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누가 누가 더 잘하나
(100/130)
100. 누가 누가 더 잘하나
(100/130)
100. 누가 누가 더 잘하나
2023.01.15.
나란히 일어난 권율과 서연은 재숙의 양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연 씨.”
권율의 눈짓에 서연이 재숙의 손을 슬며시 붙잡았다.
“하. 부담스럽게. 정말.”
그러자 이번에는 권율이 재숙의 손등을 포갰다.
“고모. 저 서연 씨 없으면 안 돼요.”
“율아. 벌써 확정 짓지 마. 앞으로 너한테 시간이 얼마나 많은데. 안 되긴 뭘 안 돼.”
“절 이렇게 만든 사람을 굳이 따지자면 형이에요.”
권율이 서희를 힐끔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죽일 놈이죠. 뭐. 술도 안 마시는 애를 호텔로 데려갔으니까요.”
“…….”
“거기다 뻔뻔하게 율이가 프리랜서라고 서연 씨한테 거짓말도 했어요.”
서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능청스럽게 연기하자 재숙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하. 차라리 이번 기회에 내가 율이 앞길을 망친 원흉이라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릴까 봐요.”
“서희야!”
“고모. 제가 이제껏 어른들 말씀 어긴 적 없잖아요. 제발요.”
서연은 두 남자의 불꽃 연기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러다 단단히 힘을 주던 재숙의 손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뭔가 될 것 같은데?’
변화를 감지한 서연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감정을 잡았다.
“만약 할아버지가 끝까지 반대하셔도 전 할 거예요. 아시잖아요. 아빠 아들이 어디 가겠어요?”
“권율! 너 진짜 이럴래.”
“그러니까요. 고모. 반대만이라도 하지 말아주세요.”
권율은 논리적인 설득이 안 먹히면 감정에 호소하고, 그것도 별 효과가 없으면 재빨리 태세를 전환했다.
“얼마나 좋아요. 형수님이랑 우리 서연 씨랑 절친이니까. 집안에 큰소리 날 일도 없고요.”
어찌나 솔깃한 말들만 내뱉는지, 권율의 말을 듣고 있는 모두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결혼으로 갈 거라면, 고모가 처음부터 도와주세요. 네?”
“율아. 너 아직 어려. 앞길이 창창한데 뭐 이렇게 서둘러.”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생각도 어린 건 아니에요.”
재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서연이 슬며시 나섰다.
“고모님. 이 정도라면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다’라는 게 있으실까요?”
서연은 사업가답게 재숙이 실리를 따질 기회를 줬다. 정확히 파악했다면 지금 재숙의 마음이 흔들렸으니까.
“그래요. 고모. 원하는 게 있으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원하는 거?”
“네.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뭐라도 해볼게요.”
권율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숙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연과 권율을 번갈아 쳐다볼 뿐 서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정 그렇다면 말이야.”
말을 하다 말고 재숙이 살짝 머뭇거렸다.
“이건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다 들어줄 기세로 서연과 권율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은 우리 서희 먼저! 서희가 너보다 훨씬 형이고, 우리 집도 결혼은 처음이니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서연과 권율이 한목소리로 수용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청담동 집 말이야.”
“여기서 청담동 집이 왜 나와요?”
서희의 물음에 재숙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넌 좀 가만히 있어.”
“왜 가만히 있어요. 뭔데요?”
“내가 아버지께 서희 결혼 선물로 증여해달라고 할 거야. 율이 네가 좀 거들어줬으면 좋겠다.”
“엄마, 그건 저랑 얘기해요. 왜 율이한테 부담을 주세요.”
재숙은 아들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연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율이 물려받을 재산 뺏는 것 같아 불쾌해요?”
“아닙니다. 고모님. 할아버님 재산이야 저와 상관없습니다. 게다가…….”
서연은 호진과 눈을 마주하며 입꼬리를 쓱 올렸다.
“우리 호진이가 신혼을 좋은 곳에서 시작하면 좋죠.”
“진심이에요?”
“그럼요. 저는 호진이가 평생 행복하길 바라니까요.”
