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엉뚱한 곳에서 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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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엉뚱한 곳에서 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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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엉뚱한 곳에서 터지다
2023.02.02.
권율은 잠든 서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지금?”
[응. 외숙모한테 말하지 말고, 조용히 할아버지 집으로 와.]
어딘가 모르게 다급한 서희의 목소리. 게다가 이른 시간에 할아버지 집으로 오라니.
권율은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쓰러지셨어?”
괜히 불길한 마음에 권율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서연의 눈이 동시에 떠졌다.
[아니야. 그건 아닌데. 잠깐만. 호진아! 여기.]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 시간에 호진까지 불렀을까.
[율아. 가능한 빨리 올 수 있지?]
“형. 나 지금 서연 씨랑 호텔에 있어. 바로 가도 30분은 걸려.”
[서연 씨랑 같이 있다고?]
서연의 이름이 나오자 호진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서희가 핸드폰을 손으로 막았는지,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순간 희미해졌다.
“무슨 일인지 알려줘야 나도 서연 씨한테 말을 하지.”
이른 아침, 서연을 호텔에 두고 갈 수 없었다.
거기다 서연을 집까지 데려줄 수 없을 만큼 다급한 일이라면 뭐 때문인지 설명이 필요했다.
[율아. 서연 씨만 괜찮다면 같이 와. 호진이가 그러는 게 좋겠다니까.]
“갈 땐 가더라도. 도대체 무슨 일이야?”
[김 여사님이, 아니. 그 여자가 귀중품을 훔쳐서 달아났어.]
생각지도 못한 일에 권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았어. 바로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설명을 기다리는 서연의 눈과 마주쳤다.
“할아버지 집에 가봐야겠어요.”
“무슨 일이에요?”
“김 여사님이 물건을 훔쳐서 도망갔다는데. 정확한 건 잘 모르겠어요.”
김 여사의 이야기가 나오자 서연이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권율도 알 수 없었지만, 서연도 묻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준비를 마치고, 빠르게 짐을 챙겼다.
호텔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정확히 40분 만에 석구의 집에 도착했다.
얼떨결이지만 서연과 함께 석구의 집에 들어가다니. 김 여사가 저지른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기분이었다.
어색하고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것도 잠시. 현관에 들어서자 집안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아침을 준비하는 시간인데도, 텅 빈 집처럼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딜 간 걸까?
권율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거실로 향했다. 그때 소파 너머로 호진과 눈이 마주쳤다.
“율이 씨.”
“형수님. 할아버지랑 형은요?”
“어. 율아. 서연 씨…… 왔어요?”
통화를 하느라 자리를 비웠는지, 서희가 방에서 막 나왔다.
간단하게 눈인사를 마친 권율의 시선이 소파에 누워 있는 석구에게로 향했다.
어제 아침 석구를 만났을 때만 해도 분명 기운이 넘쳤었는데.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눈을 가린 손등이 너무도 파리해 보였다.
반만 보이는 석구의 턱 끝이 덜덜 떨리자 순간 권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율이 씨.”
서연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권율이 석구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서연이 흐리게 웃었다. 자신은 괜찮다는 듯 서연은 석구에게 어서 가보라며 손짓했다.
권율은 호진을 쳐다보며 입 모양만으로 서연을 부탁했다. 호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권율의 발이 움직였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소파에 비스듬하게 걸터앉은 권율이 석구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석구는 대답도 없이 마른 입술만 적셨다.
“괜찮으세요?”
아무래도 물이라도 가져와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서연이 한발 빨랐다.
낯선 집의 주방이 처음일 텐데도 서연은 미지근한 물을 가지고 나타났다.
권율은 잔뜩 움츠러든 석구의 몸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구부정한 석구의 몸을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놓고 마른 입술에 물잔을 가져다 댔다.
“다치지 않으셨으면 괜찮아요.”
상처 입은 아이를 달래듯 권율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석구의 입가로 흘러내린 물이 권율의 바지를 적셨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힘없이 쓰러지는 석구의 등을 쓰다듬고는 다시 소파에 눕혔다.
권율은 석구에게 얇은 이불을 덮어주며 그의 다리를 부드럽게 주물러줬다.
모두가 똑같은 표정으로 석구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서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부르세요. 저희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차마 석구 앞에서 말할 수 없었는지. 서희가 방을 가리키자 모두 소리 없이 움직였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호진이 한숨을 쏟아냈다.
“내가 어제 너무 겁을 줬나?”
“어제 인사 와서 무슨 일 있었어?”
통 말이 없던 서연이 호진에게 물었다.
“뭐야. 자세히 좀 얘기해 봐.”
서연의 재촉에 호진이 어제 있었던 일을 길게 설명했다.
“거봐. 내가 이상하다고 했지? 우리 어머님을 대하는 행동이나 말투가 수상했다니까.”
“사람이 어쩜 그렇게 안면을 싹 바꾸냐.”
권율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김 여사의 성격이야 워낙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어머님이 잠깐 주방에 간 사이에 나한테 시할머니 예단이 어쩌고저쩌고. 막 그러는 거야.”
“김 여사가 사람 잘못 봤네.”
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상식적인 수준이었으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했어.”
“뭐라고 했길래?”
“명품 가방에 모피까지. 아주 브랜드를 대놓고 말하잖아.”
가족도 아닌 사람의 갑질이 호진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김 여사가 우리 어머님을 어려워하는 것 같길래. 일단 벼르고 있었지.”
호진의 다음 말이 궁금해 권율이 상체를 기울였다.
“어머님이 내 옆에 앉으시자마자 저번에 말한 서류 얘기를 쓱 흘렸어.”
“그래서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권율이 먼저 물었다.
“김 여사가 말을 얼버무리면서요. 입꼬리를 파르르 떨더라고요.”
