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이별 선물
(82/130)
82. 이별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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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이별 선물
2022.11.13.
수줍게 붉어진 보라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보라는 순식간에 얼어버린 사람처럼 입을 벌린 채 권율을 빤히 쳐다봤다.
“너한테 가슴 아픈 말을 해서 미안해. 하지만…….”
“무슨…… 말?”
앞머리를 매만지던 작은 손이 ‘툭’하고 무릎으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너희 부모님이 계신 자리에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니. 하지 마.”
권율은 개의치 않았다.
“너랑 나. 친한 친구 사이도 아니잖아. 그런데 결혼이라니.”
“하지 말라고. 네 이상한 말 따위는 한마디도 안 들을 거야.”
본론을 꺼내지 않았는데도, 보라는 권율의 다음 말을 황급히 제지했다.
“보라야.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그래도 듣기 싫다는 듯 보라는 잔뜩 웅크린 채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계속되자, 보라의 어머니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율아. 무슨 일 있니?”
“안 그래도 요즘 보라가 통 우울해 보이던데. 너희 둘, 혹시 싸웠어?”
보라의 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으려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더 늦기 전에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어, 어. 그래. 해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솔직해야 할까.
마음속에 담아둔 감정을 다 드러냈다가는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권율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질척거리는 보라에게 어떤 여지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여자 친구가 있습니다.”
“여자…… 친구?”
그들의 어색했던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네. 그리고 지금껏 보라를 이성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단호한 권율의 말이 이어지자 보라의 부모는 소파의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핏줄이 사납게 불거진 손등을 내려다보면서도 권율은 해야 할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보라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어릴 적부터 영혼이 빠져나간 눈으로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뭔가 화려한 껍데기에 갇힌 사람 같았다.
그래서일까. 권율은 보라가 아무리 이상하게 굴어도 마음이 아파서 그런 것이라고 넘어갔다.
하지만 서연에게 위협이 된다면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저희 할아버지와 양쪽 회장님들이 여러 차례 만났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권율을 제외한 어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분명 막았겠지만, 지금이라도 제 뜻을 밝히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끊임없이 선을 넘어오던 보라의 행동과 서연을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보라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결혼이라니요.”
“…….”
“거기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감정으로 결혼을 밀어붙인다는 건 있을 수도 없습니다.”
“권율. 너 그만 가!”
보라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권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온 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멈추고 싶어서입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차분하게 할 말을 쏟아내자, 보라의 부모는 결국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하. 넌 이미 여자 친구가 있고. 우리 보라는 여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거니?”
“네.”
간단하지만 가장 정확한 대답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네 시험 뒷바라지다, 뭐다, 얘기한 건…… 모두 보라의 착각이었다고?”
“전 보라에게 바라지도, 받은 것도 없습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보라가 건넨 작은 사탕 하나 손대지 않았으니까.
“보라야. 너, 지금 하…… 기가 막혀서. 정말.”
싸늘한 시선이 보라를 향해 쏟아지자, 그녀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니. 그건 내 마음이니까. 율이가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하지 않잖아.”
“넌 자존심도 없어?”
보라를 매섭게 다그치는 말이 이어졌다.
“네가 뭐가 모자라서 이런 대접을…… 하아. 막말로 돈이 없어, 집안이 딸려.”
“도대체 행동을 어떻게 하고 다녔기에 율이가 싫다는 거야!”
보라를 향한 싸늘한 눈빛과 험한 말이 계속되자, 권율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보라를 이성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보라가 형편없는 사람으로 전락하는 건 아니었다.
각자의 감정이 다른 것을 왜 존중하지 않는지, 권율은 그녀의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괜히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권율은 부모의 비수 같은 말에 눈물을 펑펑 쏟는 보라가 안타까웠다.
“저 때문에 보라를 혼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라의 지나친 짝사랑을 정리하러 온 자리는 어느새 그녀의 무능함을 추궁하는 자리로 변해 있었다.
“저는 제 여자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되는 것이 싫어서 찾아온 것뿐입니다.”
여자 친구라는 말에 눈물범벅인 보라의 눈동자가 순간 날카로워졌다.
“저희 할아버지께도 이런 제 뜻을 전달했고요.”
권율은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한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바로잡고 싶었다.
“저와 인연이 아니라도 보라는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친구입니다.”
그러니까 보라를 비난하지 말아 달라고 넌지시 말했다.
“할 말 다 했니?”
“네.”
“그래. 그럼 가봐.”
조금 전까지 훈훈했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고급스러운 거실은 냉기로 가득했다.
더는 영양가가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권율을 대하는 그들의 말투와 행동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권율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서 있는 보라를 쳐다봤다. 순간 주머니 속에 손수건을 떠올렸다. 이걸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울려놓고 손수건을 내미는 게 맞는 걸까?’