철없던 시절에 만났던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니. 서연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래서 호진이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는 걸 축하할 일이지, 질투할 일이 아니었다.
“한서연. 너 진짜…….”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진심이어서일까. 호진은 턱을 복숭아 씨앗처럼 구기며 울먹였다.
“어머님. 제가 진짜 효도할게요. 우리 서연이 좀 도와주세요. 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호진이 재숙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애원했다. 그러자 서연도 덩달아 눈시울을 붉혔다.
“나 참. 못 살겠네. 정말.”
재숙의 양옆에는 권율과 서연이, 등 뒤에는 호진이. 그리고 정면에는 서희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덫에 갇힌 사람처럼 재숙은 어쩔 줄을 몰랐다.
“서로 원하는 게 분명한데 못 할 것도 없어요. 고모.”
권율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청담동 집이요. 할아버지께 말씀드릴게요. 그 대신.”
“말해.”
“제가 할아버지와 담판을 짓기 전과 후요.”
이미 마음속으로 디데이를 정한 권율이 일정을 덧붙이며 말했다.
“김 여사님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도록 고모가 서연 씨를 감싸주세요.”
짧은 한숨을 내쉰 재숙이 서연을 훑어 내렸다.
“율아.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원하는 건. 서연 씨, 딱 하나예요.”
“허. 권재형 아들 아니랄까 봐. 쓸데없이 닮아서는.”
커다란 권율이 재숙의 어깨에 상체를 기울였다.
“고모도 우리 서연 씨한테 곧 반하실 거예요. 너무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맞아요! 어머님.”
호진의 외침에 재숙이 더 큰 한숨을 쏟아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말씀하세요.”
“아버지께는 서희 때문에 만났다고 하지 마. 괜히 노여움 타셔서 집은커녕 서희만 미운털 박히니까.”
재숙은 마지막까지 철저한 입단속을 주문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말씀 안 드릴게요.”
“저도요. 고모님.”
“아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일단 알겠어.”
드디어 재숙의 허락이 떨어지자 잔뜩 신이 난 호진이 제 자리에서 콩콩 뛰었다. 그러자 권율과 서연도 재숙을 샌드위치처럼 안아버렸다.
화들짝 놀란 재숙이 서희를 쳐다보자 그가 엄지를 쓱 들어 올렸다.
달뜬 감정이 썰물처럼 지나가자 재숙이 말했다.
“서희야. 넌 율이 데리고 들어가. 우리 여자들끼리 얘기 좀 하게.”
“서연 씨는 제가 데려다줘야 하는데요.”
권율이 서연을 보호하듯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도와주기로 한 마당에 내가 서연이 구박이라도 할까 봐?”
“혹시 모르잖아요. 아까부터 형수님한테만 잘해주시고. 우리 서연 씨한테는…… 흡!”
훈훈한 분위기에 방심하고 있던 서연은 그의 폭탄 발언에 얼른 입을 막아버렸다.
“율이 씨. 왜 그래요.”
서연은 그의 까만 눈동자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그에게 눈치를 챙기라는 말을 덧붙이며, 어색한 미소로 얼버무렸다.
“전 좋아요. 고모님. 안 그래도 율이 씨는 집에 가서 공부한다고 했어요.”
서연이 멋쩍은 웃음으로 상황을 수습하자, 그만 나가라는 재숙의 명령이 떨어졌다.
“고모. 우리 서연 씨요.”
“여기 호진이도 있는데. 뭘 걱정해.”
“그래요. 율이 씨. 나 정말 괜찮아요.”
서연이 빨리 나가라며 손을 휘휘 내젓자 권율이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운전 조심해요. 알았죠?”
“알았어요. 이따 호진이랑 같이 갈게요.”
“서연 씨. 꼭 전화해요.”
뭐가 이렇게 불안한지. 권율은 서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자꾸만 머뭇거렸다.
“야. 권율! 빨리 가자. 호진아. 엄마한테 맛있는 거 많이 사달라고 해.”
서희와 호진이 쿨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에도 권율은 서연의 손을 놓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서희에게 끌려 나갔다.
“우리, 분위기 좀 바꿔볼까?”
