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김 여사가 불러온 나비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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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김 여사가 불러온 나비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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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김 여사가 불러온 나비 효과
2023.02.05.
커다란 서연의 눈동자가 권율을 담뿍 담았다.
“병원까지 운전은 내가 할게요.”
하얗고 작은 서연의 손이 권율의 오른손을 잡아 올렸다. 그러고는 말랑한 뺨에 가져다 붙이며 작게 속삭였다.
“할아버님이 제 앞이라 많이 민망하실 거예요.”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면 사람의 진심이 나온다더니. 서연은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운전만 할 테니까. 율이 씨가 할아버님 위로 좀 해드려요.”
“서연 씨. 왜 이렇게…….”
권율이 서연의 뺨을 그리듯 어루만졌다.
“자꾸 반하게 해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서연에게 고맙고, 또 미안했다. 석구가 서연에게 어떤 실수를 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권율은 서연이 석구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연은 석구에 대한 나쁜 기억을 다 지운 사람처럼 의연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할아버님이 미웠어요. 하지만.”
권율은 미안한 마음에 서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피식, 서연의 옅은 숨이 권율의 가슴팍에 내려앉았다.
“아니에요. 내가 할아버님 입장이라도 그랬을 거예요. 7살은 좀…… 많긴 하잖아요.”
서연이 해맑게 웃어넘겼다.
“그래도 할아버님이 또 구박하면 내 편 들어줘요. 난 율이 씨밖에 없으니까.”
어리광을 부리듯 부탁하는 서연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권율은 서연의 어깨에 이마를 붙였다.
“평생 서연 씨 편 할게요.”
“나도요.”
서연의 짧은 대답에 취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온기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 평생 곁에 있고 싶은 사람. 권율은 서연의 앞에 다양한 수식어를 붙이며 고맙다는 말만 되뇌었다.
“우리 이제 병원으로 가요.”
서연이 석구의 가방을 번쩍 들며 말했다.
“나 먼저 차에 가 있을게요. 할아버님 모시고 천천히 나와요.”
서연은 석구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배려를 잊지 않았다.
“형. 이제 병원으로 출발할게.”
서연이 나가자, 권율은 막 통화를 끝낸 서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어. 율아. 어른들께는 일단 비밀로 하자.”
석구가 서희에게 얼마나 완강하게 말해뒀는지. 서희는 비밀이 새어 나갈까 꽤 신경 쓰는 눈치였다.
“응. 걱정하지 마.”
권율은 맹세라도 하듯 입술을 꾹 다물고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석구의 곁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권율의 커다란 손이 석구의 등을 받치고 상체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제가 업어드릴게요. 여기, 어깨 잡으세요.”
권율이 얼른 등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가벼웠었나.’
젖은 낙엽처럼 축 처진 석구의 몸을 손으로 받치며, 권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럴 거면서. 결국 이렇게 기대고, 의지할 거면서. 가족들에게 도대체 왜.
순간 권율의 머릿속에 유독 연희에게만 가혹했던 석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깊은 곳에 숨겨 놨던 어두운 그림자가 스멀스멀 올라오자, 상념을 떨쳐내려 앞만 보고 걸었다.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던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불행.
이번 일을 계기로 석구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행의 씨앗이 모두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래야 서연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있을 테니까.
“할아버지.”
“…….”
“서연 씨랑 병원에 같이 갈 거예요.”
읊조리듯 중얼거리는 권율의 목소리에 어깨를 끌어안은 석구의 팔이 스르륵 떨어졌다.
“서연 씨는 할아버지가 불편해하신다고 먼저 차에 가 있어요.”
권율은 서연이 한 말을 대신 전하듯 그녀가 꺼내놓은 진심을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서연 씨 앞에서 민망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석구는 권율이 대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철컥 소리를 내며 육중한 대문이 열리자, 커다란 SUV에서 서연이 점프하듯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뒷좌석 문을 재빨리 열어줬다.
권율이 천천히 석구를 내려놓자 서연이 말했다.
“율이 씨. 할아버님 쓰러지지 않게 옆에서 어깨 좀 잡아드려요.”
서연은 권율이 모든 준비를 마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러고는 운전석으로 돌아와 룸미러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천천히 출발하겠습니다.”
***
H병원 VIP 입원실 복도.
서연은 간병인 유니폼을 입은 중년의 여성과 대화 중이었다.
“아침은 얼마 드셨어요?”
“반 이상 비우셨고요. 10시에 정원도 한 바퀴 도셨어요.”
시계를 힐끔 쳐다본 서연이 말했다.
“전 2시에 일어날게요. 점심 드시고 천천히 오세요.”
서연은 점심시간을 전후해 매일 병원행이었다.
“아! 그리고 어머님이 할아버님 반찬 가지고 4시쯤 오실 거예요.”
석구의 입원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서연의 병원 생활도 점점 익숙해졌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입원한 첫날은 석구와 눈조차 마주하지 않았다. 나쁜 의도로 그런 게 아니라, 치부를 들킨 석구를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서연이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었다.
“율이 씨. 나랑 할아버님이랑 단둘이 있게 해줘요.”
“단둘이요?”
“네. 어차피 거동이 불편하신 것도 아니고. 정밀 검사만 천천히 받으시면 되잖아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권율은 그럴 필요 없다고 못을 박았다.
“내가 할아버님을 불편하게 할까 봐 그래요?”
“아니요! 오히려 반대예요. 할아버지가 서연 씨한테 상처를 줄까 봐요.”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서연은 석구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상관없었다.
김 여사를 쫓는 데 호진이 나섰다면 석구를 돌보는 건 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권율과 결혼하려면 석구와의 관계 개선은 필수였다.
