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합동 작전
(99/130)
99. 합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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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합동 작전
2023.01.12.
망설이던 서연의 손가락이 권율의 눈썹을 그리듯 쓸어내렸다.
“어머님이 진짜 괜찮다고 하셨어요?”
열 마디 말보다 진심을 담은 권율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하. 그래도…….”
권율은 서연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말없이 바라만 봤다.
특유의 집요함을 유감없이 발휘하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마음이 갈팡질팡하는지, 서연은 회색빛 천장을 바라보며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러다 시선을 내려 권율을 지그시 쳐다봤다.
“한 가지만 약속해요.”
“뭐든지 들어줄게요.”
“내일 고모님 만나면요”
서연이 바짝 끌어안자 달콤한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집으로 각자 가기.”
“응. 약속할게.”
“그리고, 나 말이에요.”
서연의 말랑한 뺨이 권율의 목덜미를 비비며 속삭였다.
“솔직히 말하면 아까 할아버님 댁에서 율이 씨 정말 보고 싶었어요. 진심으로.”
작게 속삭이는 서연의 숨결이 고단했던 하루를 말해주고 있었다.
“미안해. 서연아.”
“율이 씨 잘못 아니니까. 어쩔 수 없는 걸로 미안해하지 말아요.”
“앞으로는 이런 일 안 생기게 더 잘할게.”
권율이 슬쩍 팔을 내려 서연의 뺨에 입을 맞췄다.
“말만 들어도 좋다.”
“아까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치는 줄 알았다고.”
“더 해줘요. 다정한 걱정.”
“밤새도록 해줄게. 이제 집으로 가도 되지?”
권율은 서연의 얼굴에 빠짐없이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서연이 까르르 웃자, 권율은 그녀의 웃음을 대답으로 알아들었다.
“오늘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진짜?”
“응. 아버님처럼 우리 공주라고 부를까?”
“으. 그건 싫어요.”
서연이 권율의 어깨에 얼굴을 감추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권율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런데 율이 씨. 말투가 왜 그래요?”
사실 권율은 애정 표현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선을 지켰다. 한층 과감해진 권율의 말투에 서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 오늘은 그러고 싶어서. 혹시 불편해?”
“아니. 색다르고 좋아.”
“그래? 난 우리 서연이만 좋은데.”
정답 같은 권율의 대답에 서연이 피식하고 웃었다.
“빨리 가요. 우리.”
***
“뜨거워요?”
“아니요. 괜찮아요.”
서연은 자신이 만든 권율의 셔츠를 빳빳하게 다렸다.
재숙을 만나기 전 호진 커플을 먼저 보기로 약속해서인지, 아직 열기가 남아 있는 셔츠를 식힐 시간도 없었다.
아무래도 재숙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두 사람과 미리 말을 맞춰야만 했다.
“서 변호사님이 뭐래요?”
“특별한 말은 없었고,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요.”
힐끔 시간을 확인한 서연이 권율의 셔츠 단추를 함께 잠그며 말했다.
“혹시 내가 고모님에 대해 알아야 할 거라도 있어요?”
“솔직해도 돼요?”
“어젯밤 여러 번 약속했잖아요. 앞으로 무슨 일이든 같이 하기로요.”
서연이 지난밤의 약속을 거론하자 권율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요.”
“돈이요?”
“고모는 서희 형과는 좀 달라요. 할아버지 재산에 관심이 많으세요.”
호진의 말로는 분명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법무법인 집안이라고 했는데. 중견기업 못지않은 재력에도 돈에 관심이 많다니.
‘하긴 가진 게 많을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
그러다 문득 권율의 재산이 그의 할아버지 다음으로 많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재숙에게는 돈이 더욱 민감할 수 있는 문제였다.
“어! 이러다 늦겠다. 일단 가면서 얘기해요.”
서연이 권율의 어깨 끝을 반듯하게 정리해주며 말했다.
“잠깐만요. 서연 씨.”