“고모님. 셀럽들이 자주 가는 카페 좀 가보실래요?”
“카페?”
서연은 호진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고는 딸이 없는 재숙의 팔짱을 양옆에서 사이좋게 꼈다.
***
“도대체 뭘 사려고 복잡한 토요일에 여길 와.”
백화점에 가자는 권율의 말에 서희가 툴툴거리며 따라나섰다.
“반지.”
“반지?”
“형은 프러포즈 안 할 거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듯, 안 그래도 하얀 서희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뭐! 벌써?”
“결혼 날짜 잡기 전에 프러포즈부터 해야지. 안 그래?”
옳은 소리만 내뱉는 권율의 말에 서희는 반박할 수도 없었다.
“넌 그런 계획이 있으면 형이랑 상의해야지. 서연 씨만 받고 우리 호진이는 못 받으면. 내가 뭐가 되냐?”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서희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래서 지금 말하잖아. 내가 디자인 몇 개 봐뒀는데.”
“하. 이 철두철미한 녀석. 어디로 가면 돼. 빨리 앞장서.”
중요한 걸 빼먹을 뻔한 서희가 조급해하자 권율이 유명 명품매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제일 클래식하니까. 형도 참고해.”
권율은 일전에 커플링을 고르면서 이미 보석의 세계에 입문한 거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최고의 다이아몬드 브랜드와 대표 라인을 줄줄이 읊어댔다.
시험 범위를 착각해 급하게 벼락치기를 하는 것처럼 서희는 권율이 들려주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각양각색의 보석들로 가득한 매장 안.
권율은 예행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따로 떨어져 있는 장식장으로 향했다. 서희는 권율을 놓칠세라 그의 넓은 어깨만 쳐다보며 뒤따랐다.
“프러포즈용 반지 좀 보려고요.”
“선호하는 디자인이 있으실까요?”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이랑, 쿠션 컷이요. 소재는 플래티넘에 2캐럿 이상이요.”
권율은 마치 본사 직원처럼 점원이 꺼낸 반지 말고도 제품명을 따로 불러줄 정도였다.
‘얘는 뭐 이렇게 능숙해.’
서희는 점원과 거리낌 없이 대화하는 권율을 보며 그의 철저한 준비성에 내심 감탄했다.
“형. 마음에 드는 거 있어?”
“어? 어. 이거?”
서희의 손가락 끝을 지그시 바라본 권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별로야?”
“형수님한테는 이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권율은 호진에게 어울릴 만한 스타일을 추천하며 서희의 의견을 물었다.
서희는 자신이 고른 것보다 권율이 고른 게 더 예뻐 보이자, 점원을 쓱 쳐다봤다. 그러자 점원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중요한 문제 하나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율아. 잠깐만. 얘기 좀 하자.”
재빨리 양해를 구한 서희가 권율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 뭐 잘못됐어?”
“율아. 너 얼마짜리 할 거야?”
“가격?”
“그래. 우리 호진이는 오빠랑 차별받고 자라서 뭐든지 공평해야 한단 말이야.”
아무래도 두 사람이 절친이다 보니, 비교당하지 않으려면 반지 예산도 비슷해야 했다.
“난 제일 가운데 거랑 오른쪽 끝에 있던 거. 그게 마음에 들어.”
“하. 권율. 거기서 그 두 개가 제일 비싼 건데. 그걸 고르면 난 어쩌냐.”
“그렇다고 평생 하나뿐인 결혼반지 고르면서 눈치 볼 수 없잖아.”
권율이 이치에 맞는 말만 하자 서희가 버럭 짜증을 냈다.
“그럼 그 둘 중에서 너 먼저 골라. 우리 호진이는 손가락도 예뻐서 다 잘 어울리니까.”
“난 다른 매장도 한 번 더 가보고 싶은데.”
“어딜 또!”
권율이 손가락으로 건너편 매장을 가리키자 서희의 시선이 저절로 따라갔다.
“어! 저 사람.”
“응?”
“저번에 행사장에서 만났잖아. 현우네 회사 대표, 최민혁.”
순간 권율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