어쩌면 이번 일이 절호의 기회일 수 있었다.
“할아버님이 퇴원하시는 날까지 바쁘면 한 시간, 여유가 있으면 세 시간까지 있을게요.”
“정말 괜찮겠어요?”
“내가 와 있는 동안 율이 씨도 할 일 해요.”
아직 집안에는 비밀이다 보니 권율이 온종일 석구의 곁을 지켰다.
권율의 표정이 매우 불안해 보였지만, 서연은 개의치 않았다. 다 생각해놓은 것이 있었으니까.
“나만 믿어요. 진짜 괜찮다니까.”
하지만 서연과 석구의 시간은 생각보다 더 어색했다.
하루아침에 친손녀처럼 굴 수도 없는 데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히 가까워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흘이 지날 때까지, 서연은 석구와 살갑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눈치껏 몸을 움직였다.
석구가 물병을 쳐다보면.
“할아버님. 여기 물이요.”
그러다 TV로 시선을 돌리면.
“뉴스 틀어드릴까요?”
마치 마음을 읽는 사람처럼 서연은 석구가 원하는 바를 예민하게 살폈다.
그럴 때마다 석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회사에 회의가 있어서요. 오후 2시에 오겠습니다.”
서연은 병실을 나설 때마다 미리 일정을 알려주고는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석구는 그런 서연을 빤히 쳐다볼 뿐, 그만 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권율이 없는 병실. 서연은 벽에 걸린 그림처럼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석구가 달라진 건 정확히 닷새가 지나서였다.
“여기, 작은 혹 보이시죠? 이게 암이 될 수 있는 씨앗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령인 석구를 샅샅이 검사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암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작은 종양 하나를 발견했다.
하늘이 도왔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김 여사가 도망친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일반 건강검진으로는 쉽게 잡아낼 수 없는 위치와 크기였다.
“골치 아픈 녀석을 일찍 발견해서 다행입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 수술하실 뻔했습니다.”
의료진의 말에 서연과 권율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술은 비교적 간단했지만, 그로 인해 석구의 입원이 더는 비밀일 수 없었다.
권율의 집안이 발칵 뒤집힌 건 둘째치고. 김 여사의 도망과 석구의 수술, 거기다 서희와 호진의 결혼까지.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서연은 석구와 둘만 있을 시간을 사수했다.
매일 출근 도장을 찍듯 서연은 석구의 병실을 찾았다.
“……왔니?”
일거리를 들고 병실에 들어서는 서연에게 석구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네? 아. 할아버님. 저, 네. 저 왔습니다.”
서연은 석구의 짧은 인사에 고장 난 로봇처럼 뚝딱거렸다.
그동안 대화의 물꼬를 트지 못했을 뿐이지. 눈을 마주하고, 말을 섞자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았다.
‘김 여사가 할아버님한테 어떤 영향을 끼쳤던 거야. 생각보다 나이스 하신데.’
옆에서 부정적인 말을 해대는 사람이 사라져서일까.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수술로 의기소침해져서일까.
꼬장꼬장하던 석구의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한테 무슨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나? 보라도 그렇고, 할아버님도 그렇고…….’
마치 독기 빼기 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서연은 달라진 석구의 모습이 영 낯설었다.
“이거 한번 먹어봐라. 내 입에는 달기만 하고, 원.”
석구는 재숙이 사다 준 고급 간식을 서연에게 슬쩍 건네거나.
“그림 그리고 싶으면 그려라. 종이는 여기 있다.”
서연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성수동에 ‘금성무역’이라고 있다. 거기가 원단 수입으로 잔뼈가 굵지.”
서연이 원단 때문에 골치 아픈 통화를 마치자 석구가 아는 체를 하며 말했다.
“내 이름 말하면 알아서 해줄 거다.”
“거길 어떻게 아세요? 옷 만드는 사람 아니면 잘 모르는 곳인데.”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 사업하는 사람치고 내 돈 가져다 쓰지 않은 사람 없다고.”
서연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했다.
‘금성무역’은 원단 수입사로 독보적이었지만,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그곳에서 원하는 원단을 넉넉하게 받으려면 시간이 꽤 걸렸다.
“할아버님 성함 말씀드리면, 제가 원하는 원단…… 구할 수 있어요?”
예비 손주며느리로 붙여줄까 말까 한 시할아버지의 찬스라니. 그저 호기롭게 지른 말이었다.
“전화 한 통 해주랴?”
“!”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어정쩡한 관계. 게다가 금기어라도 지정된 것처럼, 두 사람은 허락이라는 단어 자체를 회피했다.
그런데 급한 불을 꺼주겠다고?
서연의 이성이 순간 마비됐다.
“할아버님!”
서연이 석구의 손을 덥석 잡으며 가까이 다가앉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뭐를 말이냐.”
“‘금성무역’ 같이 깐깐한 회사를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하는 방법이요.”
마치 봇물이 터지듯 서연은 회사를 운영하면서 겪었던 고충을 쏟아냈다.
“정말 피가 마르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
“지금이야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지그시 바라보는 석구의 눈빛에 무장해제라도 된 걸까. 서연은 부끄러운 실패담을 술술 내뱉었다.
“하. 제가 ‘금성무역’ 때문에 말이 많았습니다.”
괜히 부끄러워져 서연이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석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우리 율이 말이다.”
순식간에 주제가 바뀌자 서연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렇게 좋으냐?”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서연의 고개가 먼저 끄덕였다.
“네. 좋아합니다. 아주 많이요.”
“그럼, 내가 제안 하나를 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