혹시라도 자신의 의미 없는 행동이 오히려 그녀에게 독이 될까 싶어 망설였다.
권율은 주머니 앞까지 갔던 손을 거두며 작게 중얼거렸다.
“보라야. 서로를 위해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
“네가 많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권율은 보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침부터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권율은 최대한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가 등을 돌리자마자 순간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권율이 잠시 제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하지만 더는 나설 수 없었다.
***
보라는 시큰거리는 눈동자로 제 방 천장을 바라봤다.
‘너란 인간은 자존심 따위는 없는 거야? 짝사랑? 허. 어디 가서 회사 이름 안 팔리게 행동 조심해!’
그녀의 부모는 냉소 어린 비난을 1시간 넘게 이어갔다.
상처 입은 보라의 마음은 전혀 보이지 않는지, 혹시 모를 소문과 부정적인 평판에 대한 리스크 관리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재벌도 아닌 권율한테까지 외면당하다니. 내 평생 이런 모멸감은 처음이야.’
하지만 보라는 자신을 향한 부모님의 비난보다 권율에게 더 섭섭했다.
제발 그만하자는 권율의 한 마디에 지금껏 함께했던 모든 추억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정말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냐는 말을 삼키다 화창한 여름 하늘 같은 한서연을 떠올렸다.
대체 그 여자가 얼마나 소중하기에 그 많은 시간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는지.
자신에게는 정말 손톱만큼의 감정도 없었는지 묻고 싶었다.
보라는 답답한 마음에 주먹을 말아쥐고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정리가 안 되는 감정이 한꺼번에 몰아닥치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사실 권율의 여자 친구가 하니블랙 대표 한서연이라는 걸 알자마자, 핸드폰부터 사뒀다.
하지만 풍요로운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서일까. 머릿속에 그려놓은 시나리오대로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분명 완벽한 계획과 누구보다 잘 해낼 능력이 있었는데도 실행으로 옮길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석구에게 한서연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었다.
7살이라는 나이 차를 이야기하는 순간, 예상했던 대로 석구는 세찬 분노를 쏟아냈다.
보라는 석구가 권율의 모든 것을 제 자리에 돌려놓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권율에 대한 작은 희망이라도 품어볼 수 있을 테니까.
“하아. 겨우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권율과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석구의 사무실을 찾아가고,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그를 힐끔거렸던 시간이 떠올렸다.
“……바보같이.”
진심을 철저하게 배신당한 사람처럼 규정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권율이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왔다면 완강했던 석구도 어쩔 수 없이 한서연을 받아들이겠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너도 가질 수 없어야지.”
그래야 공평하다는 말을 애써 삼키며 보라는 다음 할 일을 생각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친가와 외가 때문에 나서는 걸 주저했지만,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데 못할 것도 없었다.
보라는 이미 자포자기한 상황에서 그동안 꼼꼼하게 세워뒀던 계획을 상기했다.
서연과 민혁의 영상이 들어있는 핸드폰, 기자들의 이메일 리스트. 마지막으로 ‘지라시’를 만드는 광고회사 주소까지 챙겼다.
분명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잔뜩 긴장했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묘한 희열을 느꼈다.
그녀는 분장에 가깝게 옷을 갈아입으며 집과 학교, 누구도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적당한 장소를 떠올렸다.
유동 인구가 너무 많아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곳. 게다가 젊은 사람들 때문에 게임방이 많은 곳. 자신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그런 곳이 필요했다.
보라는 항상 대동하는 운전기사를 부르지 않고, 집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갔다.
평소라면 당연히 모범택시를 불렀겠지만, 20분 넘게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눈앞에서 막 도착한 택시를 잡아탔다.
“홍대역 9번 출구요.”
보라는 뒷자리에 앉자마자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핸드폰을 보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호기롭게 나선 것과는 달리 심장이 터져나갈 듯 두근거렸다.
처음 가는 장소가 주는 낯선 감정은 둘째치고, 과연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일이 잘못돼서 정체가 드러나면 어쩌나. 다양한 걱정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겁먹을 거 없어. 어쩌면 그 여자가 나한테 고마워할지도 몰라. 내가 DN그룹 가족이 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주는 거잖아.’
보라는 자꾸만 번져가는 불안함을 달래려 서연을 위하는 척 자기합리화를 계속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지하철 입구가 보였다.
“저기, 신호등 앞에서 세워주세요.”
보라는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도록 지갑에서 현금을 꺼냈다. 특별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평소라면 절대 받지 않을 동전까지 빠짐없이 챙겼다.
‘익명 게시판에 목격담, 그다음은 이메일. 마지막으로는 퀵서비스.’
보라는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제일 커다란 PC방을 눈으로 확인하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율아. 이게 내 이별 선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