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대게 좋아하실까요?
(83/130)
83. 대게 좋아하실까요?
(83/130)
83. 대게 좋아하실까요?
2022.11.17.
어두운 실내에 푸른빛이 감도는 네온사인.
어깨를 잔뜩 움츠린 보라는 필사적으로 모니터를 가리며 눈동자와 손만 분주히 움직였다.
달칵달칵―.
요란한 마우스 클릭 소리는 게임에 심취한 사람들의 소음에 흔적도 없이 묻혔다.
보라는 마치 예행 연습이라도 한 사람처럼 착착 움직였다.
미리 만들어놓은 비밀계정으로 익명 게시판에 그럴싸한 사진과 실감 나는 목격담을 적었다.
물론 서연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녀의 홈쇼핑 방송분을 캡처해 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뚜렷한 근거도 없이 소문을 만들어내는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고, 다른 PC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나눠 보낸 후, 자극적인 제목을 붙여 여러 사이트에 순차적으로 올렸다.
나쁜 짓도 적응이 되는 건지, 아니면 금세 익숙해진 건지.
처음에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는데, 장소를 옮겨 다닐수록 긴장은커녕 점점 대범해졌다.
보라는 가슴을 졸였던 것에 비해 자신의 행동이 별문제가 될 것 같지 않자, 명예훼손과 관련한 판결까지 살피는 여유를 부렸다.
“별거 아니네.”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추며 미리 준비해 놓은 핸드폰을 쇼핑백에 넣었다. 그러고는 증권가 ‘지라시’를 제작 유포한다는 광고회사로 보냈다.
빠르게 사라지는 오토바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보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충분해.”
사실 보라가 원하는 것은 단순했다.
사람들의 눈을 교묘하게 속여 사실과 조작의 경계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그래야지만 정체가 들통나더라도 애매한 행동에 대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만약 이번 일로 권율과 한서연이 진짜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보라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즐겁다니. 뭔가 대단한 임무를 성공한 기분이라 한껏 흥분됐다.
하지만 보라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보라는 익명 게시판에 올린 글이 혹시 삭제된 게 아닐까 조회 수를 여러 번 확인했다.
나름대로 조회 수도 상위권에, 댓글도 심심치 않게 달렸는데도 답답한 평화가 계속됐다.
“뭐야. 왜 이렇게 존재감이 없어. 이미 빵빵 터졌어야 하는데.”
재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DN 그룹의 유일한 미혼남. 생각보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최민혁 대표의 영향력이 이렇게 하찮다니.
거기다 반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한서연의 인지도라면 가십을 다루는 인터넷 신문에라도 걸릴 줄 알았다.
보라는 너무도 실망스러운 결과에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두 사람의 이름과 회사를 검색했다.
“아. 뭐가 이렇게 마음대로 안 되냐고!”
그러다 문득 서연의 SNS 속 화려한 인맥이 스치듯 떠올랐다.
어딘가 모르게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던 사람들을 따로 저장해놨었는데. 혹시 그 사람들을 통한다면 뭔가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안 되겠어. 그 사람들한테 DM이라도 보내보자.’
보라는 어떻게든 이 조용한 평화를 깨트리고 싶었다.
***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DN 홈쇼핑 대표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민혁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대표님. 지시하신 대로 기사는 모두 막았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민혁의 한쪽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누가 이런 깜찍한 짓을 했는지 알아냈습니까?”
“20대 초반의 여성 두 명이 대표님 뒤를 따라가며 촬영하는 CCTV 영상을 확보했습니다.”
“신원은요?”
민혁의 개인 일을 담당하는 비서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동선 파악해서 가져오고. 사진은 놓고 나가세요.”
민혁이 몸을 돌려 서늘한 눈을 마주하자, 비서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 일이 기사화되면 바로 법적 조치 들어갈 수 있도록 법무팀에 공유하시고요.”
“네. 대표님.”
“나가 보세요.”
민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비서는 문 닫는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조심히 움직였다. 비서가 나가고도 민혁은 한동안 제 자리에 못 박히듯 시선을 고정했다.
“결혼 임박?”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듯 민혁은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기사 제목을 떠올렸다.
지금 어떤 누구보다 서연과의 결혼을 바라는 사람은 민혁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대중의 가십거리로 전락하는 건 원치 않았다.
민혁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서연이 스스로 권율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뭘 얻고 싶어서 이런 짓을 했을까.”
비교적 선명하게 찍힌 사진을 내려다보며 민혁이 중얼거렸다.
20대 초반의 여성, 평일 백화점 명품관에서 여유롭게 쇼핑을 할 수 있는 사람.
홈쇼핑 방송 때문에 서연을 알아볼 수 있다지만, 민혁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가 대표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미국 생활이 길어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알아보는 사람이 적었다.
그런데도 회사 이름과 정확한 직함을 박아 사진과 동영상을 첨부했다?
“재밌네.”
사실 이 사실을 보고 받았을 때부터 민혁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권율과 혼담이 오고 간다는 JS와 대성건설의 손녀. 만약 그녀가 이 일을 벌였다면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재벌의 비리나 비자금 같은 민감한 특종이 아닌 이상 기자들이 사실관계를 이중, 삼중으로 확인한다는 걸 말이다.
괜히 잘못된 정보를 실어 재벌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자칫 광고가 끊어질 수도 있었다.
