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폭죽이 터지듯 팡팡
(84/130)
84. 폭죽이 터지듯 팡팡
(84/130)
84. 폭죽이 터지듯 팡팡
2022.11.20.
서연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치 제 집인 양 당당하게 들어가는 민혁을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본가 주소를 아는 건 둘째치고, 대게가 왔다는 건 어떻게 알고 왔는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서연은 대문 앞에 적힌 파란색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최 대표님.”
“네. 서연 씨.”
“아니. 저번부터 왜 자꾸 이름을 부르세요. 부담스럽게.”
“여기가 회사도 아니고, 일 때문에 만난 것도 아닌데. 굳이 대표라고 부를 이유가 있나요?”
억울하면 직함을 빼고 이름을 부르라는 민혁의 뻔뻔함에 하마터면 ‘야!’라고 소리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여기 우리 부모님 집이에요.”
“내가 모르고 왔을까 봐요?”
저 당당한 태도를 보아 분명 경숙이 민혁을 부른 게 틀림없었다.
“지금 저 열받으라고 일부러 이러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아까는 어머님 초대에 거절할 수 없었고, 지금은 문 앞에서 서연 씨를 우연히 만난 것뿐입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맞는 말만 지껄이는 민혁에게 괜히 신경질이 났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그의 표정이 부담스러워 서연은 이대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발길을 돌린다 한들 민혁은 눈도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사실 서연이 오늘 부모님 집을 방문한 건 대게 때문이 아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권율의 이야기를 슬쩍 흘리고 싶은 이유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라니.
“안 들어갑니까?”
“진짜 들어가겠다고요? 우리 집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서연 씨 부모님 댁이죠. 그럼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처음 방문하는데 늦을 수는 없어서요.”
민혁은 서연이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피식거리며 앞장섰다.
“저기. 최 대표님.”
“…….”
“아니. 최민혁 씨! 거긴 우리 부모님 집이라고요. 내 말 안 들려요? 으윽. 얄미워. 정말.”
서연은 저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내뱉고는 험한 말을 쏟아지기 일보 직전인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다.
그러자 민혁이 슬쩍 뒤를 돌아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 어? 기분 나빠서 집에 가려고?’
정색한 것이 제대로 먹혀들었나 싶어 서연이 대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조심히 가세…….”
“그거 저 주시고, 이만 퇴근하셔도 됩니다.”
민혁은 단정하게 서 있던 기사의 손에 들린 선물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손수 대문을 닫아 잠그고 다시 서연을 지나쳐 걸었다.
“홈쇼핑 대표만 아니면…… 아, 진짜!”
서연은 말릴 틈 없이 새어 나오는 험한 말을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민혁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뻔뻔하고도 당당하게 현관문을 열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어머님. 최민혁 왔습니다.”
“누구보고 자꾸 어머님이래요.”
“내가 아줌마라고 불러야 서연 씨 마음이 좋습니까?”
“아니, 오늘 뭐 잘못 먹었어요? 왜 이렇게 말끝마다 사람을…….”
열받게 하느냐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서연은 빈주먹만 꽉 말아쥐었다.
“어머! 두 사람 어떻게 같이 들어와?”
꽃무늬 앞치마 차림의 경숙이 반가운 얼굴로 아는 척하자 서연은 신경질을 쏟아냈다.
“엄마!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여기 최 대표님이 왜 오셨냐고.”
서연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성질을 부리자, 경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민혁을 쳐다봤다.
“어서 와요. 아휴. 가볍게 오라니까 뭘 이렇게 이것저것 들고 와요.”
“어머님이 S 호텔 천지연을 좋아하신다고 하셔서요. 조리장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좋은 부위로 준비했습니다.”
“어머. 자상하기도 하지. 쓱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던질 걸 다 기억하고. 서연아. 너 좋아하는 갈비래.”
갈비를 못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저번부터 조리장에게 특별히 부탁했다는 민혁의 말이 거슬렸다.
“하아. 엄마! 이건 정말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손님 앞에 세워두고 문전박대하면 못 써.”
