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 부정할 수 없는 현실 (103/130)


103. 부정할 수 없는 현실
2023.01.26.



 
보라의 시선이 저절로 민혁에게로 향했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자 보라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네가 우리 회사에 나와서 노력한 것처럼, 최 대표님한테도 진심을 보여드리라고.”

“진심이요?”

“그래.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서연은 빈주먹을 말아쥐며 보라의 용기를 북돋웠다.


“저, 한 대표님. 이게 무슨.”

난감한 표정의 민혁이 서연을 말리려는 순간.


“최 대표님. 보라가요. 알고 보니까 원준이 친구더라고요.”

조카의 이름이 나오자 민혁의 한쪽 눈썹이 씰룩였다.


“그러니까 보라가 사과할 기회를 주시면 어떨까요? 진지하게요.”

“그래도 갑자기 이러시면.”

평소 민혁이라면 단칼에 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하는 서연의 부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민혁이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보라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대표님. 죄, 죄…….”

보라가 말을 잇지 못하자 서연이 슬쩍 나서며 말했다.


“최 대표님. 일단 말이라도 들어주시는 건 어떨까요?”

짧은 한숨을 내쉰 민혁이 앉으라고 손짓했다.

사실 민혁도 보라의 열애설 조작이 괘씸했었다. 법무팀에 얘기해 법적 대응을 상세히 알아봤으니까.

하지만 주변의 열띤 축하를 접하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이유야 어찌 됐건 보라가 열애설을 내준 덕분에 서연과 진짜 연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나중에는 고맙기까지 했달까.


“보라야. 네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최 대표님께 설명해 드리고. 제대로 용서를 받자.”

어르듯 속삭이는 말에 보라가 고개만 끄덕였다.


“네가 솔직하게 나오면 최 대표님도 이해해주실 거야. 알겠지?”

“네. 언니.”

권율을 짝사랑하던 여자애를 무슨 수로 설득했는지. 서연의 특별한 능력에 민혁은 기가 막혔다.


‘어떻게 거절하지?’

민혁이 거절의 말을 생각하던 그때, 서연의 전화기가 울렸다.

눈으로 양해를 구한 서연이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김 실장님. 예빈 씨가 재킷 위에 벨트를요? 블랙이요, 브라운이요?”

통화를 하던 서연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제가 금방 내려갈게요. 예빈 씨보고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해주세요. 네.”

서연은 민혁과 보라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최 대표님. 전 방송 준비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말씀 나누세요.”

민혁이 서연을 붙잡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대표실 문을 잡아당겼다.


“보라야. 얘기 끝나면 집으로 가도 돼. 스튜디오 내려오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서연은 마치 어린 동생을 맡기듯 민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최 대표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서연이 사라져버렸다. 민혁은 신기루처럼 사라진 서연의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무슨. 하.”

민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보라가 또르르 눈동자만 굴렸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라고? 사과부터 할까, 설명부터 할까?’

보라는 서연의 조언을 먼저 떠올렸다. 그러고는 소파 위에 놓인 민혁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진보라 씨. 이만 나가셔도 좋습니다.”

나가라는 민혁의 말에 보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언니 말대로 DN에서 소송 걸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하. 어떡하지.’

입술을 꽉 깨물던 보라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대표님. 잘못했어요.”

“!”

보라가 민혁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민혁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저 원준이랑 친구거든요. 막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친구는 맞아요.”

“…….”

얼마나 긴장했는지. 무슨 말을 떠드는지 모를 만큼 보라의 이야기는 두서가 없었다.

게다가 땀이 흥건한 보라의 손바닥에는 작은 진동마저 느껴졌다.

보라는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열애설의 조작과정을 열심히 설명했다.


“율이가 언니만 좋다고 하니까,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민혁은 저도 모르게 보라의 마음에 공감했다. 요즘 자신의 머릿속에도 서연을 헤어지게 만들 방법만 가득했으니까.


“제 딴에는 대표님도 언니한테 마음이 있다고 확신했어요.”

“진보라 씨.”

“그래서 열애설을 내도 괜찮을 줄 알았어요. 아니 좋아하실 줄 알고…….”

정곡을 찌르는 보라의 말에 민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정말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보라의 눈물이 왈칵 쏟아지자 민혁은 슬그머니 손을 뺐다.

민혁이 손수건을 막 꺼내려는 순간.


“대표님. 진짜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돼요?”

민혁이 손을 뺀 것을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보라가 민혁의 손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각서를 쓰라고 하시면 쓸게요.”

“…….”

“대표님이 불러주는 대로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까 고소만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이라고 읍소하는 보라의 말에 민혁이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



“수고하셨습니다.”

“흠. 완판의 맛이란. 우리 한 대표님이랑 방송하면 할 맛이 난다니까요.”

카메라 불이 꺼지자마자, 같이 진행을 맡았던 쇼호스트가 한껏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예빈 씨가 고객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해서 그렇죠. 오늘 멘트 정말 좋았어요.”

두 사람이 전체 매진을 축하하며 덕담을 주고받는 사이. 김 실장이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김 실장님도 늦게까지 수고가 많으세요. 얼른 정리하고 갈까요?”

“그런데. 아까부터 진보라 씨가 안 보여요.”

방송에 정신이 팔려 보라를 미처 챙기지 못했다.


“연락도 없었고요?”

“전혀요.”

“집에 갔을지도 모르니까. 제가 연락해볼게요.”

서연은 허리춤에 고정한 마이크를 정리하며 말했다.


