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미지의 상대
(87/130)
87. 미지의 상대
(87/130)
87. 미지의 상대
2022.12.01.
달콤하게 몽롱하던 서연의 정신은 엉뚱한 이름을 듣는 순간 재빨리 현실로 돌아왔다.
그 앙칼지게 귀엽던 여자?
“진보라요?”
아무리 짝사랑하는 남자가 좋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엄청난 일을 벌였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학교에서 봤던 그 여자애가 그랬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서연은 아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사실은 얼마 전에 톡으로 그 사진과 동영상을 보냈었어요.”
“네? 무슨 사진과 동영상을요?”
“서연 씨랑 최 대표님이 백화점에서 다정하게 있는 사진이랑 동영상이요.”
권율을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내 서연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보라의 연락처를 스팸 처리하고 받은 사진도 모두 지워버렸다는 권율의 말에 서연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허! 기가 막혀서. 율이 씨가 하는 말, 알겠어요. 다 알겠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요.”
“뭔데요?”
“그 여자가 이 말도 안 되는 기사의 소스를 제공했다고 쳐요.”
서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소한 의문 하나를 털어놨다.
“그런데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최 대표님을 어떻게 알고 나랑 엮었냐고요?”
최민혁 대표는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쉽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정확한 건 알아봐야겠지만, 보라가 그 사진을 찍은 건 확실해요. 그리고…….”
“그리고, 뭐요?”
“보라네 친가가 JS 화재보험이고, 외가가 대성건설이에요. 그래서 최 대표님을 알아봤을 수도 있어요.”
내로라하는 재벌 집안의 귀한 아가씨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저질렀다니.
DN 그룹과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권율과 내가 사귀는 게 꼴 보기 싫어서?
차라리 재벌들 간의 이권 다툼의 희생양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허탈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도 단순하고도 유치한 이유에 거창한 대책을 세운 지난밤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괜히 나 때문에 서연 씨만 곤란해졌어요. 미안해요.”
“율이 씨 잘못이 아니에요. 하……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자가 그랬다는 게 안 믿겨요. 정말 확실해요?”
“기사에 그 사진이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너무도 확실한 증거가 실렸으니까요.”
확실한 증거라니. 서연은 또르르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더 따져봐야겠지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보라가 관련 있다고 생각해요.”
서연은 선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대수롭지 않은 상대에 싸울 의욕조차 나지 않았다.
“서연 씨. 오늘 서희 형 로펌에 찾아갈 거예요. 신경 쓰이지 않도록 내가 다 처리할게요.”
권율의 그 말에 서연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까만 눈동자가 흠칫 놀라며 눈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잠깐만요. 율이 씨. 나한테 5분만…… 줄래요?”
지금 머릿속을 떠다니는 복잡한 생각들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서연은 너무도 미안해하는 권율의 시선으로부터 잠시 도망치고 싶어 몸을 움직였다.
그의 가슴에 등을 가져다 붙이고 커다란 팔을 스카프처럼 끌어다 목에 둘렀다.
그의 숨결이 정수리에 와닿자 묵직하고 단단한 그의 팔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렀다.
‘진보라. 이 대책 없는 여자를 어떻게 혼내주지?’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랐을 테니 권율의 거절이 처음 겪는 시련이었겠지. 그녀가 낯선 감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었다면 이것저것 재고 따져서 행동할 것 같지 않았다.
‘결핍이라는 감정이 널 무모하게 만들었구나.’
어제까지만 해도 미지의 상대에게 가졌던 두려움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만큼 잃을 것도 많았다. 서연은 거창하게 경찰에 신고하거나 변호사를 부르지 않아도, 생각보다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뭔가 대단한 상대에게 당한 줄 알고 잔뜩 움츠러들었는데, 알고 보니 별 볼 일 없는 적수라니.
허무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서연 씨…… 괜찮아요?”
갑작스러운 서연의 돌발행동에 놀란 권율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요. 안 괜찮아요.”
그를 향해 몸을 돌린 서연이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율이 씨는 왜 이렇게 멋져서 이런 문제를 일으키냐고요.”
동그랗게 커진 권율의 눈동자를 비스듬하게 올려다보며 서연이 피식거렸다.
“율이 씨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는 내 부탁 좀 들어줘요.”
“뭔데요?”
“우리 부모님 일은 율이 씨한테 일임할 테니까. 진보라와 이번 열애설은 나한테 맡겨줘요.”
“아니에요. 그건 내가 할게요. 보라가 그랬다면 어차피 다 나 때문이니까요.”
서연은 단호한 태도 일관하는 권율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괜히 율이 씨가 나섰다가 진보라가 ‘때는 이때다’ 하고 뺏어 가면 어떡해요.”
“서연 씨가 걱정하지 않게 확실히 선 그을게요.”
자꾸만 설득하려는 권율을 더 당겨 안으며 서연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싫어요. 율이 씨가 진보라랑 연락하는 것도, 말을 섞는 것도. 특히 만나는 건 더 싫어요.”
“내가 똑바로 할게요.”
“율이 씨야 항상 똑바로 하죠. 그냥…… 다른 여자가 내 남자를 보고 설레는 게 싫어서 그래요.”
권율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더니 확인하듯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무슨 남자요?”
“내 남자요. 율이 씨가 내 남자 맞잖아요.”
순간 거대한 권율의 상체가 금방이라도 덮칠 듯 간격을 좁혀왔다. 뒤로 몸을 물리던 서연이 기우뚱하더니 풀썩하고 쓰러졌다.
“율이 씨. 나…… 출근해야 해요.”
“이건 다 서연 씨 책임이에요.”
“갑자기요?”
