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올 것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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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올 것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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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올 것이 왔다
2022.12.18.
‘율이 씨 할아버지가 날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예전에 연희에게 만날 약속을 잡아달라고 했지만, 오늘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차라리 내일쯤 들었다면 충격이 덜했을까?
지난밤부터 연이어 터지는 일들을 틀어막느라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강력한 존재의 호출에 서연은 정신이 아찔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할까? 아니면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할까?
짧은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다음으로 미룬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질 건 하나도 없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않을까?
연애와 결혼을 매와 비교하는 자신을 깨닫고, 서연은 말할 수 없이 참담해졌다.
[너무 갑작스럽죠?]
“아닙니다.”
[혹시 너무 부담스러우면 내가 어떻게든 아버님께 말씀드릴게요.]
연희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그랬다가 그녀에게 어떤 피해가 갈까 걱정스러웠다.
만약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더 당당하게 나아가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시면 나가겠습니다.”
[아버님은 집에서 만났으면 하시는데, 장소는 서연 씨 편한 곳으로 정해요.]
“저는 다 좋습니다.”
사실 길 한복판에서 만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오고 가는 말이 중요한 거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연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불편하게 하실 거예요. 큰 힘은 안 되더라도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
잔뜩 움츠러들고 구겨졌던 마음이 연희의 한 마디에 팽팽하게 펴지는 기분이었다.
“말씀만으로도 정말 힘이 돼요. 감사합니다. 어머님.”
[솔직히 별 도움은 안 될 거예요. 내가 아버님 앞에서는 겁쟁이가 되거든요.]
겁쟁이라는 연희의 말에 순간 권율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힘들었던 감정을 떨어놨을 때 권율이 해줬던 말이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너무도 비슷한 연희의 그 말에 왠지 모르게 위안을 받았다.
“어머님만 괜찮으시면 그날 댁으로 모시러 가도 될까요? 할아버님에 대해 주의사항 좀 듣고 싶어서요.”
[그래요. 그리고 율이한테는…… 하. 미안해요. 내가 서연 씨한테 거짓말하라고 시키는 것 같아서.]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미안한지, 연희는 양해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서연은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하는 지금을 놓치지 않았다.
“저…… 어머님.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최민혁 대표님과의 열애설은요.”
분위기가 나쁘지 않을 때 어떻게든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사실이 아닙니다. 절대로요.”
[…….]
“나중에 다 밝혀지겠지만, 중간에 어떤 사람이 장난을 좀 쳤습니다.”
서연은 보라의 소행이라는 걸 밝힐까 싶다가도 그건 자신이 아닌 보라가 직접 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믿어달라고 강요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아니라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연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분위기가 썩 좋지 않자 서연은 창고에 있는 보라를 데리고 나가 연희와 삼자대면이라도 할까 싶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믿어요.]
“정말요?”
[만약 열애설이 사실이었다면 원준 어머님이 지나가는 말로라도 표현을 하셨을 거예요.]
서연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외치며 연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앞으로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율이 아빠랑 좀 지켜보자고 얘기했어요.]
찬성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반대가 아닌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율이가 저렇게 진지하다면 다 이유가 있을 테고. 그렇다면 지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는 해보려고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님.”
연희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말투며 분위기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친근한 것 같았다.
그러자 그의 할아버지의 호출에 덜덜거리던 마음이 슬슬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었다.
한결 마음이 편해져서일까. 그제야 살갑게 안부도 묻고, 일상적인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곧 주소를 보내주겠다는 연희의 말로 통화가 마무리되자 서연의 눈동자가 의욕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민혁과의 열애설도 문제없이 넘겼겠다, 애매하긴 하지만 대놓고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는 분명 긍정의 신호였다.
그러자 찜찜했던 기분이 온데간데없이 말끔하게 사라져버렸다.
서연은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처럼 그의 할아버지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톡, 토도독―.
반짝이는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서연이 얼른 전화기를 들었다.
“최 비서님. 창고에 있는 진보라 좀 올라오라고 하세요. 지금이요.”
서연은 사무실 전화를 끊자마자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자판을 두드렸다.
<호진아. 율이 씨 할아버님한테 호출받았다. 물론 율이 씨 모르게. 서희 변호사님한테 꿀팁 같은 거 전수받을 수 있어?>
권율 집안의 절대 권력자를 만나려면 철저한 사전 조사만이 살길이었다.
서연은 궁금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적어 다시 호진에게 보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만나자는 약속이 잡혔다.
호진과 몇 번의 톡이 오고 가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창고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한 건지, 앞머리가 헝클어진 보라가 숨을 헐떡거리며 서 있었다.
“진보라. 여기 와서 앉아 봐.”
“저 뭐…… 또 잘못했어요?”
앙칼지게 반말을 쏟아내던 보라는 서연의 심각한 목소리에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왜. 창고에서 뭐 실수했어?”
“아, 아니요! 재고 목록 엑셀로 정리한 게 다예요. 핸드폰도 안 하고 정말 열심히 했다고요.”
“그래? 그럼 더 열심히 해줘야 할 일이 생겼어.”
서연이 빙긋 웃으며 소파의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어색한 몸짓으로 다가온 보라가 옆에 앉자마자 서연이 말했다.
“이번 일을 잘 해내면 선처 비슷한 걸 해줄 수도 있어.”
선처라는 말에 보라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뭔데요?”
“율이 씨 할아버님이 날 만나면 어떻게 할 생각이신지. 알아 와.”
“할아버지가 부르셨어요?”
서연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네가 할아버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걸 털어놓고.”
순간 보라가 눈을 또르르 굴렸다. 그녀가 생각에 잠긴 것도 잠시.
