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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완벽한 패배 (104/130)


104. 완벽한 패배
2023.01.29.



 
민혁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머릿속으로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것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은 천지 차이였다.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던 장면을 이렇게 맞닥트리다니.

민혁은 할 수만 있다면 권율을 멀리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지금 머릿속으로는 더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서연의 표정이 이미 자신의 완벽한 패배를 선언하고 있었다.

민혁이 알고 있던 서연은 항상 도도했고, 때로는 심드렁해진 고양이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권율과 함께 있는 그녀는 너무도 달랐다.

눈빛은 생기가 넘쳤고, 그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끝에도 사랑이 담겨 있었다.

지금껏 뭘 했던 걸까.

서연과의 특별한 인연과 배경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색다른 경험이 이렇게 만든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여지도 주지 않는 저 여자를 기어코 갖고 말겠다는 욕심 때문일까.

민혁은 자신의 쓸데없는 욕망에 모든 것이 매몰된 기분이었다.


“……언니.”

보라의 부름에 대답한 건 권율이었다.


“진보라. 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데리고 왔어요.”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서둘러 내렸다.


“보라가 최 대표님께도 사과하는 게 맞을 거 같아서요.”

다정한 귓속말을 속삭이듯 서연은 보라가 온 이유를 권율에게 설명했다.

민혁은 그런 서연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네가 아직 최 대표님이랑 있는 줄 몰랐어.”

“언니 방송 끝날 때까지 기다리느라고요.”

서연은 민혁을 힐끔 쳐다볼 뿐 용서의 여부를 묻지 않았다.


“모범 불러줄게. 타고 가.”

보라는 곁눈질로 민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밤도 늦었는데. 타지 그래.”

시간을 확인한 서연이 보라에게 재차 권했다.

그래도 보라가 여러 번 거절하자 서연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더 하면 잔소리 같고. 집에 도착해서 톡이라도 보내.”

서연의 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보이는지 그녀의 시선은 권율과 보라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한서연이라는 사람에게 나는 이런 존재였구나.’

그동안 모른 척 해왔던 현실이 맨얼굴을 드러내자, 민혁은 혼자서만 투명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율이 씨.”

서연은 권율을 올려다보며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권율이 손을 빈틈없이 고쳐잡으며 말했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대표님.”

민혁은 인사하는 권율의 어깨 끝을 바라봤다.


“다음 회의에 뵙겠습니다. 최 대표님.”

시선이 닿자마자 빠르게 도망치는 서연의 눈동자를 민혁이 뒤쫓았다.

민혁은 서연에게 당장 묻고 싶었다.

권율은 되고, 자신이 안 되는 이유를.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서연 씨.”

민혁의 입에서 서연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권율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저한테 얘기하세요.”

“뭘. 너한테 얘기해?”

“지금 서연 씨 컨디션이 별로예요. 계단으로 내려오다가 쓰러질 뻔했다고요.”

계단이라니.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굳이 왜.

그러다 문득 서연의 행방을 얼버무린 김 실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나랑 마주치기 싫어서. 계단으로?’

자신을 피해 도망갔을 서연의 모습이 떠오르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허탈해졌다.

민혁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세 사람의 시선이 민혁에게로 쏟아졌다.


“왜 그러세요. 무섭게…….”

심상치 않은 민혁의 상태에 보라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나 서연은 지켜보기만 할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서연 씨.”

민혁의 부름에 서연은 대답 대신 눈썹을 씰룩 움직였다.


“율이가 없었다면 우리 사이가 달라졌을까요?”

“대표님!”

권율이 항의하듯 나서자 서연이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알고 싶으세요?”

“이젠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회사 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사적인 것에 공적인 일을 결부시킬 만큼 쓰레기는 아닙니다.”

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율이 씨. 보라랑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요?”

권율의 까만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다 있는 자리에서 말하기에는 최 대표님 입장도 있고요. 부탁할게요.”

서연은 권율을 안심시키듯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권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서 있던 보라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권율과 보라가 멀어진 자리. 서연이 민혁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사실 전, 최 대표님이 왜 이러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곧 부정적인 말이 쏟아질 걸 알면서도, 민혁은 서연과 마주 보는 이 순간이 좋았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판단이 안 서고요.”

“…….”

서연은 화려한 배경에 혹해 실수했던 경험과 연애를 쉬었던 이유를 짧게 설명했다.


“그래서 사람 보는 눈이 좀 달라졌습니다.”

민혁의 머릿속에서는 그만 정리하라고 난리인데, 마음은 바른말만 쏟아내는 서연에게 흔들렸다.


“장담하는 건 우습지만, 최 대표님과의 관계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율이 씨가 없었어도요.”

“어째서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저와 맞지 않으니까요.”

맞지 않는다는 서연의 말이 민혁의 귀에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말로 들렸다.


‘내가 서연 씨의 실패한 연애를 답습했구나.’

그녀가 말한 화려한 배경으로도 극복할 수 없었다는 오만한 일방통행을 자신이 저질렀으니까.

민혁은 그동안의 무모했던 행동을 떠올리며 버거운 감정에 휩싸였다.


“저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최 대표님을 나쁘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서연은 마지막까지 배려를 잊지 않았다.


“이제 충분한 이유가 됐을까요?”

완벽하지만, 부끄럽지 않은 패배. 민혁은 서연에게 자신의 감정을 호소하거나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


“혼자서 잘난 척만 실컷 한 꼴이네요.”

“잘난 척하실 만해요. 일로는요.”

한층 무거워진 분위기에 서연의 농담이 가볍게 더해졌다.


“그동안 불쾌했다면 사과드리죠.”

“불쾌보다는 부담이라고 하겠습니다.”

민혁이 피식하고 웃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잘 부탁드립니다. 최민혁 대표님.”