경숙은 서연에게 한껏 눈치를 주고는 민혁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아들을 만난 듯 민혁만 챙기는 경숙의 태도에 서연은 기가 막혔다.
‘안 되겠어. 아빠한테 엄마 좀 말리라고 얘기해야지.’
서연은 일부러 민혁과 경숙을 지나쳐 태석을 빠르게 찾았다.
“아빠! 엄마가 최 대표님을 집으로…….”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서연은 제 눈을 의심했다.
회사를 퇴직한 이후로 항상 편한 옷만 입는 태석이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처럼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다.
“어. 우리 공주 왔어?”
“아빠. 옷이 왜 그래.”
“왜. 이상해? 넥타이 다른 걸로 맬까?”
“아니, 대게 먹을 건데. 정장을 왜 입었냐고.”
태석은 대답 대신 민혁을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번에야 경황이 없어서 복장이 그랬지만, 오늘은 귀한 손님을 초대했는데 제대로 예의를 갖춰야지.”
누가 보면 결혼할 남자를 소개해주는 자리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
“진즉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늦었지만 좋은 시간 가져 봐요.”
“엄마! 아빠! 이분은 같이 일하시는 분이지. 내 남자 친구가 아니라고.”
서연의 외침에도 민혁은 경숙과 태석에게 붙잡혀 이미 커다란 식탁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단란한 가족처럼 앉아 안부를 주고받으며 어느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리 공주, 뭐 하고 서 있어. 어서 와서 앉아.”
“쟤는 왜 괜히 성질을 부려. 사람이 나이를 한 살 더 먹을수록 유해져야지. 다 결혼을 안 해서 그래.”
경숙이 진단하는 원인과 결과가 모두 결혼으로 이어지자 서연의 잇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엄마가 게살 발라줄 테니까. 자자, 요대로 들고 먹어. 우리 최 대표님도 많이 들어요.”
경숙은 최 서방이라는 호칭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마치 사위를 대하듯 민혁의 밥이며 접시에 자꾸만 반찬을 올려줬다.
그럴 때마다 민혁은 어찌나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지.
서연은 행복한 가족의 식사 자리에 혼자서만 괴로웠다.
“아버님께서 작고하신 건 뉴스를 통해 봤는데. 어머님께서는 건강이 좀 괜찮으신가요?”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아버님.”
민혁은 태석의 잔에 고급 양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 대표님한테.”
“회사에서나 대표지. 그냥 민혁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아버님.”
“큽!”
민혁이라니.
도대체 저 남자의 뻔뻔함은 어디까지인지, 서연은 하도 기가 막히다 못해 목이 꽉 조여와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서연아.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우리 서연이가 갑각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옛날에…….”
“엄마! 이상한 말 꺼내지도 마.”
서연은 어떤 흑역사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재빨리 경숙의 말을 막아서며 민혁을 쏘아봤다.
“최 대표님도 빨리 먹고 가세요.”
“싫습니다.”
“아니. 허! 진짜 왜들 이래요.”
서연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결혼을 향한 경숙의 강력한 추진력과 태석의 조용한 지지, 거기다 민혁의 적극적인 행동이 자칫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건 진짜 아니야. 율이 씨가 알면 얼마나 속상하겠어. 차라리 지금 밝혀 버릴까?’
그러면 민혁도 더는 무리수를 두지 않을 테고, 권율을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초대해 부모님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서연은 권율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숟가락을 조심히 내려놨다.
“엄마, 아빠. 저기 내가…… 그 있잖아.”
그 순간 서연과 민혁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어? 최 비서가 이 시간에 웬일이지?”
발신자를 확인한 민혁도 경숙과 태석에게 양해를 구했다.
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연은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최 비서님. 무슨 일 있으세요?”
[대표님. 긴급사항이라 연락드렸습니다.]
“긴급이요? 공장에 무슨 일 생겼어요?”
심상치 않은 단어에 서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공장은 아니고 대표님 관련 사생활 기사가 떴습니다. 지금 톡으로 기사 링크 보냈습니다.]
