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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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2022.11.27.
“대표님이 왜 서연 씨랑 같이 있어요?”
[만날 만하니까 만난 거고. 내가 너한테 보고할 이유는 없을 텐데.]
사귀는 사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오늘은 열애설을 핑계로 불러냈을까?
무슨 말로 서연을 당황하게 만들고, 어떤 이유로 그녀의 차에 타고 있는 건지. 지나치게 당당한 그의 모습에 권율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최 대표님. 아니, 왜 남의 통화에 끼어들고 이러세요. 율이 씨. 미안해요. 내가 나중에 다 설명할게요.]
자동차에 연결된 블루투스는 두 사람의 실랑이를 고스란히 들려줬다.
권율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민혁의 집에서 서연의 집까지의 거리를 빠르게 계산했다. 지금 학교에서 출발하면 서연의 집까지 엇비슷하게 도착할 것 같았다.
“서연 씨. 지금 학교에서 출발할게요.”
[어어. 알았어요. 바로 전화할게요.]
너무도 미안해하는 서연의 목소리에 권율은 이 말을 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능숙하게 남의 감정을 조종하는 민혁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집에서 만나요. 서연 씨.”
[권율! 이 시간에 서연 씨 집에 가겠다고?]
“네. 대표님은 갈 수 없는 서연 씨 집으로 가려고요.”
[너! 왜 집으로 가. 밖에서 만나. 밖에서]
민혁이 또 끼어들자 참다못한 서연이 버럭 화를 내며 곧바로 전화가 끊어졌다.
“하…….”
마음 같아서는 미친놈처럼 펄쩍펄쩍 뛰고 싶었지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친구 앞에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원준을 불편하게 만들고, 험한 감정을 쏟아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도 빠르게 번지는 가슴 속 불길이 꺼지질 않았다.
권율은 어두운 하늘을 향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욱신거리는 눈꺼풀 위에 손을 얹었다.
“왜 그래. 우리 삼촌이랑 누나…… 같이 있어?”
조심스러워하는 원준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어떤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들이마시다 흩어진 감정을 어렵게 추스르며 말했다.
“응. 기사 때문에 만났나 봐.”
“괜찮아?”
아니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권율은 일부러 시간을 확인했다.
“원준아. 나…….”
그만 가봐야겠다고 말하려는데, 원준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율아. 난 무조건 네 편이야.”
“…….”
“우리 삼촌이야 연애도 실컷 해봤지만, 넌 아니잖아. 난 네가 누나 만나고 처음으로 사람 같아 보여서…… 좋았어.”
첫사랑 결사대처럼 꼭 지켜주고 싶다는 원준의 말에 괜히 든든해졌다.
“내가 우리 집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가는지 빠짐없이 알려줄게.”
“괜찮아. 무리하지 마.”
“아니! 객관적으로 봐도 우리 삼촌, 절대 쉬운 상대 아니야.”
원준이 큰 도움이 안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응원해주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고마워, 원준아. 그래도…… 그러지 마. 괜히 삼촌한테 혼나지 말고.”
“됐어. 넌 나만 믿어.”
원준은 커다란 가방을 권율의 어깨에 걸어주며 자신만 믿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먼저 가볼게. 서연 씨가 걱정돼서 안 되겠어.”
“응. 빨리 가봐. 무슨 일 있으면 고민하지 말고, 나랑 상의해. 알았지?”
권율이 환하게 웃어 보이자 원준도 따라 웃었다.
그는 수호신이라도 되는 양 권율의 차가 출발할 때까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후우…….”
권율은 점점 작아지는 원준의 모습을 사이드미러로 힐끔거리다 끝내 한숨을 쏟아냈다.
앞으로 펼쳐질 잔인한 현실을 헤쳐 나갈 방법은 과연 있는 건지. 이제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뭐든지 꾸역꾸역 해 나가야만 했다.
‘일단 서희 형한테 법적으로 대응하는 방법부터 물어보자.’
권율은 서연의 집으로 향하면서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의 순서를 정했다.
만약 보라가 이 일에 깊숙이 관련됐다면 끝까지 죗값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번 일로 집안에서 더 반대한다면……. 권율은 순간 핸들을 꽉 쥐었다.
‘서연 씨 부모님께 가자. 먼저 허락을 받는 게 순서야.’
최종 합격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가는 서연의 집안에서 민혁을 사윗감으로 낙점할 것 같았다.
권율은 먼저 교제를 허락받고, 최종 합격이 되면 정식으로 결혼을 진행하는 것까지 생각했다.
빠르게 내달리는 차 안. 권율의 머릿속이 더 급박하게 돌아갔다.
“하아. 휘둘리지 말자. 그럼 진짜 지는 거야.”
지금 권율의 머릿속은 기사에 박힌 서연과 민혁의 사진으로 가득했지만, 입으로는 결심을 되짚었다.
***
모든 설명을 마친 서연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틀어 권율의 표정을 살폈다.
‘최 대표님이 정식으로 초대를 받았다고? 그것도 서연 씨 본가에서 저녁까지…….’
그녀의 부모님과 이미 두 번째 만남이라는 말에 권율은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연과 그녀의 부모님에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바짝 추격해오는 민혁의 행동에 심장이 덜컥거리다 못해 주르륵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어색한 기류가 흐르자 참다못한 서연이 입을 열었다.
“율이 씨. 자꾸 이런 상황이 생겨서 미안해요.”
