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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모든 것이 엉망진창 (85/130)


85. 모든 것이 엉망진창
2022.11.24.



 


“어머님!”

“경숙아!”

정작 등을 맞은 건 서연인데, 두 남자가 경기를 일으키듯 동시에 소리쳤다.


‘손맛이 예전만 못한데. 이번 기회에 보약이라도 지어드릴까?’

서연은 아프기는커녕 갱년기를 어설프게 보낸 경숙의 건강이 더 걱정스러웠다.

권율의 정체가 들통난 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경숙의 기력을 걱정하고 있다니. 서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었다.


“서연 아빠. 얘 진짜 미쳤나 봐. 너, 지금 웃음이 나와?”

“난 엄마를 진짜 사랑하는 거 같아.”

뜬금없는 소리에 경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번 기회에 아빠랑 건강검진도 받고 보약도 먹자. 예전에 비하면 하나도 안 아파.”

“그래? 어디 눈물이 쏙 빠지게 해줘? 그러면 정신 좀 차릴래?”

경숙의 말에 깜짝 놀란 민혁이 서연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어머님! 말로 하십시오.”

“그래. 경숙아. 최 대표님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야.”

두 남자가 적극적으로 말리자 경숙은 격한 감정을 토해냈다.


“아니 사귈 사람이 없어서 대학생을 만나. 내년이면 서른이야. 서른!”

“나도 내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어. 일이 그렇게 된 걸 어떡해.”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겠지만, 권율이 나이를 숨기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미 선입견이 생긴 마당에 권율에게 더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기는 건 막아야 했다.


“혹시 의대생이야?”

만약 재수나 삼수를 해서 의대에 들어갔다면 나이가 엇비슷할 것 같아 경숙이 물었다.


“아니…… 경영.”

기어들어 가는 서연의 대답에 경숙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하나도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군대는 다녀왔고…….”

“그럼 졸업반이야?”

서연이 입술만 달싹거리자 경숙은 의자를 바짝 끌어다 앉았다.


“졸업반은 아니고. 스…… 스물.”

“뭐! 스물?”

“아, 아니! 스물둘.”

예상치 못한 나이에 경숙의 눈에서 분노의 빛이 번쩍였다.


“교수를 만나도 시원찮을 판에, 무슨 스물두 살 대학생을 만나. 얘가 정신이 있어, 없어.”

순간 화를 참지 못한 경숙이 서연의 등을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경숙아. 너무 감정적으로 그러지 말고.”

“한서연! 너 빨리 정리한다고 말해.”

“아니 말로 해, 말로. 서연이 말을 일단 들어보고.”

태석이 경숙을 막아서는 사이, 서연의 몸이 뽑기 기계 속 인형처럼 붕 떠올랐다.


“흡!”

민혁은 서연을 번쩍 들어서는 안전한 제 옆으로 옮겨놓고 순식간에 간격을 벌렸다. 어찌나 철통 수비를 하는지 서연은 경숙의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머님. 서연 씨 대신 차라리 절 때리십시오.”

대체 이 남자의 오지랖은 어디까지인지. 서연은 대신 맞겠다는 민혁의 말이 고맙기는커녕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그는 아까부터 사위 코스프레로 사람을 기함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반대하는 결혼을 앞둔 남자 친구처럼 굴었다.


“아니, 최 대표님이 왜 저 대신 맞는다고 그러세요?”

“서연 씨가 맞는 건 도저히 못 보겠습니다.”

“이건 제 일이니까. 맞아도 제가 맞고, 욕을 들어도 제가 들을게요.”

어차피 권율의 나이가 공개된 마당에 부모님과의 갈등은 꼭 거쳐야 하는 순서였다.

등 좀 몇 대 맞는다고 아프지도, 부모님이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예전에도 멀쩡하게 다니던 좋은 대학을 그만두고, 유학을 선택했을 때 호되게 겪었던 일이었다.

그 당시에도 경숙은 서연을 투명 인간 취급하며 눈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결국 서연의 뜻을 가장 많이 지지해줬었다.

서연은 경숙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기에 시간을 두고 살살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민혁이 뭐라고 가족 일에 나서는지, 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최 대표님 앞에서 창피하긴 하지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가보라고 얘기하려는데 민혁이 경숙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어머님. 저를 믿고 조금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경숙은 민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태석을 쳐다보며 눈만 껌뻑였다.


“서연 씨가 스스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올바른 선택이라니. 권율은 틀리고, 최민혁은 맞는다는 건가?

서연은 민혁이 제멋대로 구는 것보다 은근히 권율을 무시하며 기적의 논리를 펼치는 것이 더 불쾌했다.


“그러니까 서연 씨를 너무 다그치지도, 혼내지도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자꾸만 선을 넘는 민혁에게 쓴소리를 날려주려는데, 경숙이 민혁의 손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했다.


“내가 참…… 우리 최 대표님 볼 낯이 없어요. 서연이가 철없이 굴어도 이렇게 진심으로 생각해주시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 것처럼 경숙은 눈물을 글썽이며 민혁을 쳐다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태석이 서연에게 다정한 잔소리를 시작했다.


“서연아. 최 대표님처럼 이해심 넓은 남자랑 살면 마음고생은 안 한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아니,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놔두고. 어떻게 대학생을 만나.”

서연의 부모는 권율의 이름이나 됨됨이, 앞으로의 미래, 서로가 얼마나 진지한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권율이 대학생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림없다는 반응이었다.


“하아…… 정말.”

