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현장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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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현장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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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현장학습
2022.12.04.
지이잉―.
창문을 내린 서연이 비스듬하게 팔을 괴며 웃었다.
“혼자야? 경찰은?”
“지금이라도 불러?”
“그러든가. 이번 기회에 함께 조사받으면 시간도 벌고 좋잖아.”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면 겁을 집어먹은 게 분명한데도, 보라는 독한 말만 내뱉었다.
“여기까지 찾아와서 할 말이 뭐야?”
“일단 타.”
서연은 급하게 짠 계획치고는 완벽하다는 생각에 싱긋 웃었다.
“날 어디로 데려갈 줄 알고.”
“벌써 겁먹은 거야? 아니면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서연이 슬슬 신경을 긁어대자 얼굴이 붉어진 보라가 쿵쿵거리며 차 앞을 빙 둘러 걸었다.
쾅!
보라가 있는 힘껏 세게 문을 닫아버리자, 서연이 피식하고 웃었다.
“역시 재벌 집 딸은 다르네. 새 차 한 대 뽑아주려고?”
“탔잖아.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서연은 보라의 거슬리는 행동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전벨트를 가리키며 눈짓했다.
“들어가 봐야 해. 여기서만 얘기해.”
어림없는 소리라는 듯 서연이 시동을 걸었다.
요란한 엔진소리가 들리자 보라는 저도 모르게 급하게 안전벨트를 맸다.
“진보라. 앞으로 솔직해야 할 거야.”
“내가 그런 협박에 쫄 것 같아?”
“보면 알겠지. 네가 쪼는지 안 쪼는지. 그럼 출발한다.”
상체가 기우뚱 쏠리도록 급하게 출발하자 보라가 조수석에 달린 손잡이를 재빨리 잡았다.
“어, 어디 가는데.”
“안 알려줘.”
서연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정면만 응시했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고 다그친다면 싸움이라도 하겠지만, 서연은 보라의 말에 대꾸는커녕 무시로 일관했다.
검은색 슈퍼카가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사납게 곤두섰던 보라의 모습이 순간 달라졌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자꾸만 힐끔거리며 서연의 표정을 살폈다. 서연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두 번 다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망신을 줄까. 아니면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제대로 느끼게 해줄까.
그러다 한편으로는 따끔한 충고를 해주고 돌려보낼까 싶었다.
‘지금 오지랖 부릴 때야? 정신 차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보라가 배경만 믿고 지금처럼 까불었다가는 앞으로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얘기 좀 해.”
“지금 참고 있으니까, 입 다물어.”
서연의 한 마디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차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눈부시게 쏟아지는 오전 햇살.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반포대교를 건넜다.
처음에는 불만을 쏟아내던 보라도 서연이 번번이 말을 씹어버리자, 말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어색한 침묵도 잠시.
서연이 왼쪽으로 핸들을 꺾어버리자 화들짝 놀란 보라가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여, 여긴 왜 왔어!”
“검찰청에 왜 왔을 거 같아? 네가 한 짓을 잘 생각해 봐.”
싸늘하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즐겁고 신나는 일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서연이 빙긋 웃었다.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검찰청 건물 앞에 서연의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내려.”
“싫어!”
“지금이라도 변호사 부르고 싶으면 부르든가.”
보라는 변호사라는 말에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안전벨트를 풀지 않았다.
“아님, 내가 네 부모님께 전화할까? JS 보험이나 대성건설 회장실에 전화하면 간단할 것 같은데.”
부모님이라는 말에 보라의 어깨가 움찔하자 서연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집으로 찾아간다고 했을 때 곧바로 나온 것하며, 변호사를 부르라는 말에도 입도 벙긋 못 하다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잘못이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서연은 재벌가 사람들의 심리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몹시 두려워했다. 그건 평소 친분이 있는 재벌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몸소 경험한 것이었다.
특히 재계 서열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들은 뭔가 거대한 임무를 맡은 비밀 요원처럼 굴었다.
개중에는 친구들과 생일 파티를 하는 것조차 부모에게 알려지는 게 싫어 익명으로 예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무래도 그들의 행동이 회사의 이미지와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어쩌면 평판이나 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특성을 너무도 잘 아는 서연이었기에 보라를 흔들 수 있는 포인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당장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야.”
일단은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보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었다.
“네가 앞으로 어떻게 될 수 있는지 미리 알려주려고.”
“뭐, 뭘 알려줘?”
“쉽게 말해서 현장학습 같은 거야. 너무 겁먹지 말고. 가자.”
입꼬리를 한껏 올린 서연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활짝 열었다.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손톱을 뜯고 있던 보라는 서연이 보내는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조용히 따라와.”
팔짱을 끼지 않았을 뿐, 서연은 보라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바짝 거리를 좁혔다.
고개를 푹 숙인 보라는 서연의 구두 코만 바라보며 걷다 얼떨결에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서연이 뭘 알고 온 거야? 도대체 검사실엔 왜 왔냐고.’
검찰청에 도착한 서연의 분위기가 처음보다 더 싸늘해지자, 보라는 자꾸만 힐끔거리며 눈치를 봤다.
이건 핑계를 대고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잘못을 실토하고 싹싹 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보라가 머릿속으로 어쩌지를 외치며 절규하던 그때, 서연은 실무관의 안내를 받아 검사실 소파로 향했다.
