는 소리가 비수처럼 쏟아졌다.
권율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석구의 억지소리를 빠짐없이 들었다.
“네가 남편을 주저앉힌 것도 모자라서 이제 훌륭한 아들까지 망치려고 들어?”
“절대 아닙니다. 아버님.”
석구는 연희를 향해 모든 원망을 실컷 퍼붓더니 갑자기 태세를 전환했다.
“그렇다면 네 진심을 보여 봐. 율이가 보라와 결혼할 수 있게 말이다. 그러면 내가 앞으로 네가 무슨 소리를 하든 다 믿어주마.”
“율이가 저렇게 싫다는데 무슨 수로 보라와 결혼을 시키겠어요. 게다가 지금 만나는 사람 때문에라도…….”
“만나는 사람? 허허. 참. 내일모레 서른이라는 여자랑 허락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인데. 잘못 개입했다가는 역효과만……”
연희의 뒷말은 석구의 천둥 같은 고함에 들리지도 않았다.
도대체 서연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을까.
지금 당장 생각나는 사람은 서희뿐이었다. 그러나 서희가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역효과? 넌 너보다 못한 며느리를 봐야 속이 시원하지!”
석구의 달라진 모습이 석연치 않았지만, 이번 기회에 뭔가 느끼는 바가 있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연희를 집으로 불러 더 못살게 괴롭히고 있었다니.
권율은 안일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견딜 수 없는 후회가 밀려오자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이 꾸며진 거실은 참 가관이었다.
김 여사는 값비싼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을 매만지며 피식거리고 있었다.
거기다 연희는 대역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고개가 땅에 닿을 지경이었고, 석구는 입으로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엄마.”
갑작스러운 권율의 등장에 세 사람의 고개가 한꺼번에 돌아갔다.
“율아!”
당황한 연희가 얼굴을 들자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권율은 말없이 연희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연희를 부드럽게 안아 일으켜 세웠다.
“엄마. 그만 일어나요.”
“율아. 있잖아. 그게…….”
“매번 저 때문에 죄송해요.”
권율은 한쪽 손에는 연희의 가방을, 다른 쪽에는 연희의 손을 쥐었다.
“자세한 얘기는 집에 가서 할게요.”
권율은 석구를 의식하는 연희를 꼭 안아주며 속삭였다.
“바로 가셔야 해요. 저는 할아버지랑 얘기 좀 하고 갈게요.”
자꾸만 석구의 눈치를 보는 연희의 몸을 돌려 현관까지 같이 걸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율아. 엄마가 미안해.”
“아니에요. 절대 미안해하지 마세요. 제가 사랑하는 거 알죠?”
권율은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사람처럼 온몸이 강하게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억지로 미소를 지어내며 연희의 말간 눈동자를 내려다봤다.
어서 빨리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안전하게 내보내고 싶었으니까.
“율아. 아무리 화가 나도 할아버지께 예의는 지켜야 한다.”
그렇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연희는 마지막까지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철컥―.
문이 닫히자 권율은 마른세수를 하며 돌아섰다.
사납게 날뛰는 감정을 억누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김 여사님, 자리 좀 비켜주세요.”
권율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 김 여사가 슬그머니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평소처럼 석구의 오른쪽에 앉은 권율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서연의 존재를 밝힌 사람. 그리고 석구가 서연을 괴롭혔을 경우의 대처 방법. 딱 2가지였다.
“할아버지.”
석구의 날카로운 시선이 권율을 꿰뚫었지만, 그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서연 씨 얘기는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보라가 낮에 찾아왔었다.”
보라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어두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보라가 이제는 소름 끼쳤다.
도대체 싫다는 사람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결혼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보라의 오만한 행동에 신물이 났다.
권율이 생각에 빠진 사이, 석구는 일면식도 없는 서연을 향해 칼날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어마어마한 석구의 말을 들으며, 권율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책임.
서연은 석구에게 이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권율은 어떻게든 서연을 지켜내고 책임지고 싶었다. 그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당연한 의무였으니까.
“할아버지.”
“율아.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여자는 안 된다. 7살이나 많은 여자랑 뭘 하겠니.”
권율은 절대 불가를 외치는 석구를 차분하게 쳐다봤다.
“저, 서연 씨한테 책임질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꼭 책임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