서연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순간 민혁의 머릿속에 회의실에서 처음 악수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난 재수가 없었구나.’

기선제압이라도 하듯 서연의 손을 움켜쥐었던 기억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민혁은 작고 하얀 손을 내려다보며 느릿느릿 움직였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한서연 대표님.”

짧은 악수가 끝나자 서연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민혁은 서연의 뒷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끝인가…….”

“끝이죠. 그럼.”

어느새 다가온 보라가 훈수를 두듯 말을 얻었다.


“안 갔어?”

“제가 온 줄도 모르다니. 이제 보니까 대표님은 저보다 더하신 것 같아요.”

“뭐?”

안 그래도 용서해줄 때까지 버티던 보라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차였다.


“저처럼 십 년 넘게 짝사랑하신 것도 아니고, 언니랑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시냐고요.”

“그만 가라. 원준이 친구들이라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소송은요?”

확답을 듣기 전까지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보라가 민혁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한 대표님이랑 끝났는데, 무슨 소송이 필요하겠냐.”

“진짜요?”

팔을 뺀 민혁이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어디 가세요?”

“…….”

“저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

황당한 얘기에 민혁의 시선이 강하게 꽂혔다.


“혹시 술 마시러 가시게요?”

아예 입을 닫아버린 민혁이 성큼성큼 걷자 보라가 빠르게 따라붙으며 말했다.


“제가 술 사드릴까요?”

“까분다.”

“거절당한 사람들끼리 위로하면 좋잖아요.”

보라는 민혁이 대답을 하거나 말거나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얼마나 조잘조잘 떠드는지, 민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참다못한 민혁이 소리쳤다.


“그냥 소송 진행할까?”

“소송을 당하더라도 오늘은 술 마시고 싶어요.”

“율이가 왜 너랑 안 만났는지 알겠다.”

민혁의 공격에 보라의 어깨가 순식간에 움츠러들었다. 그러고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냐.”

“뭐라고?”

“상처를 후벼파야 속이 시원하시냐고요! 같은 처지끼리!”

이마를 짚은 민혁이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하, 조용히 가자.”

 

***

가지런해진 눈썹, 착시로 느껴질 만큼 더 높아진 콧대와 선명한 입술.

권율은 익숙한 이목구비가 어딘가 낯설어 보이자 서연의 사무실 거울을 빤히 쳐다봤다.


“율이 씨. 나 끝났어요.”

서연이 과감한 블랙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나자 권율의 시선이 하얀 어깨에 꽂혔다.


“어색해요?”

고개를 가로저은 권율이 서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니요. 너무 예뻐요. 촬영만 아니면 근사한 곳에 데려가고 싶어요.”

야경이 보이는 스카이라운지에서 와인을 함께 마시고 싶을 만큼 서연은 매혹적이었다.


“율이 씨도 이렇게 꾸미니까 너무 멋있어요.”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스치듯 뺨을 가져다 댄 권율이 귓속말을 속삭였다.


“호캉스요?”

눈매를 느슨하게 접은 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요. 어때요?”

“하아.”

“……싫어요?”

“아니요. 지금 당장 가고 싶어서요.”

시계를 힐끔 쳐다본 서연이 권율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러자 기다란 손가락이 서연의 등줄기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지금 내려가서 딱 한 시간만 찍고. 짐 챙겨서 가요.”

“좋아요. 그래도 이렇게 1분만요.”

고개를 돌려 서연의 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들이쉬는 숨결마다 채워지는 복숭아 향기. 촉하고 맞붙은 입술이 쪽하고 떨어질 때까지, 서연의 향기에 흠뻑 취했다.


“직원들 앞에서 손잡아도 돼요?”

“공식 커플 하기로 했잖아요.”

서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손등을 포근하게 덮었다.


“하, 좋다. 한서연 남자 친구.”

권율은 행복으로 꾸며진 가상세계에 들어간 듯 현실을 자꾸 확인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서연의 손을 붙잡고, 체온을 느끼고, 가벼운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낯선 촬영 현장에서도 단둘이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서연에게만 집중했다.


“율이 씨. 처음 촬영하는 거 맞아요?”

긴장했던 것도 잠시, 평소처럼 서연의 눈만 바라봤을 뿐인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작가님이 모델이냐고 물어서 얼마나 뿌듯했다고요.”

서연의 입에서 칭찬이 쏟아지자 괜히 멋쩍어졌다.


“다 끝난 거 맞아요?”

“어. 맞아요. 월요일에 사진 받으면 율이 씨한테도 보내줄게요.”

약속된 촬영이 모두 끝나고, 현장이 대충 정리되자 서연이 스르륵 손깍지를 껴왔다.

순간 목이 마른 듯 권율의 모든 것이 갈급해졌다.


“그럼 갈까요?”

권율은 무슨 정신으로 촬영장을 빠져나와, 짐을 챙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드문드문 나는 기억의 파편이 완벽해진 건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호텔에서였다.


“율이 씨. 이것 좀 봐요.”

A컷 사진 한 장을 미리 받아든 서연이 SNS에 올리며 말했다.


“방금 올렸는데 ‘좋아요’ 숫자 보여요?”

 

 
잔뜩 신이 난 서연이 사르르 웃자 권율의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서연의 뺨을 쓰다듬으며 주문 같은 말을 속삭였다.


“사랑해.”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숨을 쉬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끝도 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서연의 공식적인 남자 친구가 된 첫날 밤.

권율은 서연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지이이잉―.

커튼 사이로 비치는 어스름한 빛에 권율의 눈이 시계로 향했다.

아침 6시.


‘알람을 안 껐었나.’

권율은 서연이 깨지 않도록 몸을 돌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알람이 아닌 서희의 전화라니.

권율이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형.”

[율아…… 여기 좀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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