“여기 와서 앉아.”
보라는 산더미 같은 서류와 군더더기 없는 사무실을 몇 번 두리번거리다 서연의 옆에 앉았다. 그 순간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아침 보고가 길어지는 바람에 좀 늦었습니다. 여호진 검사입니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너무도 날카로운 호진의 눈빛에 보라의 어깨가 잔뜩 곱아들었다.
그러자 호진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두 사람 앞에 명함을 내밀었다.
허공에서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보라의 손이 작은 명함 끝을 집어 들었다.
미리 약속한 대로 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변호사를 통해 백화점 CCTV 영상을 받아보셨겠지만…….”
CCTV라는 말에 보라가 호진의 명함을 툭 하고 떨어트렸다. 서연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슬쩍 신호를 보내자 호진이 노트북을 꺼냈다.
“네. 안 그래도 DN 홈쇼핑 측 변호사에게도 연락을 받았습니다.”
호진은 보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서연에게 몇 가지를 묻고, 대답하며 타이핑을 치기 시작했다.
“불법 촬영을 한 것도 모자라 유포라니요. 심지어 저는 연예인도 아니고 일반인입니다.”
“계속하시죠?”
“악의적인 목적을 가진 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없습니다.”
서연은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는 말을 덧붙이며, 보라를 대놓고 쳐다봤다.
“혹시 의심 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글쎄요. 좀 혼란스럽네요. 저와 최민혁 대표는 정말 아무 사이가 아니거든요. 왜 그런 기사가 낸 건지, 하아. 전혀 모르겠습니다.”
스캔들이 터지면 사실과 상관없이 여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걸 한탄하듯 덧붙였다.
서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진의 시선이 보라의 얼굴을 꿰뚫었다. 강렬한 시선을 마주한 보라는 숨도 쉬지 못했다.
“구체적인 수사는 경찰에서 하겠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곧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보라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서연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짝사랑이 뭐라고, 이렇게 무모한 짓을 벌이다니.
보라에 대한 법적 처벌은 세세하게 따져봐야겠지만, 명백한 증거를 내세운다면 사회적 단죄를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뉴스에서 자주 접했을 겁니다. 연예인들이 악플러들을 잡았다는 기사요.”
“아. 네.”
“그것보다 더 쉽습니다.”
호진은 영업비밀을 쏟아내듯 수사 과정을 낱낱이 설명했다.
“CCTV가 확보된 마당에 신원 확인은 일도 아닙니다. 게다가 불법 촬영에 사용된 전화기를 압수해 디지털 포렌식을 맡긴다면…….”
히죽 웃은 호진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라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탈탈 털린다고 보시면 됩니다. 핸드폰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저장되니까요.”
“통신사 조회나 계좌 조회. 뭐 그런 거는요?”
“필요하다면 영장을 받아서 집행할 수 있겠지만. 사이트에 올린 IP 주소를 확인해서 그 일대 CCTV를 뒤지면 일주일도 안 걸립니다.”
일주일이라는 호진의 말에 보라는 지금이라도 부모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자 사건처리에 능숙한 호진이 빈틈없이 파고들었다.
“사실 이런 사건의 범인들은 대부분 비슷한 변명을 합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어요……라든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지만, 근엄하기 짝이 없는 호진이 말을 이었다.
“ID를 해킹당했나 봐요…… 라고 하죠.”
보라는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쉽게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게다가 자신의 행동이 치정이지, 범죄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계속되자, 보라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괜히 IT 강국이겠어요? 다 방법이 있죠.”
“범인을 특정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진짜 핸드폰을 잃어버렸는지, 주운 사람 있다면 누군지…….”
호진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주변의 어떤 기지국의 신호를 받았는지 조사하면 다 나옵니다.”
호진은 수사기관에서 적법하게 요구할 경우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거기다 이번 일에 DN 홈쇼핑이 연관된 만큼 그쪽에서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건다면.”
“승산이 있을까요?”
“승산이요? 후우…… 상대가 누구든 제대로 각오해야 할 겁니다. 두고두고 후회할 테니까요.”
보라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데. 아까부터 표정이…….”
“아. 이분은 이번 사건에 아주 중요한 분이라서요. 제가 참고하시라고 동행했습니다.”
서연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무게를 이기지 못한 보라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보라가 울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생각보다 일이 어렵지 않게 마무리되면 어떤 처벌을 원하십니까?”
“기사를 실은 해당 신문사 1면에 공식적인 사과와 정정 기사요.”
서연은 호진에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보라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또…….”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호진이 부추기자 서연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사실 이런 말씀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 남자 친구 집안에서 절 탐탁지 않아 하거든요.”
“남자 친구가 따로 있으셨습니까?”
“네. 그런데 이번 일로 더욱 곤란해졌습니다.”
순간 서연이 보라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특히 할아버님이 제일 완강하시거든요. 아무래도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잠시 말을 멈춘 서연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물질적 피해보상은 둘째치고, 이 두 가지는 꼭 받아낼 생각입니다.”
서연이 비릿하게 웃으며 보라를 쳐다봤다.
“할 수 있겠어?”
“…….”
“꼭 해야만 할 거야…… 진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