갑작스러운 민혁과의 열애설, 의도치 않게 불거진 권율의 정체. 거기에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가 더해지자, 서연은 미지의 상대에게 목덜미를 잡힌 기분이었다.

괜히 답답한 마음에 뒷덜미를 쓸어내리다 더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늘은 일단 후퇴하자.’

서연은 집으로 돌아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감정을 추스르고,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살피고 싶었다.


“엄마, 아빠.”

세 사람의 시선이 서연의 입으로 향했다.


“하…… 그만 갈게요. 최 대표님은 밖에서 얘기 좀 해요.”

서연이 밖을 가리키자 민혁이 순순히 일어났다.


“서연아. 뭐든지 순리대로 해. 7살 차이가 말이 되냐고.”

서연은 어떤 말도 보태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 달라질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갈게요.”

어깨가 축 처진 서연이 일어서자, 보다 못한 태석이 현관까지 따라나섰다.


“서연아. 엄마가 속상해서 그런 것 알지? 혹시 등 아프면 늦게라도 아빠한테 전화하고.”

서연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이는 사이, 경숙은 민혁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내가 어떻게든 설득할 테니까, 최 대표님은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

“후식도 못 먹고 가서 어떡해요. 아무쪼록 우리 서연이 좀 잘 부탁할게요.”

무슨 대단한 은혜를 입은 사람처럼 경숙은 민혁에게 자꾸만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서연은 대문까지 나온 부모님을 향해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하고는 민혁을 빤히 쳐다봤다.

그가 운전기사를 돌려보내는 자리에 함께 있었고, 태석과 가볍게 술잔을 기울인데다, 어찌 됐건 그를 초대한 건 경숙이었다.

게다가 열애설에 대응하려면 좋든 싫든 그와 말을 맞춰야 했다.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나느니, 차라리 그를 데려다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이유가 그렇다 하더라도 권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연은 어두워진 하늘을 괜히 한번 올려다보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타세요. 모셔다드릴게요.”

“어딜요?”

“최 대표님 댁으로요. 가면서 얘기해요.”

가면서 얘기하자는 서연의 말에 슬쩍 입꼬리를 올린 민혁이 조수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는 민혁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 미치겠네.”

 

***

사락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로 가득한 도서관 열람실. 권율은 정지된 화면처럼 공부에 빠져 있었다.

2차 시험 결과 발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그는 다시 진지한 고시생 모드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공부가 지겹거나 힘든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서연과의 미래를 함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공부가 고맙기까지 했다.

정신없이 책에 파묻혀 있던 권율의 시선 끝에 익숙한 실루엣이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자 원준이 권율의 가방을 꺼내 다짜고짜 책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나가자.”

“지금?”

아직 봐야 할 것이 남았다고 말하려는데 원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열람실에서 떠들 수 없어 말없이 짐을 챙겼다.


‘집에 갔다 왔나?’

분명 낮에 입고 있던 옷이 아닌데다 얼굴이 막 씻고 나온 사람처럼 촉촉해 보였다.

권율은 자신의 커다란 가방을 아기처럼 안고 가는 원준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준아. 무슨 일 있어?”

열람실을 빠져나오자 궁금함을 참지 못한 권율이 물었다.


“일단 따라와.”

‘또 차였나?’

왠지 더 작아 보이는 원준의 어깨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적한 벤치까지 말없이 걸었다.


“율아.”

“응. 말해.”

“지금 내가 뭘 좀 보여줄 거거든.”

“뭔데 그래. 음대 친구가 톡 보냈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연신 한숨을 쏟아내는 원준을 보며 권율은 속으로 위로의 말을 준비했다.


“이거 보고 충격받지 마.”

원준은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은 채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권율은 원준의 소개팅녀가 뭐라고 거절했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그의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순간 권율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게…… 뭐야?”

“그러니까. 이게 다 뭐냐고. 누나랑 우리 삼촌이랑 웬 열애설?”

내용을 곱씹듯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는데 너무도 익숙한 사진이 기사 중간에 액자처럼 걸려 있었다.

보라가 보낸 서연의 사진과 동영상은 그날 지웠었는데. 이게 왜 여기 박혀 있는 건지.

문제의 사진은 서연과 민혁의 결혼을 뒷받침해주는 확실한 증거 같아 보였다.

게다가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축하 댓글이 눈에 들어오자 권율은 세상에서 제일 험한 말을 쏟아내고 싶은 걸 꾹 참아야 했다.

도저히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권율은 진보라를 추궁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을 서연에게 전화를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원준이 옆에서 이런저런 추측을 쏟아내거나 말거나, 서연의 목소리를 지금 당장 듣고 싶었다.

당황한 서연이 어디서 울고 있는 건 아닌지, 혹시 기자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권율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서연의 이름을 되뇌었다.

심장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의 숨소리는커녕 긴 신호음만이 들려왔다.

몇 통의 전화를 걸었는지 셀 수조차 없는 사이.


[여보세요.]

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안도를 할 수 있었다.


“서연 씨. 괜찮아요?”

[율이 씨, 미안해요. 5분만 기다려줄래요? 내가 다시 전화할게요.]

조용한 서연의 목소리 끝에 달칵달칵 방향 지시등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죠?”

[자세한 건, 좀 있다가 얘기할게요.]

머뭇거리는 서연을 보며 심각한 일이 생긴 걸 직감했다.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어디예요? 내가 지금 갈게요.”

[지금 우리 집 근처인데. 오려고?]

민혁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권율의 눈에서 커다란 불꽃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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