잔뜩 분주해진 서연이 클래식한 핸드백을 어깨에 메며 쳐다봤다. 그러자 권율이 느긋하게 양팔을 벌렸다.
“뭐 잊은 거 없어요?”
“이러다 진짜 늦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서연은 권율의 팔 안으로 쏙 들어갔다.
활짝 열려있던 커다란 팔이 순식간에 닫히자 촉촉하고 달달한 입맞춤이 비처럼 내렸다.
“서연 씨. 우리 파이팅해요.”
“걱정 마요. 난 이미 마음의 준비가 끝났으니까.”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사랑해. 율아. 아주 많이.”
서로가 눈을 마주하자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각오를 다지는 입술 도장을 콩콩 찍은 두 사람이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호텔로 향하는 길.
서연은 권율이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성공 신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남대문 시장에서 사업자금을 마련하셨다고? 뭔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자수성가한 어른들을 자주 대면해서일까.
서연은 그의 할아버지에 대해 특별히 조심해야 할 부분과 공략할 부분을 머릿속에 새겼다.
어떻게 하면 점수를 딸까에만 몰두한 사이. 어느새 호텔 입구가 보였다.
“잠시만요.”
권율은 도어 담당 직원에게 손짓하고는 재빨리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조수석 문을 손수 열어줬다.
“서연 씨. 지금부터 내 손 놓지 마요. 고모 앞에서도요.”
어쩜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말만 하는지. 서연은 입매를 느슨하게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호텔 일식당으로 향했다.
온통 편백 나무로 장식된 식당. 안내를 받아 들어간 제일 안쪽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서연아! 율이 씨. 왔어요?”
반갑게 인사하는 호진에게 서연은 손깍지를 낀 손을 살살 흔들었다.
“뭐지. 이 적응 안 되는 달콤한 분위기는.”
“우리 율이 씨가 이렇게 하자고 해서…….”
서연의 뺨이 발그레해지자 호진이 ‘풉’소리를 내며 웃었다.
“율이 씨. 우리 씩씩이 한서연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서연 씨는 원래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데요.”
너무도 진지한 권율의 대답에 호진이 입을 다물지 못하자 서희가 불쑥 나섰다.
“왜, 부러워? 손깍지라면 난 두 손도 끼워줄 수 있는데. 이렇게.”
서희는 권율에게 질세라 호진의 손을 빈틈없이 잡았다. 평소와 너무도 다른 서희의 모습에 권율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형. 할아버지께는 언제 인사드려?”
“다음 주 토요일 점심. 어머니가 김 여사님 떠드는 것 싫다고. 할아버지만 우리 집으로 오시기로 했어.”
아무래도 김 여사의 훈수가 거슬리는 재숙이 미리 손을 쓴 모양이었다.
“역시 고모님이 현명하세요. 저 어제 김 여사님이랑 싸울 뻔했잖아요.”
권율이 머릿속으로 석구와의 디데이를 정하는 사이, 서연이 하소연을 시작했다.
생각할수록 분노가 솟구치는 상황을 빠짐없이 설명하자, 호진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네가 그런 행동을 참아줬다고?”
“나한테 그러는 건 참겠는데. 어머님께 그러는 건 진짜 못 참겠더라. 얼마나 험하게 그러는지.”
십 분만 더 있었어도 폭발할 뻔했다는 서연의 말에 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 그 김 여사라는 분. 믿을만한 거 맞아?”
“으음?”
“할아버지 수발들려고 온 사람이라며. 신원조회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서류 같은 건 확인했냐고.”
서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권율을 빤히 쳐다봤다. 할 말이 없기는 권율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범죄자만 상대해서 의심병이 있는지는 몰라도. 할아버지 곁에 있는 사람인데 더 철저하게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호진아, 네 말 듣고 보니까. 김 여사님 말투며 행동, 좀 수상하긴 해.”
서연은 가족들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김 여사의 행동이 뭔가 석연치 않았다.
