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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지켜주고 싶어서 (95/130)


95. 지켜주고 싶어서
2022.12.29.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연희는 서연과 보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렇게 같이 와주신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해서요.”

“왜 그래요. 서연 씨.”

“괜히 저 때문에 어머님까지 곤란해지시면 안 되잖아요.”

아직 대면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비장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서연은 자신으로 인해 연희가 힘들어지는 건 싫었다.

많이 순화해서 내뱉은 말속에도, 스치듯 지나가는 연희의 표정에서도. 그녀의 삶이 녹록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까.


“사실 저는 할아버님 같은 분 많이 겪어봤어요. 원단 시장 사장님들도 다들 한 성격 하시거든요.”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아는 상황이라 겁먹을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서연은 연희의 손을 꼭 붙잡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할아버님이 저한테 어떤 험한 말은 하셔도 절대 나서지 말아주세요.”

“서연 씨가 이러면, 내가 같이 온 보람이 없어요.”

“아니에요. 옆에 이렇게 있어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든든해요.”

빙그레 웃은 서연이 연희의 손을 살짝 흔들었다.


“저 좀 이상한 거 같아요.”

“…….”

“어머님을 보면 율이 씨가 생각나서 너무 좋아요.”

연희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자 서연이 여리여리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래도 살짝 떨리니까. 어머님이 괜찮다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서연의 어깨너머로 피식하는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괜찮을 거예요.”

스르륵 눈을 감은 서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충분해요. 우리 그만 내려요. 어머님.”

“그런데 보라는요?”

“보라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이 내리자 보라가 연희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서연을 쳐다봤다.


“대문 열어놓을 테니까. 내가 연락하면 그때 들어와.”

서연은 보라에게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알렸다.


“보라야, 실수 없이 하고. 차에서 대기하고 있어.”

“네. 언니.”

연희의 말간 눈동자가 빤히 쳐다보자 보라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서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 연희에게 어서 들어가자고 손짓했다.


“서연 씨. 보라는 왜 불렀어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연희가 물었다.


“진보라가 제 열애설을 낸 장본인이라서요. 할아버님께 직접 증언하라고 불렀어요.”

흠칫 놀란 연희가 뒤를 돌아보는 사이, 서연은 보라가 극적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대문을 살짝 열어놓았다.

육중한 대문을 지나 계단에 올라서자 상당한 규모의 정원이 나왔다.

좋은 집에 많이 가본 서연도 남다른 규모에 주위를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전문 정원사의 손길이 느껴지는 나무와 꽃.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그러움과 향긋함에 순간 매료될 정도였다.


‘손꼽히는 현금 부자라더니. 이러다 우리 회사도 현찰로 사버리는 거 아니야?’

웬만해서는 절대 작아지지 않는 서연도 어찌나 심장이 쿵쿵거리는지.

당황한 모습이 겉으로는 드러날까 싶어 뒤를 돌아보는 연희에게 간간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연 씨. 이제 들어갈까요?”

현관문 손잡이를 붙잡은 연희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건 마치 마음의 준비가 됐느냐고 묻는 것처럼 들렸다.

순간 서연은 어린 시절 치과 유리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분명 고통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가지 않으면 더 큰 시련이 닥쳐온다는 걸 너무도 잘 아는. 그래서 도망가고 싶지만, 제 발로 들어가야 하는 단 하나의 선택지 같았다.

서연은 짧게 정리한 손톱을 꾹 누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님. 들어가요.”

마음가짐만큼은 비장하게, 어떤 말로도 상처받지 않겠다는 각오로 눈을 부릅떴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서희가 해준 조언을 떠올렸다.


‘김 여사를 조심하세요. 할아버지를 자기 입맛대로 조종하려고 해요.’

서연은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의해야 할 인물인 김 여사를 되뇌었다.


“자네 왔는가?”

화려한 홈드레스 차림의 중년 여성이 나타나자 서연이 자동으로 허리를 숙였다.

연희에게 말을 낮추는 걸 보니 집안일을 봐주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네. 안녕하셨어요. 아버님은 어디 계세요?”

중년의 여성은 연희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서연을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는지. 서연은 불쾌하게 느껴지는 시선은 둘째치고, 연희를 대하는 여자의 태도가 거슬렸다.


“이 아가씨는 어른을 봤으면 상냥하게 인사할 줄 알아야지.”

“아. 서연 씨. 여기는 아버님 생활을 도와주시는 분이세요. 김 여사님이요.”

소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김 여사의 눈빛이 더욱 뾰족해졌다.


“안녕하세요. 한서연입니다.”

사실 서연은 김 여사가 이 집에 들어온 과정부터 어떤 갈등을 조장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자리인데다 초면에 정색할 수 없어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우리 일등 손자가 폭 빠졌다고 해서 미모가 특출난 줄 알았더니. 어휴. 별것 없네.”

본인 손자도 아니면서 일등 손자라니. 서연은 김 여사의 말에 하마터면 비웃음을 쏟아낼 뻔했다.

연희는 그런 김 여사를 잘 아는지, 별 대꾸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서재에 계세요?”

“자네는 이 아가씨랑 거실에 가 있어. 내가 모시고 갈 테니까.”

김 여사는 진짜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선을 내리깔며 연희에게 지시했다.

서연은 한 마디를 내뱉을까 싶다가도 여기 온 목적이 김 여사가 아니었기에 연희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김 여사님 말은 마음에 두지 말아요.”