사생활 기사라니. 연예인도 아닌 자신이 긴급으로 연락 올 일이 뭔가 싶었다.
“어. 일단 확인해보고 다시 연락할게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연이 전화를 끊자, 이번에는 경숙과 태석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두 사람이 전화를 받는 사이, 서연은 무슨 일인가 싶어 최 비서가 보내준 링크를 눌렀다.
“이게…… 다 뭐야.”
-단독) DN 홈쇼핑 최민혁 대표와 하니블랙 한서연 대표의 핑크빛 열애.
대문짝만한 헤드라인에 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다 밑에 달린 소제목들은 더 가관이었다.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한서연 대표! 최민혁 대표의 든든한 외조를 받아 새로운 브랜드 출시 예정!
새로운 브랜드는 아직 논의 단계고,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하는 민혁 때문에 보고서를 다시 써야 하는 마당에 든든한 외조?
-최측근의 제보에 따르면 올해 안에 좋은 소식이 임박했다는 소문 잇따라.
서연의 눈동자가 불에 댄 듯 뜨겁게 타올랐다.
“아니.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순간 기사를 내리던 손가락이 우뚝 멈춰 섰다.
열애 기사만 나왔다면 추측성 기사라고 치부하려고 했다. 그런데 보란 듯이 민혁과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기사 중간에 떡 하니 박혀 있었다.
그것도 최근에 있었던 행사장 사진이 아닌 백화점 사진이었다.
황당한 상황에 서연은 고개를 돌려 민혁을 쳐다봤다. 등지고 서 있는 민혁의 목소리가 평소와 너무도 달라, 그가 벌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 언니가 알려줬으니까 들었지. 나도 정확한 건 몰라. 재벌 사위? 아이고. 무슨…….”
경숙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입꼬리를 활짝 올리며 웃었다.
“아. 형님. 혜빈이 결혼 날짜랑은 당연히 겹치지 않아야죠. 만약에 구체적으로 정해지면 제일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태석은 서연의 결혼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거기다 서연의 핸드폰은 중대 재해가 벌어진 것처럼 DM과 친구들의 톡, 전화로 난리였다.
서연은 요란하게 울려대는 전화기를 진동으로 바꾸고 식탁 위에 던지듯 올려놨다.
그러자 통화를 마친 민혁이 다가와 앉았다.
“서연 씨.”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열애라니요. 아니 결혼은 또 뭐고.”
“일단 우리 회사에서 기사를 내릴 겁니다.”
기사를 내린다고 해결될 일인가?
“만약 기자가 사실 확인을 해오면 말을 맞춰야 할 것 같은데.”
“아니. 말을 맞춘다고요?”
어느새 통화를 마친 경숙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민혁에게 되물었다.
“서연 씨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서요. 어머님.”
민혁은 생각보다 담담한 태도였다.
“서연아.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는 태석이 물었다.
“당연히 사실무근이라고 해야지. 무슨 열애고 결혼 임박이야. 말도 안 돼.”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이미 두 사람이 다정하게 찍힌 사진도 공개된 마당에.”
“그건 내가 최 대표님 셔츠에 립스틱을 묻히는 바람에 옷 사러 간 거고.”
서연은 민혁을 쳐다보며 어서 말을 보태라고 눈짓했다.
“네. 서연 씨 말이 맞습니다.”
“그래. 그럼. 그건 그렇다고 쳐. 근데 이번 일을 계기로 진지하게 만나보는 건 어때?”
이왕 이렇게 된 거 본격적으로 연애하라는 경숙의 말에 서연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엄마. 나 남자친구 있어.”
“네가 무슨…… 남자 친구가 어디 있다고 그래.”
경숙이 민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 누군데? 뭐 하는 사람이냐고.”
“…….”
“서연아. 설마 연예인은 아니지?”
태석이 당황한 얼굴로 다그쳤다.
“아니야.”
“그럼, 왜 말을 못 해.”
서연은 눈을 내리깔며 입만 벙긋거렸다.
“응? 뭐야.”
“……대, 대학생.”
“어머! 얘가 미쳤나 봐!”
경숙이 서연의 등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