“오빠.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검사인 호진이 나서자 두 남자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율이 씨. 나도 호진이 말에 동의해요.”
“그럼 이번에 할아버님 만나면 내가 말씀드릴까?”
“그래! 호진아. 네가 한번 말씀드려 봐. 그 김 여사라는 사람이 우리 어머님을 막 구박했다니까. 어이없어서 정말.”
말을 하면 할수록 어찌나 화가 나는지. 서연은 김 여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안 되겠다. 내가 아예 할아버지 댁으로 가야겠어. 김 여사를 직접 보고 몇 가지 물어보게.”
“그렇게까지 하려고?”
“오빠. 난 말이야. 호흡만 달라져도 거짓말인지 딱 알 수 있어.”
호진이 수사 기법 몇 가지를 간단하게 설명하자 서연이 격하게 호응했다.
“역시 우리 여호진 검사님. 엄청 든든하다.”
서연은 김 여사의 범죄를 단정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가족도 아니면서 분란을 조장하는 김 여사에게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고 싶을 뿐이었다.
“김 여사 건은 다음 주 토요일에 확인해보는 걸로, 이만 마무리할까?”
시원시원한 서연의 정리에 호진이 자신만 믿으라며 심장을 쿵쿵 두드렸다.
그동안 권율의 가족은 김 여사가 불편해도 석구를 생각해 애써 참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처리되자 두 남자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호진 씨. 부탁이 있는데요. 할아버지 만나면요.”
권율이 덧붙일 말을 꺼내려는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고상한 옷차림의 재숙이 서 있었다.
“권율. 넌 여기 왜 왔어?”
“오셨어요. 고모님.”
재숙의 예리한 시선이 서연에게로 향하자 권율이 슬쩍 앞을 가렸다.
“형이 알려줘서요.”
“넌 뭐하러 그런 걸 말해.”
“이렇게 주르륵 세워 놓으실 거예요? 어서 앉으세요.”
서희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 재숙은 허리를 숙인 서연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그러고는 호진을 향해 따스한 시선을 보냈다.
“어머님. 잘 지내셨어요?”
“그럼. 우리 호진이도 잘 있었니?”
재숙의 상반된 대우에 권율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권율의 손등에 핏줄이 서자 서연이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오늘 베이지색이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요.”
“안 그래도 네가 저번에 선물한 브로치를 달고 나올까 하다가. 너무 꾸민 것 같아서 말이야.”
호진이 서연을 쓱 쳐다보고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아. 그 브로치요. 마음에 드세요?”
“넌 일도 잘하는 애가 어쩜 그렇게 센스가 넘치니.”
“센스 하면 또 우리 한서연이죠. 그거 서연이가 골라 준 거예요. 제가 그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어서요.”
평소 자매처럼 아옹다옹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건 호진이뿐이었다.
서연은 가슴 한구석이 찡해져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머님, 우리 서연이는요. 어려서부터 봐왔던 가족 같은 친구고요.”
호진이 서연을 지그시 바라봤다.
“정말 말할 수 없이 착하고, 의리가 넘쳐요. 그건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
“저 시험 준비하느라 힘들었을 때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제 투정 다 받아줬고요.”
그때가 생각나는지 호진이 잠시 숨을 골랐다.
“잘 먹어야 공부도 잘된다고, 올 때마다 꼭 소고기 사줬어요. 그리고 변시 시험장까지 직접 데려다준 사람도 서연이였고요.”
서연은 이미 다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호진이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다니.
“어머님. 이렇게 착한 서연이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호진의 간절한 부탁이 길게 이어지자, 알 수 없는 재숙의 시선이 서연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작은 균열을 감지한 권율이 나섰다.
“고모. 저도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권율.”
“엄마. 나랑 호진이랑 연결해준 사람이 서연 씨라니까요. 은인이라고요. 은인.”
“정말. 왜들 이래.”
재숙이 시선을 피하자 권율이 서연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