“서연 씨 잘못이 아니니까, 미안해하지 말아요.”
그녀를 안심시킬 말을 하고 싶으면서도 괜찮다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권율은 자신의 부모님이 서연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처럼, 서연의 부모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입안이 씁쓸해졌다.
서연을 만나러 오는 동안 계획했던 일과 수많은 다짐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자, 순간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어설프게 대처했다가는 정말 서연과 헤어지게 되는 건 아닌지.
오늘 당장이라도 서연을 데리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유치한 생각마저 들었다.
“율이 씨. 최 대표님이랑은 정말 아무 사이 아니에요. 알죠?”
보라가 연관된 일이라면 결과적으로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일 텐데. 오히려 서연을 눈치 보게 만들다니.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나 믿어요?”
“세상 누구보다도, 율이 씨를 믿어요.”
빙그레 미소 짓는 서연의 모습이 한없이 예뻐 보여 권율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훔쳤다.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사르르 감겼다가 뚜렷하게 커진 서연의 눈동자가 말해보라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서연 씨 부모님, 뵙고 싶어요.”
“우리 부모님을요?”
“네. 서연 씨 없이. 나 혼자서요.”
“율이 씨…… 혼자서요?”
서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거 같아요. 최 대표님이 어머님과 연락을 주고받는 걸 알았을 때, 바로 찾아뵙고 허락을 받았어야 했어요.”
“부모님을 찾아뵙는 건 좋아요. 하지만 율이 씨 혼자 가는 건 싫어요.”
안 되는 이유를 쏟아내던 서연은 권율이 꿈쩍도 하지 않자 얼른 방법을 바꿨다.
“그럼, 같이 가요. 가서,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말하자고요.”
“날 믿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줬으면 좋겠어요.”
단호한 권율의 눈빛에 입만 벙긋거리던 서연의 입술이 스르륵 닫혔다.
말문이 막히는지,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으로 한번 거르는 것인지, 서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서연 씨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건 당연해요.”
지금은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민혁이 자신보다 더 좋은 조건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다 우리 부모님이…… 율이 씨 마음에 상처 주면요.”
“그건 이미 각오했던 일이에요.”
“난 싫어요. 우리 뭐든지 같이 해요. 이상한 소문을 퍼트린 사람을 잡는 것도, 부모님께 허락을 받는 것도요.”
어떤 어려움도 함께하자는 서연의 말이 좋아, 권율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눈만 깜빡여도, 아니 숨만 쉬어도 예쁜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권율은 서연의 이마를 제 심장에 붙이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쁜 사람을 고소하든. 최 대표님을 물리치든. 다른 건 모두 같이 해요. 하지만…….”
“…….”
“서연 씨 부모님 일은 전적으로 나한테 맡겨줘요. 그게 내가 떳떳해지는 길이에요.”
나이를 떠나 서연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이고 싶었다. 서연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이 따로 있었다.
“그래도요. 난 율이 씨가 마음 아픈 건 싫어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하. 우리 흔들리지 말아요.”
“흔들리긴요. 난 DN 그룹을 통째로 준다고 해도 율이 씨랑 안 바꿔요.”
하얗고 말랑한 서연의 뺨을 어루만지던 권율이 금세 진지해졌다. 그는 서연의 코끝을 스치다 고개를 돌려 읊조리듯 말했다.
“고마워. 서연아……. 사랑해.”
“으음. 나도.”
권율이 서연의 뺨에, 입술에, 턱 끝에 입을 맞추자 달콤한 복숭아 향기가 진하게 와 닿았다.
촉촉한 소리와 따듯한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히자 권율의 마음이 빠르게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최민혁이든, 진보라든 해볼 테면 해 봐. 내가 먼저 물러날 일은 없을 거니까.’
언제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인간 충전기 서연을 번쩍 끌어안고는 권율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으니까.
툭, 툭. 권율이 지나간 자리마다 두 사람의 옷차림이 점점 가벼워졌다.
사납게 핏줄이 돋아난 권율의 팔 근육이 서연을 고쳐 안으며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서연아.”
그의 뜨거운 시선이 서연을 내려다보며 통보하듯 허락을 구했다.
“오늘은 밤새 같이 있을 거야.”
“그래도 집에…….”
서연의 다음 말은 점점 농밀해지는 그의 움직임에 막혀버렸다. 이 순간만큼은 서연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침범하는 걸 허용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누군가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더라도, 권율은 서연의 모든 것이 자신의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바랐다.
그런 권율의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서연은 냉혹한 현실과 아늑한 꿈의 경계 어딘가에서 스르륵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단단하게 옭아맨 품 안에서 서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율이 씨…… 지금 몇 시예요?”
권율은 잠시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렸다.
“오전 6시요.”
“하아. 언제 잠든 지도 모르게 기절했어요.”
서연이 권율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피곤하면 더 자요. 30분 정도 시간 있어요.”
“그만 일어나야죠. 호진이랑 통화도 해야 하고. 변호사랑 상의해서 경찰에 신고도 하고. 백화점 CCTV도…….”
“CCTV는 확인할 것 없어요.”
“으응? 왜요…….”
서연의 숨결이 간지러운지 맞닿아 있던 권율의 가슴이 살짝 흔들렸다.
“그 사진, 누가 찍었는지 알아요.”
순간 서연의 뺨이 촉하고 떨어졌다.
“누가 그랬는데요?”
“저번에 학교에서 마주쳤던…… 진보라요.”
서연의 커다란 눈매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