“바로 댁으로 가시는 거죠?”

김 실장의 차를 타고 와서인지, 그녀가 물었다.


“네. 그런데 남자 친구랑 같이 가려고요. 지금 로비에 있을 거예요.”

권율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서연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연애는 대표님이 하시는데. 제가 왜 이렇게 좋죠.”

“오랜만에 하는 연애라 제가 너무 유난스럽죠?”

“아니에요. 정말 보기 좋으세요. 뭐랄까. 훨씬 안정적으로 보여요.”

서연은 타인이 들려주는 솔직한 평가에 자신의 삶이 정말 달라졌는지 생각했다.

그러나 결론은 한 가지였다.


‘빨리 정리하고, 율이 씨한테 가자.’

권율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인지, 곧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서연의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다.

커다란 가방에 샘플을 쓸어 담고는 재빨리 대기실로 향했다.

서연이 핸드폰을 켜자마자 권율의 톡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천천히 와요.]

턱을 괴고 있는 곰돌이 이모티콘을 내려다보자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김 실장님. 이 가방은 제가 가져갈게요. 어차피 내일 촬영이 있어서요.”

서연은 방송한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커다란 짐부터 들었다. 들뜬 마음을 김 실장과의 수다로 가라앉히며 대기실을 나왔다.

바로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최 대표님이 대기실로 내려가요.]

밑도 끝도 없는 보라의 톡에 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세요. 대표님?”

“아, 아니에요.”

‘최 대표님이 날 만나러 갔다고? 그럼, 지금까지 같이 있었던 거야?’

의아해한 것도 잠시,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권율이 떠올랐다.

보라 일은 보라가 알아서 하겠지만, 권율이 민혁 때문에 불편해지는 건 싫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김 실장의 물음에 서연이 순간 뒷걸음질 쳤다.


“김 실장님. 아무래도 저는 계단으로 내려갈까 봐요.”

“짐도 있으시잖아요.”

“왠지 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최 대표님을 만날 것 같아서요.”

서연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김 실장이 얼른 짐을 뺏어 들었다.


“급한 거 아니니까, 이 짐은 제가 가져갈게요.”

“어, 감사해요.”

“그리고 최 대표님과 마주치면 적당히 둘러댈게요.”

척하면 착 하는 사이라 그런지, 김 실장은 서연이 매몰차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민혁과의 사이에는 회사가 끼어 있었으니까.


“김 실장님. 저 먼저 갈게요.”

인사를 건넨 서연이 비상구 문을 재빨리 열었다.

쫓기는 신세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서연의 잇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불편한 대면보다 몸이 불편해지는 게 훨씬 나았다.


“암튼 여러 가지로 사람 귀찮게 해. 정말!”

돌고 돌아도, 또 나타나는 계단. 하이힐을 신은 서연의 발가락에는 감각조차 없었다.

게다가 다리가 어찌나 후들거리는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힘들어. 하. 배고파.”

방송하는 날이면 배가 아플까 봐 일부러 굶어서인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원치 않는 운동 때문인지.

마치 놀이기구를 탄 사람처럼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러다 잔머리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리자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흐. 다 왔다.”

서연은 어깨를 늘어트린 채 육중한 철문을 힘겹게 잡아당겼다.

로비를 비추는 강한 불빛에 서연의 시야가 순간 흔들렸다.


“서연 씨?”

엘리베이터가 보이는 곳을 서성거리던 권율이 서연을 먼저 불렀다.


“율이 씨. 빨리…….”

숨이 턱까지 차오른 서연이 말을 잇지 못하자 권율이 재빨리 다가왔다.


“왜, 비상구에서 나와요. 무슨 일 있어요?”

권율은 서연의 어깨에 위태롭게 걸린 가방을 얼른 가져갔다. 그래도 서연의 몸이 휘청거리자 허리를 받치며 물었다.


“안색이 창백해요. 어디 아파요?”

“아니, 계단을…… 너무 빠르게 내려왔더니. 어지러워서요.”

자꾸만 눈앞이 흔들리자 서연이 권율의 팔을 꼭 붙잡았다.


“주차장까지 안고 갈까요?”

“아직 홈쇼핑이라 사람들 눈도 있고. 곧 괜찮아질 거예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서연의 손끝이 덜덜 떨리자 권율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어깨에 손 올리는 건 괜찮죠? 나한테 완전히 기대요.”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권율의 커다란 팔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저절로 편안해지는 익숙한 향, 안정감이 느껴지는 그의 가슴, 거기다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는 손의 온기.

서연은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힘들어서 어떡해요. 엘리베이터에 아무도 없으면 차까지 안아줄게요.”

뺨에서 울리는 다정한 목소리가 좋아 서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밥은 먹었어요?”

분명 어제도 만났었는데. 못 본 사이 얼굴이 반쪽이라는 권율의 걱정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일단 차에 가서 엄마가 싸준 간식부터 먹어요.”

허전했던 속이 말만으로도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서연 씨. 엘리베이터 왔어요. 천천히 걸어요.”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대하듯 권율은 서연의 발끝만 쳐다봤다.


“우리밖에 없는데 안아줄까요?”

“율이 씨. 힘들잖아요.”

“전혀요. 난 서연 씨를 안아줄 수 있어서 행복해요.”

이렇게 예쁜 말만 하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

서연이 발꿈치를 올려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 율아.”

시선이 얽히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사랑해. 서연아.”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린 권율이 서연의 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한 대표님.”

스르륵 열린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민혁이 보라와 함께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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