거기다 대기업의 홍보실은 잘나가는 연예기획사처럼 사건, 사고에 빠르게 대처한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온실 속 화초가 뭘 알겠는가.
그러다 문득 권율의 말이 떠올랐다.
‘재벌들처럼 혼전 계약서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제 선에서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만약 권율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짝사랑 중인 여자가 화가 나서 벌인 일이라면, 모든 그림이 명확하게 그려졌다.
“하아…….”
조카 친구들이랑 치정으로 얽히다니.
민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게다가 기사를 단단히 틀어막았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서연과 권율은 달콤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겠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기사가 쏟아지거나 말거나 그냥 놔둘 걸 싶었다.
솔직히 기사가 나온다고 해서 민혁이 손해 볼 건 없었으니까.
“그놈의 페어플레이는…….”
권율이 주문처럼 걸어놓은 약속 아닌 약속과 지금까지 견고하게 쌓아놓은 자존심이 이번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우습지도 않은 상황에 깊숙이 얽혀든 걸 깨닫자, 민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어지러운 상념을 쫓아내듯 책상을 툭툭 두드리고 있는데, 가지런히 놓인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네. 어머님.”
발신자는 서연의 어머니인 경숙이었다.
[일하느라 바쁜 사람한테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어머님.”
[우리 최 대표님. 혹시…… 대게 좋아하실까요?]
“대게요?”
[우리 친정 오빠가, 그러니까 서연이 외삼촌이 철마다 해산물을 보내주거든요. 싱싱할 때 나눠 먹으면 어떨까 하고요.]
안 그래도 경숙과의 식사 약속이 잡히지 않아 답답했었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저야 초대해주시면 영광입니다.”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하는지. 그럼 내가 우리 집 주소를 문자로 보내줄 테니까, 퇴근하고 와요.]
민혁은 넉살 좋게 경숙이 좋아할 만한 안부를 먼저 물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유쾌했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경숙은 민혁에게 너무도 살가웠다.
[우리 서연이가 ‘대게 귀신’이라 부르면 열 일 제쳐두고 올 거예요. 이따가 최 대표님한테 잠깐 툴툴거려도 너그럽게 이해 좀 해줘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경숙은 서연이 괜히 민망해서 그런 거라며 여러 번 양해를 구했다.
“서연 씨는 툴툴거리는 모습도 귀엽습니다.”
[아휴. 다정하기도 하지. 여자는 뭐니 뭐니 해도 이렇게 사랑 많은 남자랑 결혼해야 하는데.]
경숙이 은근하게 서연의 결혼을 흘리자 민혁도 이를 놓치지 않았다.
“어머님이 지금처럼 도와주시면 제가 더 분발하겠습니다.”
두 사람 다 똑같은 목표를 가져서일까. 대게로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서연과의 결혼으로 마무리됐다.
[집으로 초대했다고 부담 갖지 말고. ‘내 집이다’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와요.]
“네. 어머님. 언제든 초대만 해주십시오.”
필요한 용건과 인사말이 끝났는데 다정한 대화가 끝날 줄 몰랐다.
조금 전까지 심란했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민혁은 다정한 장모님과 역할극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따 만나요. 우리 최 대표님.]
민혁은 곧 찾아뵙겠다는 말을 세 번쯤 하고 나서야 통화를 마무리했다.
“앞으로 5시간…….”
불안함이 기대감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민혁은 오늘 내로 처리해야 일에 속도를 내면서도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름만 번지르르한 쇼핑 콘텐츠 구상 회의에서도, 허접한 내용을 보고하는 임원들을 가차 없이 지적하면서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래도 근엄한 가면으로 고쳐 써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조용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기분 좋게 일에 몰두한 사이, 어느새 경숙과의 약속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죠”
시간을 확인한 민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마음이 다급한지. 재빨리 자리를 정리하며 그대로 로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뒤따라오는 비서를 향해 물었다.
“선물은요?”
“이미 차에 실어놨습니다.”
“중요한 자리니까 급한 일 아니면 전화 연결하지 마세요.”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 민혁이 말했다.
서연과 그녀의 본가에서 집밥을 먹는다니. 민혁은 그녀의 진짜 가족이라도 된 것 같은 묘한 착각이 들었다.
“늦지 않게 부탁합니다.”
“네. 대표님.”
민혁은 고급 세단의 뒷자리에 앉아 내비게이션을 빤히 쳐다봤다.
목적지까지 30분.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지나면 서연을 만난다는 생각에 누군가 손끝을 간지럽히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더 동그래지면 무슨 말로 더 놀라게 해줄까.
좋아하는 여자 친구에게 유치한 장난을 걸고 싶은 아이처럼 민혁은 서연의 다양한 표정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대표님. 1분 안에 도착합니다.”
운전기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혁의 세단 옆으로 검은색 슈퍼카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자 민혁의 시선이 잘 빠진 검은색 자동차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여기서 내리죠.”
검은 세단이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멈춰 서자 민혁이 가볍게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서연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서연 씨.”
나직한 민혁의 목소리에 대문 앞에 서 있던 서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최 대표님이…… 여긴 왜.”
“왜긴요. 대게 먹으러 왔죠. 공식적으로 초대 받았습니다.”
씽긋 웃은 민혁이 서연의 앞을 지나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뭐해요. 안 들어오고.”
“네, 네?”
“같이 들어가죠. 사이좋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