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오늘 오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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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오늘 오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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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오늘 오길 잘했어
2023.01.05.
얼떨결에 권율의 집에 들어온 서연은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서연 씨. 내가 저녁 하는 동안 율이 방에서 시간 보낼래요?”
서연은 하마터면 좋다고 소리칠 뻔했다.
그래도 결혼한 친구들에게 들은 얘기가 있어 붕붕 떠다니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제가 뭐라도 도와드릴까요?”
사실 라면이나 가끔 끓여 먹는 수준이라 요리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그래도 마음만큼은 이미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처음 온 손님한테 집안일을 시키다니요. 난 내 스타일로 천천히 움직이는 걸 좋아해요.”
“이렇게 초대해주신 것도 감사한데, 아무것도 안 해도 될까요?”
서연은 염치가 없었지만, 그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라는 솔깃한 말에 연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빙그레 웃은 연희가 서연을 권율의 방문 앞으로 데려갔다.
어찌나 가슴이 콩닥거리는지, 서연은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입술을 꼭 말아 넣었다.
그의 방문이 스르륵 열리자, 문틈 사이로 시원한 머스크향이 쏟아져 나왔다.
‘어. 율이 씨 향기. 좋다. 너무 좋아.’
서연은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리다 연희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했다.
“율이도 서연 씨가 놀러 온 걸 알면 좋아할 거예요. ”
“그래도 주인도 없는 방에…….”
“서연 씨가 여기 있는 게 날 도와주는 거예요. 그럼 편하게 있어요.”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서연은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혼자 사는 서연의 집에 권율이 방문하다 보니 그의 개인 공간을 구경하는 건 처음이었다.
서연은 연희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그러다 건축가가 만든 걸로 유명해진 책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공부하는 곳과 컴퓨터 하는 곳을 분리해 사용하는지, 똑같이 생긴 두 개의 책상과 짝을 이룬 의자가 각각 놓여 있었다.
“딱 율이 씨네.”
그의 방은 한 마디로 단정 그 자체였다.
연희가 아무리 쓸고 닦는다고 해도 평소 사용하는 사람이 지저분하다면 빛이 안 날 텐데.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간단한 필기도구를 제외하고는 잡동사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정리를 즐겨하는 서연이었지만, 권율에게는 상대가 안 될 정도였다.
모든 물건이 자로 잰 듯 제자리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고, 심지어 벽에 걸린 그의 사진조차 일정한 규칙이 있어 보였다.
“이 사진 좀 봐. 왜 이렇게 귀여워.”
아무리 봐도 유치원 졸업사진인 것 같은데, 똘똘하고 의젓한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서연은 그의 사진 속 오동통한 볼살을 한참이나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잔뜩 기대했던 전시회를 구경하는 사람처럼 살랑살랑 걸으며 이 순간을 만끽했다.
느낌 있는 작은 소품 하나하나, 알맞게 걸려 있는 유명 작가의 그림. 모든 것이 어찌나 감각적인지. 길게 이어진 침실까지 홀리듯 걸었다.
게다가 킹사이즈인 그의 침대는 자고 일어난 흔적 하나 없이 깔끔했다. 서연은 새하얀 침대 끝에 걸터앉기도 미안해 괜히 주변을 서성거렸다.
“우와. 책 좀 봐.”
서점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책장 앞에서 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음? 이건 뭐야?”
족히 수십 권은 되어 보이는 다양한 연애 관련 서적이 제일 좋은 자리에 꽂혀 있었다.
―올바른 연애란 무엇인가.
―연애유형 분석과 결혼의 상관관계
서연은 책의 제목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다 순간 멈칫했다.
“소중한 성과…… 사랑?”
과감한 내용이라면 책장이 아닌 서랍 안에 들어있을 텐데도,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슬그머니 책을 꺼냈다. 혹시 연희에게 들킬세라 두꺼운 책을 휘리릭 넘겼다.
‘아무리 책 읽는 게 취미라지만, 이렇게까지?’
문득 서연의 머릿속에 지난 시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의 남다른 학구열과 노력의 결과들이 떠오르자 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발그레해졌다.
괜히 목이 잠긴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해대고 막 책을 덮으려는데. 책의 맨 마지막 장에 서평 같은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나의 의미 없는 행동이 소중한 사람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배려와 존중, 혼자서만 앞서가지 말라는 보석 같은 그의 다짐이 길게 쓰여 있었다.
서연은 반듯한 글씨를 손으로 매만지며 눈으로는 그의 진심을 읽고 또 읽었다.
‘오늘 오길 잘했네.’
마치 주인 없는 방에 몰래 들어와 소중한 꿀단지를 발견한 것처럼 마음이 한껏 달달해졌다.
똑똑―.
서연이 권율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지던 그때, 조용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이 범상치 않다 보니 서연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서연 씨, 우리 저녁 먹어요.”
나직한 연희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아 네. 어머님.”
뒤를 돌아본 서연이 재빨리 책을 제 자리에 꽂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밖으로 나갔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내 마음대로 만들었는데.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어요.”
군침이 절로 도는 냄새에 서연의 눈이 반짝거렸다.
“흠. 냄새부터가 이미 맛있는데요. 어머님 요리가 맛있어서 율이 씨 키가 큰가 봐요.”
“우리 율이가 잘 먹기는 해요.”