“만약에요. 제가 언니와 그…… 그.”
“율이 씨?”
“네. 제가 두 사람이 잘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재벌가 아가씨 아니랄까 봐. 이 상황에서 거래를 제안하다니. 서연은 보라의 깜찍한 행동에 피식하고 웃었다.
“최민혁 대표님께 소송하지 말아 달라고. 말 좀 해주시면 안 돼요?”
DN 그룹의 위력과 재벌들 사이의 소문이 두렵기는 한 모양이었다. 보라는 싹싹 빌 것처럼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난 철저히 성과주의자야. 모든 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어.”
“그래도 동기부여가 되려면 뭔가 가능성이 있어야죠.”
“또, 또. 반성한 지 얼마나 됐다고. 뻔뻔하게 딴생각이야.”
“어떻게든 최선을 다할게요. 부모님이 모르게만 해주세요. 제발요.”
보라가 저렇게까지 간절하다면, 뭔가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연은 보라에게 죗값을 물었을 때의 후련함과 보라를 이용해 얻을 수 있는 이익 사이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49 대 51.”
“…….”
“내가 널 믿는 마음이 한 끗 차이라는 걸 잊지 마. 할아버지 일이 잘되면, 정상참작이라는 걸 해줄게.”
그 말을 끝으로 서연이 손을 내밀었다.
“같이 할래, 말래?”
“정상참작 꼭 해주셔야 해요.”
“빨리 내 손이나 잡아. 마음 바뀌기 전에.”
보라가 재빨리 손을 붙잡자, 서연이 쓱 입꼬리를 올렸다.
어제의 적군이 오늘의 아군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
“숨 쉬나 확인해 봐요.”
“어, 어. 숨 쉬어.”
서연의 부모는 나란히 앉아 소파에서 잠이 든 권율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못 마신다는 사람을 왜 자꾸 줘서는.”
“이렇게 못 마실 줄 알았나.”
“술이 뭐 좋은 거라고. 이 사달을 만들어요.”
경숙은 권율이 불편하지 않게 베개를 고여 주며 말했다.
“이러다 서연이가 들이닥치면 어떡하지? 아까부터 계속 전화 오던데.”
“한서연이 자기 남자 친구 술 먹여서 기절시켰다고 난리 부리면, 당신이 그랬다고 해. 난 분명 말렸으니까.”
“허, 참. 의리 없게…….”
태석이 툴툴거리거나 말거나 경숙은 얇은 이불을 가져다 권율에게 덮어줬다.
“그래도 술 안 먹는 건 마음에 드네. 술 먹고 실수할 일은 없잖아.”
“남자가 사회생활 하려면 술 좀 먹고 해야 하는데.”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도 마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늙은이 소리 들어.”
경숙은 잔잔한 잔소리를 퍼부으며 권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리 아들이 배 속에서 잘못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훤칠하게 자랐을까?”
“경숙아. 뭐하러 그런 생각을 해. 괜히 마음만 아프게.”
“아니…… 그냥. 이 집 엄마는 밥을 안 먹어도 얼마나 든든할까. 아들이 이렇게 반듯하게 자라서…….”
그 말끝에 경숙의 눈가가 금세 촉촉해졌다.
막달을 앞두고 잘못된 아들을 생각하면 지나간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감정이 흔들렸다.
두 사람은 잠든 권율을 앞에 두고 쓸데없이 옛 생각에 젖어 들었다.
“사람이 똑똑하고 참 선해 보이지?”
태석의 말에 경숙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졸업이라도 했으면 어떻게 생각이라도 해볼 텐데.”
“사실 최 대표는 다 좋은데. 너무 강해서 서연이랑 부딪힐 것 같긴 해.”
“그건 그렇지……. 아휴. 서연이 나이하고 바꿨으면 딱 좋겠네.”
두 사람의 안타까운 넋두리가 계속되는 사이. 권율은 일어날 수도 그렇다고 더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하. 어쩌지?’
권율은 경숙이 훌쩍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분명 정신을 차리려 소파에 기댔을 뿐인데. 그사이 잠이 들었다니. 최선을 다해 잘 보여도 부족한 상황에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다.
자책하던 것도 잠시, 권율은 도란도란 들려오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그렇겠지만, 서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왠지 듣기 좋아 숨소리도 죽인 채 얘기에 빠져들었다.
“경숙아. 율이가 집에 오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 거야.”
“최 대표는 어쩌고. 어떻게 해서든 서연이 마음 돌린다잖아.”
민혁의 이야기가 나오자 태석도 잠시 머뭇거렸다.
“율이랑 만난다는 걸 서연이가 알아봐. 분명 결혼한다고 나서지. 골치만 아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경숙은 권율이 춥지 않게 에어컨 바람을 조정했다.
“서연이 일만 아니면 아들 삼고 싶게, 참 반듯하지? 안 그래요, 서연 아빠?”
“그렇지. 아까 얘기 나눠보고 깜짝 놀랐어. 한국대 수석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태석이 똑똑하다는 칭찬을 하던 그때, 권율이 스르륵 눈을 떴다.
“어! 눈 떴네?”
“머리는 좀 어때. 어지러워?”
경숙이 권율의 이마에 손을 올리자 그가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많이 안 좋은가 보네. 꿀물 타 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 봐.”
경숙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권율이 그녀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어머님.”
깜짝 놀란 경숙이 엉거주춤하자 손을 놓지 않은 권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제가 서연 씨를 정말 많이 사랑합니다.”
권율이 경숙의 손등에 제 이마를 가져다 붙였다.
“제가 서연 씨 남자 친구도 하고. 남편도 하고…….”
“……!”
“어머님…… 아들도 하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