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각자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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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각자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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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각자의 비밀
2022.12.22.
손등에 닿는 따끈한 체온 때문인지, 읊조리듯 나직하게 내뱉는 진심 때문인지. 권율에게 손이 붙잡힌 경숙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어머니. 제가 지금 가진 건 서연 씨에 대한 마음뿐입니다.”
권율은 화려한 말로 자신을 꾸미지도, 허세를 부리며 과도한 약속을 하지도 않았다.
조금 전 눈을 감고 생각하는 동안, 두 사람이 바라는 건 오로지 서연의 행복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겠습니다.”
“…….”
“서연 씨와 사랑할 기회를 주세요.”
권율의 숨결이 떨리자 경숙의 눈동자도 함께 흔들렸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월, 수, 금 오전에는 우리가 수영장에 가니까. 참고를…… 하든가.”
“어, 어. 그렇지. 화, 목은 특별한 일 없으면 집에 있어.”
“일부러 시간 뺄 거는 없고. 오고 싶으면 오고, 공부하려면 하고.”
경숙의 말에 권율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렇다고 해서 허락하는 건 아니고. 기회를 달라는데 못 줄 건 또 뭔가 싶어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진짜 잘할게요.”
“아니. 뭐. 우리한테 감사할 것까지야. 저기, 그리고.”
경숙이 태석을 쳐다보며 헛기침을 두어 번 하자 그가 불쑥 나섰다.
“우리 서연이가 다 좋은데. 누가 이유 없이 못 하게 하면 고집을 부리는 게 있거든.”
“애가 좀 삐뚤어진달까?”
처음 듣는 얘기에 권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자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서연의 학창 시절 얘기를 꺼냈다.
“우리 서연이가 학교 대표로 미술대회에 나갔는데. 열심히 구상해놓은 걸 선생님이 들어보지도 않고 반대하는 바람에.”
“아예 미술을 그만둘 뻔했지. 아마?”
두 사람이 말하는 서연의 이야기 속에는 공통된 발작 버튼이 있었다.
이유 없는 반대, 무례한 통보, 배려 없는 일방통행. 거기다 무시가 더해지면 서연은 어김없이 폭주 기관차가 됐다.
‘서연 씨가 싫어하는 행동은 조심해야겠구나.’
권율은 서연의 부모가 들려주는 ‘한서연 사용설명서’를 가슴 깊이 새겼다.
“우리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율이네 집에서 서연이한테 막말을 했다가는…….”
“애가 엇나갈 수 있다는 말이지.”
“어려서부터 그 고집을 꺾어보려고 별짓을 다 했거든. 그런데 안 돼. 그러니까 알아두라고.”
유용한 조언이 쏟아지자, 권율은 서연의 부모와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러면 오늘 만남은 좋았다고만 할까요?”
“어어. 우리도 비슷하게 말할 테니까. 또 만나기로 한 건 당분간 비밀로 하자고.”
나이 사건 이후로 서연에게 비밀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경숙의 간곡한 부탁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 사람이 다음 만날 약속을 은밀히 잡으려는데, 권율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서연 씨예요.”
“안 그래도 전화 여러 통 왔어.”
“서연이한테는 우리 집에서 나왔다고 해요. 술국 끓여줄 테니까 먹고 가고. 응?”
고개를 끄덕인 권율은 서연의 부모와 정작 서연이 모르는 비밀을 만들기 시작했다.
***
“미안하긴요. 통화됐으니까 괜찮아요.”
서연은 보라를 권율의 할아버지에게 보내고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불안했던 마음도 잠시, 권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찌나 반갑고 좋은지. 언제 걱정을 했었느냐는 듯 마음이 순식간에 말랑해졌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나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게 문전박대는커녕 경숙이 잘해준 게 틀림없었다.
서연은 구름을 걷는 듯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권율이 들려주는 방문 후기에 귀를 기울였다.
부모님과 어디가 닮았는지, 본가에 걸려 있는 작품 중에 어떤 게 제일 좋았는지. 무슨 말이 오고 갔고, 뭘 먹었는지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훈훈한 소식에 서연의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도서관 갈 거라고요? 그럼 공부 끝나고 율이 씨가 전화할래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통화인데도 서연은 온갖 종류의 감탄사와 웃음을 내뱉었다.
“으응. 나도. 많이 사랑해. 율아. 어, 알았어.”
서연은 까맣게 변한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며 권율과의 통화에서 느꼈던 여운을 한껏 즐겼다.
이제는 서연의 모든 것이 새롭게 프로그래밍 된 것처럼,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이면 알아서 권율을 떠올렸다.
그러면 배배 꼬였던 마음이 사르르 가라앉고, 참을 수 없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그러다 문득 권율의 말이 떠올랐다.
‘진짜 공개 연애하고 싶은데. 서연 씨 생각은 어때요?’
유명 연예인도 아닌데 ‘나 이제 연애해요’라고 공개하는 건, 뭔가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누군가는 연예인병이 제대로 걸렸다고 할 테고. 아니면 관심받고 싶어서 안달이라고 비난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원한다면, 그런 비난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로 힘들고 불안한 사람은 권율이었으니까.
생각에 잠긴 서연의 시선이 무심코 컴퓨터 화면으로 향했다.
<세기의 커플 탄생 – 파파라치 사진 공개>
포털 사이트에 걸린 할리우드 유명 배우의 열애 사진을 보며 서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맨 얼굴에 커피만 들고 있어도 스타일이 예술…… 어!”