권율 혼자서 장어 10마리를 먹는다는 연희의 말에 놀란 것도 잠시. 주방에 들어선 서연은 감탄사부터 내뱉었다.
“우와! 어머님!”
얼마나 솜씨가 좋은지. 직사각형의 대리석 식탁 위에는 빛깔부터 남다른 요리가 가득했다.
“저 어디에 앉을까요? 다 맛있어 보여서 빨리 먹고 싶어요.”
미소를 머금은 연희가 빈 의자를 가리켰다. 서연이 앉자마자, 연희는 빨간 솥에서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밥을 소복하게 담아줬다.
“오늘 고생했는데 어서 먹어요.”
“어머님 먼저 드시면요. 사실 아까 할아버님께 큰절부터 드리려고 했는데. 상황이 참.”
연습한 보람도 없이 일이 어그러졌다는 서연의 말에 연희가 첫술을 뜨며 말했다.
“서연 씨는 참 용감한 것 같아요.”
“솔직히 대범한 척하는 겁쟁이예요. 오늘은 할아버님 약점을 알아서 좀 수월했어요.”
“약점이요?”
서연은 간이 알맞은 전복 조림을 삼키며 보라에게 들은 이야기를 길게 설명했다.
“하지만 율이 씨한테는 말 안 하기로 했으니까. 지키고 싶어요.”
“왜요?”
“그래야 할아버님한테 떳떳할 수 있으니까요.”
확고한 서연의 대답에 연희가 순간 멈칫하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이로 보나 우리의 특별한 관계로 보나,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요.”
잠시 망설이던 연희가 물 한 모금을 넘겼다.
“같은 여자로 서연 씨가 멋있고, 한편으로는 부러워요.”
“제가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서연 씨를 만나고 온 날 잠을 못 잤어요.”
잠을 못 잤다는 연희의 말에 서연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도 서연 씨처럼 당당했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하고…… 밤새 생각했어요.”
그날 연희는 답답하고 억울한 순간들이 끝도 없이 떠올라 괴로웠었다.
“시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이요.”
서연은 자신의 어떤 행동이 그녀를 자극한 것인지, 기억을 꼼꼼하게 뒤졌다. 그러고는 자신이 불러온 나비효과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까 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 연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랐으니까.
“오늘도 그래요. 나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했을 서연 씨의 말과 행동.”
“…….”
“꼭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었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흐릿하게 미소 짓는 연희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서연이 연희의 눈동자를 조심스레 바라봤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서연 씨를 반대할 수 있을까?”
잠시 숨을 고른 연희의 표정. 주변을 감싸는 공기의 온도, 그리고 수도꼭지에 매달린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우리 아들이 저렇게 멋진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당연히 응원해줘야지 하고요.”
“어, 어머님.”
“두 사람을 강제로 갈라놓고, 아버님 입맛에 맞는 사람과 율이를 결혼시키면.”
말간 연희의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율이가 얼마나 불행할까. 꼭 나처럼이요.”
오늘 연희는 석구의 비난을 들으며, 이 지긋지긋한 불행을 끝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까…… 서연아.”
처음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며 존댓말을 하던 연희가 서연의 이름을 편하게 불렀다.
“네. 어머님.”
“우리 율이 잘 부탁해. 그리고 나도.”
곧 쏟아질 듯 눈물이 찰랑거리는 연희가 작고 하얀 손을 내밀었다.
순간 규정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연희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머님이 먼저 손 내밀어주신 거, 평생 잊지 않을게요.”
“우리 율이 곁에 와줘서 고맙다. 서연아.”
“제 편이 되어주셔서 너무…….”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서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도 강력한 상대를 함께 대면해서일까. 서연은 연희와 더 각별해진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듬으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쏟아냈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물었다.
“엄마. 이 누나랑 왜 그래요?”
***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권율은 엘리베이터에 내리자마자 서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도서관을 나올 때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전화를 했는지.
전화를 받지 않는 서연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아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권율은 서연의 집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회사로 가야 하나 목적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갈 때 가더라도 땀 냄새는 빼고 가야 할 것 같아 집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빨리 씻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권율이 도어 록 비밀번호를 쉼 없이 눌렀다.
‘권상현, 무슨 TV를 이렇게 크게 틀어놨어.’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은 것처럼 문밖에서도 깔깔거리는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권율은 무거운 가방을 느슨하게 내리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순간 서연에게서 나는 복숭아 향기가 흐릿하게 느껴졌다.
‘불안해할 것 없어. 서연 씨한테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권율은 걱정을 떨쳐내려 심호흡을 쏟아냈다.
“DM 보내도 돼요?”
“당연하죠.”
“톡은요?”
“그럼 나랑 톡 안 하려고 했어요? 아예 단체 톡방이라도 만들까요?”
“진짜요?”
이제는 서연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나 싶어 권율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율아. 지금 오니?”
환하게 웃는 연희의 인사에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율이 씨!”
“서, 서연 씨?”
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권율의 팔을 얼른 붙잡았다.
“너무 보고 싶어서, 놀러 왔어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권율이 서연의 말랑한 손을 잡아 쥐었다.
“진짜 서연 씨 맞아요?”
“나 오늘부터 서연 씨 아닌데요.”
배시시 웃은 서연이 상현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자 상현이 제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빨리 앉아요. 형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