“난 서연 씨 남자니까. 다른 사람이 뺏어가지 못하게 빨리 안아줘요.”
내 남자라는 말이 주는 파급효과는 엄청났다. 선명한 복근이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내자 서연은 농담이었다고 잡아뗄 수도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딱 맞춰놓은 각본처럼 두 사람 사이에 므흣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서연은 크게 일렁이는 권율의 목울대와 날카로운 턱선을 보며 가쁜 숨을 삼켰다.
“출근하려면 슬슬 씻어야 하는데…….”
“내가 도와줄게요. 나만 믿어요.”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건지. 권율은 자꾸만 서연의 옷 속을 파고들었다.
서연은 흔들리는 숨을 꾹 누른 채 재빨리 시계를 쳐다봤다.
출근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30분.
1분 1초가 아까운 마당에 길게 고민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차라리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생각을 정리한 서연이 권율의 어깨를 빠듯하게 감싸 안았다.
***
톱스타가 매매했다는 소문으로 유명해진 한남동의 고급 빌라.
서연은 세련된 건물 외관을 힐끔 올려다보고는 빠르게 핸들을 돌렸다.
사람 하나 지나다니지 않는 조용한 길가에 서연의 차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서연 씨.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바로 연락해요.’
서연은 호진과 최 비서에게 차례로 연락을 돌리고는 보라의 집으로 향했다. 미리 봐둔 공영주차장 안쪽에 차를 세우자마자 서연은 핸드폰부터 꺼냈다.
<한서연이에요. 내가 누군지는 잘 알 거예요. 물론 이렇게 찾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요. 집 근처 공영주차장에서 기다릴게요.>
몇 번을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며 그나마 제일 멀쩡한 내용으로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확인한 진보라가 얼마나 패닉 상태에 빠졌을지 상상만으로도 배시시 웃음이 났다.
‘어제는 재미있었겠지? 하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날이 펼쳐질 거야.’
서연은 보라의 행동이 얼마나 바보 같고, 최악의 상대를 건드렸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었다.
바로 그때 서연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당신이 뭔데 여길 와. 내가 나갈 것 같아? 경찰 부르기 전에 당장 꺼져!>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피가 거꾸로 솟게 만드는 단어라는 걸 난생처음 알았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오케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서연이 빠르게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말이 참 짧네. 나도 핵심만 말할게. 여기로 올래? 아님, 내가 갈까?>
몇 번의 진동이 더 울렸지만, 서연은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소모적인 실랑이를 벌이는 것보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불안한 사람은 서연이 아니라 진보라였으니까. 서연이 불리할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서연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아! 전화!”
서연은 아침에 권율과 헤어지며, 한 가지 합의를 봤다. 진보라와 경숙의 연락처를 교환하고, 각자 알아서 하기로 말이다.
권율이 벌써 찾아갔을까 싶었지만, 서연은 급한 마음에 경숙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어제 일은 어떻게 됐어?]
“슬슬 수습하는 중이야. 호진이랑 통화도 했고,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것 같아. 그래서 내 남자 친구가 인사 좀 드리고 싶대.”
서연은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를 치다 슬쩍 말을 흘렸다.
[무슨, 남자 친구?]
“내 남자 친구. 권율. 이름도 장군님이고 멋있지?”
[너 진짜 이렇게 할 거야?]
경숙의 싸늘한 반응에 서연은 더 뻔뻔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엄마. 우리 율이 씨한테 아픈 말 금지! 문전박대 금지야!”
[진짜 오기만 해 봐. 내가 아주 소금 뿌려서 내쫓을 거니까.]
“엄마가 그렇게 나오면 할 수 없지. 오늘 당장이라도 사고 쳐서 할머니 만들어 주는 수밖에.”
유치한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면서도 서연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미쳤어?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그러니까 내가 안 미치게, 율이 씨가 뭐라고 하나 들어달라고.”
[아니. 취준생도 아니고 졸업도 한참 남은 스물두 살짜리 대학생이랑 무슨 얘기를 해. 결혼 얘기를 할 거야, 직장 얘기를 할 거야?]
구구절절 맞는 소리만 하는 경숙의 말에 서연은 입술을 움찔거리다 이내 실없는 말을 쏟아냈다.
“엄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율이 씨한테 처음부터 잘해줘.”
[아. 몰라, 몰라. 안 만날 거야.]
“벌써 출발했을지도 몰라. 엄마 진짜 그러지 마.”
[아빠랑 산에 가서 밤늦게 올 거야. 헛걸음을 하거나 말거나.]
서연은 경숙이 말은 그렇게 해도 권율에게 막 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경숙이었으니까. 최소한 권율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어줄 것 같았다.
“엄마…… 내가 율이 씨를 정말 좋아해. 그러니까, 한 번이라도 기회를 줘.”
서연의 간곡한 부탁에 경숙은 폭풍 같은 한숨을 쏟아냈다.
[오려면 같이 오지. 뭐하러 혼자 와. 할 말도 없는데.]
“꼭 그러고 싶다고 부탁했어. 그러니까 눈치 주지 마.”
[아휴. 시끄러워!]
그 순간 핸드폰 너머로 태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진짜 왔다고? 어머!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당황한 경숙이 허둥지둥거리자 서연이 빠르게 소리쳤다.
“엄마!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는 것 잊지 말고. 율이 씨 구박하면 절대 안 돼!”
[몰라. 끊어!]
뚝 하고 전화가 끊어지자 서연은 두 손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생각 같아서는 부모님 집으로 달려가 권율 곁을 딱 지키고 싶었지만, 그건 그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서연은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권율을 믿고 불안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테니까.
서연은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에 운전석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스르륵 눈을 감았다.
톡톡―.
바로 그때,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