순간 서연의 머릿속을 아이디어 하나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파파라치 사진?”
만약 권율과의 공개 연애를 할리우드 배우 스타일로 밝히면 어떨까.
권율이 민혁과 생김새나 체형이 다르다 보니, 그의 옆모습이 슬쩍 나오게 찍어 SNS에 올린다면 반응이 괜찮을 것도 같았다.
서연은 뭔가 더 구체화 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 일을 함께해 줄 직원들을 재빨리 호출했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자 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들어오세요.”
서연은 원형 테이블로 걸음을 옮기며 김 실장과 홍보팀장, 최 비서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어젯밤 터진 스캔들 때문인지 직원들은 자리에 앉으며,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특히 서연과 가까운 최 비서는 더 기민하게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제 열애설 기사 보셨어요?”
간단한 워밍업도 없이, 서연이 바로 본론을 꺼내자 다들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민혁 대표님과는 사실무근이시죠?”
최 비서의 물음에 서연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저번 행사장에서 그 셔츠 입고 있던 분이 남자 친구, 아니세요?”
조심스럽게 묻는 김 실장을 향해 서연이 환하게 웃었다.
“맞아요! 그 커다랗고 잘생긴 남자. 그 사람이 제 진짜 남자 친구예요.”
서연이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리자 세 사람의 눈빛이 동시에 흔들렸다.
“하. 난 왜 이렇게 엉뚱하지.”
이번에는 서연이 혼잣말까지 하자 최 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괜찮으신 거 맞죠?”
“그럼요.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
“소문난 김에 아예 공개 연애도 하고, 돈 좀 벌어볼까 싶은데. 어떠세요?”
서연의 생각은 엉뚱하고도 간단했다.
제일 많이 본 기사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미 볼 사람들은 다 봤을 테고.
강력하게 부정한다고 해서 대중들이 믿어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거기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며 더 이상한 소문을 확대 재생산할 수도 있었다.
서연은 이번 일을 별것 아닌 해프닝으로 넘기고, 주목받은 김에 돈이라도 벌자는 묘안을 떠올렸다.
물론 권율의 집안이 마음에 걸렸지만, 보라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자신의 평판이 더 좋아질 일은 전혀 없어 보였다.
“홈쇼핑 재고 물량이 얼마나 될까요?”
“거의 완판이라 홈쇼핑 측 물량은 없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10% 정도 할인해서 팔 수 있는 품목이 뭐가 있을까요? 재고도 좋고요.”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던 김 실장이 하니블랙과 여니블랙의 재고 수량을 긴급하게 읊었다.
“생각보다 얼마 안 되네요.”
서연은 화려한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이번 기회에 재고를 털어버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실적에 팔 수 있는 물건이 없었다.
“그러면 제가 사진 찍힐 때 입었던 옷을 재생산하면 얼마나 걸릴까요?”
“수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1차 주문량으로 하면 일주일 정도 걸릴 겁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일주일. 민혁과의 열애설이 진짜가 되기 전에 권율을 등판시키기에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백 마디 설명보다 진짜 남자 친구가 있다고 공개하는 게 깔끔했다. 거기다 이번 기회에 일방통행 중인 민혁도 아예 정리할 생각이었다.
“최 비서님. 사진에 찍힌 옷 추가 물량 발주 가능한지 알아봐 주시고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다들 어리둥절했다.
“홍보팀장님은 파파라치가 몰래 찍은 것처럼 사진 작업해주세요. SNS에 올릴 용도로요.”
“대표님 혼자 찍으실 건가요?”
“아니요. 제 진짜 남자 친구랑 같이 찍을 거예요.”
서연의 지시사항이 빗발치자 모두 받아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 그리고 김 실장님. 저번에 행사용으로 만들었던 남성 티셔츠 추가 디자인 가능할까요?”
“대표님께서 만드신 거랑 합하면, 5개 정도 가능합니다.”
“저랑 김 실장님은 디자인 상의할 테니까, 다른 분들은 나가셔도 좋습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서연은 디자인용 마커부터 집어 들었다.
“남성복 라인 론칭하시게요?”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그럴 여력은 안 되고요.”
서연은 깔끔한 라인들을 쓱쓱 그려내며 중얼거렸다.
“남자 친구 에디션을 한정판으로 내놓으면 어떨까 싶어서요.”
“남자 친구 에디션이요?”
“네. 제가 만든 옷 입혀서 ‘내 남자는 이 남자다’ 이렇게 SNS에 올리려고요.”
서연이 사귀는 사람과 사진을 찍어서 올린다는 건 SNS 개설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껏 일로 만난 사이를 제외하고는 서연의 SNS에 남자가 등장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으니까.
“진짜 좋아하시나 봐요.”
“네. 아주 좋아해요.”
짧지만 단호한 대답에 김 실장의 질문이 쏟아졌다.
서연은 손으로는 디자인을 그리면서, 입으로는 권율과의 연애 과정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두 사람의 디자인과 수다는 퇴근 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계속됐다.
바로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최 비서가 사무실 안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대표님. 진보라 씨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시간을 확인한 서연이 수북하게 쌓인 디자인 시안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최 비서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한 보라가 문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언니! 큰일 났어요.”
큰일이라는 보라의 말에 서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보라의 앞에서 차마 내색할 수 없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큰일?”
“할아버지가 언니에 대해 모든 걸 다 알고 있어요.”
“나에 대해 뭘, 다 알아?”
“회사 매출부터 언니 사생활까지. 모두 다요.”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듯 서연의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