누가 봐도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바람에 제 직업병이 제대로 발동했죠. 피의자 조사하듯 막 캐물었어요.”
간병인 계약서. 그리고 정식 등록을 위한 서류와 절차를 설명한 순간, 김 여사의 폭주가 시작됐다.
모든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자 권율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 여사가 너무 과민반응 하니까. 어머님도 황당해하시더라고요.”
“싸우셨어요?”
“아니요. 김 여사한테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뭐냐고 따지셨어요.”
결국 일이 이렇게 되려고 했는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작은 의심이 순식간에 현실이 되었다.
“김 여사는 사람을 의심한다고 난리. 엄마는 한 게 뭐 있냐고 난리. 아주 가관이었다.”
짧은 한숨을 내뱉은 서희가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어?”
“뭘 뭐라고 해. ‘이 사람아. 손주 며느리가 검사라 그래. 떼 줘.’ 하고 짧게 정리하셨지.”
김 여사의 실체를 이렇게라도 알게 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하지 못했던 과거를 원망해야 하나.
권율은 서연의 앞에서 민낯을 들킨 것 같아 그녀의 표정을 힐끔거렸다.
잠자코 듣고 있던 서연이 물끄러미 서희를 쳐다봤다.
“김 여사가 어떤 걸 훔쳐 갔어요?”
“돌아가신 할머니의 보석함이요. 오래되긴 했지만, 그 안에 든 건 다 고가예요.”
현금이나 골드바는 금고에 따로 보관하다 보니 김 여사의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석구의 책상 서랍에 들어 있던 유품에 손을 댄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서랍은 항상 잠겨 있잖아.”
“그러니까. 재주도 좋다는 거야. 열쇠 구멍을 아주 박살 내놨더라고.”
“사람들 눈이 있는데. 그게 가능해?”
큰 집에 일하는 사람만 여럿이었다.
아무리 새벽에 도망갔다고 해도 서랍을 망가트릴 정도의 소음이라면 충분히 들킬 수 있었다.
“도망갈 마음을 언제부터 먹었는지, 우리가 가자마자 사람들한테 속 시끄럽다고 하루 휴가를 준 모양이야.”
“정원사 아저씨까지?”
“응. 심지어 오 기사 아저씨까지.”
김 여사가 완전 범죄를 꿈꿨는지 몰라도. 비극적인 영화의 결말처럼 끝은 정해져 있었다.
예비 손주며느리이자 검사인 호진이 있었고, 대형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인 서희도 있었다.
“없어진 게 할머니 보석함뿐이야?”
“꼼꼼히 따져봐야겠지만, 가져가봤자 할아버지가 사준 명품 정도겠지.”
“내부 조력자가 있지 않을까?”
평소에도 화려한 걸 좋아한 김 여사는 석구를 꼬여내 수시로 고가의 선물을 받아냈다.
“가방이며 옷이며 한두 개가 아닐 텐데. 할아버지께 들키지 않고 다 들고 나갔다면 그것도 수상하잖아.”
예리한 권율의 지적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이랑 왔을 때요. 유독 불쾌하게 구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이 김 여사랑 친했을까요?”
지난 기억이 불쑥 떠오르는지, 서연이 의심이 가는 사람의 생김새를 설명했다.
“친한지는 모르겠는데 김 여사랑 비슷한 시기에 들어오긴 했어요.”
확정적인 건 아니지만, 누구라도 용의선상에 있었다.
“형. 경찰에는 신고했어?”
“아니. 할아버지가 워낙 말리셔서. 아직 못 했어.”
말리시다니.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충격을 받으신 건지, 부끄러우신 건지. 엄마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
사실 김 여사가 집에 들어올 때 다들 말렸었다.
그러나 막상 김 여사가 들어오자 석구의 체면을 생각해 다들 모른 척 넘어갔었다.
그런 사연 때문일까. 석구는 서희에게도 함구령을 내렸다.
‘그나마 이 정도에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만약 석구가 다쳤다거나 더 큰 일이 생겼다면? 생각만으로도 권율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오빠. 없어진 게 뭔지 파악하고, 주변 CCTV부터 확보하는 게 급선무야.”
전문가인 호진이 수사 방향을 짧게 브리핑했다.
“이 동네 위치상 걸어가긴 힘들었을 거야. 동선부터 확인해서 할머니 유품부터 찾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서연이 손을 들었다.
“역할을 나누는 건 어떨까요?”
“역할이요?”
“김 여사의 행방을 쫓는 건 전문가인 두 사람이 하고요.”
서연은 회사 대표답게 할 일을 효율적으로 분담했다.
“율이 씨랑 내가 할아버지를 돌봐드리자고요.”
“괜찮겠어요?”
석구에게 험한 대우를 받은 게 얼마 전인데. 서연은 부정적인 감정을 전혀 싣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힘을 보태고 싶어서요.”
서연은 권율의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오히려 위로했다.
사람이 하나부터 열까지 이렇게 멋있을 수 있다니. 권율은 서연을 눈에 담으며 한없이 감탄했다.
“형. 그렇게 하자.”
“할아버지가 제일 의지하는 사람이 너니까. 나야 그래 주면 고맙지.”
“그럼 할아버지 모시고 병원부터 갈게.”
권율이 허락을 구하듯 서희를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해야 할 일이 정해지자 다들 분주히 움직였다.
서희와 호진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은밀하게 알아볼 방법을 의논했다.
그 사이 서연은 VIP 입원실을 잡으려 친구에게 전화를 돌렸다.
조용히 방을 빠져나온 권율은 병원에 갈 짐부터 챙겼다. 고령인 석구의 심신이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 병원에 있을 생각이었다.
권율이 나갈 준비를 마치자 서연이 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율이 씨. 할 말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