예술작품 같은 소파에 앉으며 연희가 중얼거렸다. 서연은 대신 미안해하는 연희에게 괜찮다며 얼른 손을 잡았다.


“어머님! 괜찮으세요?”

연희의 손이 어찌나 차가운지. 그녀는 당사자인 서연보다 더 긴장한 모양이었다.

흐릿하게 웃어 보이는 연희를 보며, 서연은 그녀의 손이 미지근할 때까지 손등을 포갰다.


‘여기서 나가면 따듯한 곰탕이라도 사드려야겠다.’

서연이 연희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그때, 가사도우미가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연희를 보고도 눈인사를 하지 않은 채,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서열을 알아본다더니. 마주치는 사람마다 연희를 무시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아무래도 집안의 권력자가 연희를 무시하자, 일하는 사람마저도 그녀를 하찮게 대하는 것 같았다.


‘지나칠 정도로 예의 바르게? 예의는 무슨. 멀쩡한 사람을 왕따나 시키고.’

서연은 서희의 조언을 떠올리며 기가 막혔다.

점점 거세지는 감정이 미리 준비했던 인사와 어렵게 외운 말들을 송두리째 지워버렸다.

게다가 말을 전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대놓고 무시하는 건지.

그의 할아버지를 모시러 간 김 여사는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이 뻔히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나타나지 않는 것 자체가 이 만남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허물어트렸다.

만만치 않은 서연을 만만하게 본 그의 할아버지는 정확히 1시간 20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르신. 아까 물걸레질을 해서 바닥이 미끄러워요. 조심 또 조심.”

김 여사의 간드러진 비음이 들리자 연희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서연도 마지못해 연희의 옆에 서서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율이 씨. 여기 왜 이래요.’

따갑게 내려앉는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서연은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권율을 떠올렸다.

원래대로라면 큰절부터 올렸겠지만, 지금은 절을 할 분위기도 아니었고 하고 싶은 생각도 싹 사라졌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한서연입니다.”

그래도 인사는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아 최대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인사를 마친 서연이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연희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얼음처럼 서 있었다.

서연도 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엉거주춤하다 다시 허리를 세웠다.


“앉아라.”

석구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연희가 자리에 앉았다.

시아버지의 시집살이가 얼마나 매서웠으면 허락 없이는 앉지도 못하는지.

부당한 대우가 계속되자 서연은 연희의 마음 상태가 괜찮은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다 영혼까지 꿰뚫어 볼 것 같은 석구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서연은 미소를 꾸며내지 않았다.

그저 눈을 마주하며 그의 할아버지가 쏟아낼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어르신. 아가씨 나이가 많다더니. 인상이 영 별로지요?”

귓가를 파고드는 신랄한 평가에 서연이 김 여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눈빛 매서운 것 좀 보세요. 이러다 우리 일등 손자를 아주 손에 쥐고 흔들겠어요.”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한 마디를 쏟아 붙이려는데 그의 할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곱 살이나 많다고?”

“네. 그렇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숨길 것도 없었다. 그러자 그의 할아버지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옷 장사를 한다던데.”

“네. 맞습니다.”

옷 장사가 맞지만, 옷 장사라는 말을 듣자 서연의 가슴에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래. 우리 율이랑은 어쩔 셈인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건 아닙니다.”

서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침없이 내뱉는 혀 차는 소리가 마음에 와 박혔다.

어찌나 날카롭고 아픈지, 서연은 두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이렇게 사리 분별을 못 해서야.”

“아가씨! 사십 먹고, 오십 먹어 봐. 어떤 남자가 늙은 여자랑 살고 싶겠어? 젊고 예쁜 여자한테 눈 돌아가지.”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김 여사가 옆에서 톡톡 거들고 나서자 서연은 울컥하는 마음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헤어질 생각이었다면,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우리 율이랑 결혼이라도 하겠다. 이 말인가?”

“서로가 원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할아버지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래도 서연은 절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보란 듯이 천둥 같은 고함이 연희에게로 향했다.


“도대체 넌 뭐 하는 거냐! 남편 뒷바라지를 잘해서 성공을 시켰냐. 아니면 돈을 벌어와 가정에 보탬이 됐냐.”

그의 할아버지는 서연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서연을 자극하려고 연희를 공격하는 걸까.

갑작스럽게 뒤바뀐 공격 대상에 서연은 어리둥절해졌다.


“아들 하나 똑똑하게 낳은 거 저런 물건 좋은 일 시키려고?”

저런 물건?

생전 처음 듣는 호칭에 서연의 뇌가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서연이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연희의 가느다란 두 손이 치마를 꼭 움켜잡았다.

연희를 향한 비난이 끝도 없이 쏟아지자 그녀의 어깨가 점점 내려갔다.

급기야 두 사람이 연희의 과거 연애사를 주거니 받거니 떠들어대자, 어쩔 줄 몰라 하는 연희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서연은 덜덜 떨리는 연희의 손등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권율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작고 하얀 손을 보며 왠지 그가 겹쳐 보였다.

권율이 없는 자리. 자신을 위해 기꺼이 함께해준 그의 어머니. 가슴속에 커다란 멍이 든 그녀를 지켜줄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서연은 연희의 손을 천천히 잡아 쥐었다.


“어머님.”

“…….”

“우리 그만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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