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솔깃한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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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솔깃한 제안
2023.02.09.
“들을 준비 됐습니다. 할아버님.”
서연은 석구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말해주는 게 오히려 좋았다. 어느 정도 허락하겠다는 전제가 깔려야 제안도 하는 거니까.
진지한 눈빛을 주고받은 것도 잠시. 석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젊어서 장사하다가 다리를 다쳤지. 걷는 게 불편하긴 하지만, 건강 하나는 자신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석구의 건강에 대해 서연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암이니 뭐니. 수술까지 하고 보니 마음이 영 편치 않구나.”
“담당 선생님이 경과가 좋다고 하셨잖아요. 더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게 아니냐.”
아무리 간단하더라도 수술은 수술이었다. 석구는 며칠 동안 식사를 못 할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율이가 어떤 손자냐.”
“일등…… 손자요.”
“그렇지. 나한테 손자가 여럿이라도. 아니 자식을 모두 합하더라도 우리 율이를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서연은 석구의 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한 것과 직접 듣는 것은 느낌 자체가 달랐다.
‘도대체 어떤 제안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시지?’
절대 해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미션이면 어쩌나. 슬슬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서연이 너한테 제일 걸리는 건 말이다.”
석구가 처음으로 서연의 이름을 불렀다.
“나이. 그거 하나뿐이다. 내년이면 네 나이가 서른이 아니냐.”
서연의 시간만 빨리 가는지, 벌써 스물아홉의 초가을이었다.
“네가 아무리 어려 보인다고 해도 신체 나이는 무시할 수 없는 거 아니겠니?”
“…….”
“율이 애미는 네 나이에 벌써 율이를 키우고 있었다.”
“!”
너무도 간단하고 명확한 말뜻에 놀란 것도 잠시. 서연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싶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기도 하지.”
“…….”
“율이가 그렇게 울며 애원할 때는 애써 외면했었는데 말이다.”
‘울며 애원했다고? 율이 씨가…… 나 때문에?’
처음 듣는 그 말에 서연의 가슴이 뜨겁게 녹아내렸다.
아쉬움인지, 후회인지 모를 석구의 시선이 허공을 갈랐지만, 서연의 머릿속엔 오로지 눈물이란 단어만 가득했다.
“몇 날 며칠을 병원에만 있어서 그런지, 마음이 아주 조급해지는구나.”
시선을 내린 서연이 손가락 끝만 쳐다봤다.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왜 그렇게 후회되는 일만 생각나는지, 율이 애미 일도 그렇고.”
석구는 독기가 빠진 게 아니었다. 건강에 자신이 없어지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내 나이에 오늘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게 없다만.”
“…….”
“그래도 이 늙은이 죽기 전에.”
유언 같은 석구의 말에 서연의 고개가 들렸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금방 퇴원하실 수 있으세요.”
서연의 위로에도 석구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
“우리 율이 아이는…… 한번 안아보고 죽고 싶구나. 그게 내 소원이다.”
아이. 그리고 소원이라니.
서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이가 마음을 먹는다고 바로 생기는 것도 아닌 데다,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사안이었으니까.
그러다 결혼해서 이미 엄마가 된 지연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림 같은 결혼을 하고. 귀여운 아이를 낳아 동화 같이 사는 친구.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행복한 크리스마스 영화처럼 권율과 그를 닮은 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에 온기가 돌자 서연은 저도 모르게 실현 가능성을 따져봤다.
‘결혼도, 아이도 미룰 생각은 없었잖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각자 생각하는 인생이 다르지만, 서연은 결혼과 아이는 필요하다는 주의였다.
“할아버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갑작스럽기는 합니다.”
“어렵겠니?”
“그건 아닙니다. 사실 율이 씨 나이를 알았을 때요.”
서연은 이별을 고했던 순간 권율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당시 전 곧 서른이고, 일 때문에 결혼과 아이를 미룰 생각이 없다고. 그렇게 율이 씨를 밀어냈었습니다.”
다행이라는 듯 석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율이 씨 최종 합격까지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았고요.”
“율이를 모르니?”
“네?”
“만에 하나 이번에 떨어진다고 해도 내년에는 틀림없이 될 거다.”
걱정도 하지 말라며 석구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지만 호진이가 결혼 날짜를 잡은 상황이라 제가 먼저 할 수도 없습니다.”
재숙과의 약속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석구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
“서희 결혼이 언제라고?”
“10월 첫째 주 토요일입니다.”
“그럼, 너는 12월에 하면 되겠구나.”
제안하겠다던 석구는 서연이 흔들리는 것 같자 아예 노선을 변경했다.
“12월이면 율이도 겨울 방학일 테고.”
쓱 흘리는 석구의 계획은 갑작스러우면서도 뭔가 설득력이 있었다.
“네 회사도 겨울에는 좀 한가하지 않니?”
‘도대체 우리 회사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보신 거야?’
사실 봄 신상품 디자인이 끝나면 겨울은 비수기나 다름없었다. 서연은 석구의 남다른 정보력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율이 시험이다 뭐다 제대로 된 데이트도 못 했을 테고.”
데이트 얘기에 서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요즘 번번이 일이 생기는 바람에, 권율이 예약해놓은 여행을 미룬 것만 이미 여러 번이었다.
다음에 가자는 말을 주문처럼 외치다 어느새 권율의 여름 방학이 끝나 있었다.
“겨울 방학에 결혼하면 신혼여행도 여유 있게 다녀올 수 있고. 얼마나 좋니.”
“신혼여행이요?”
“최고 좋은 곳으로 보내주마. 원한다면 한 달 내내 있어도 좋고.”
너무도 솔깃한 제안이었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별빛이 쏟아지는 바닷가에 권율과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나중에 율이가 발령받으면 떨어져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니?”
“네?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서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럼. 율이가 학교 다닐 때 아이를 낳으면 너랑 시간 보내기도 좋고. 키우기도 훨씬 수월하고.”
결혼과 출산, 육아까지. 이미 큰 그림을 그린 석구의 말에 서연은 자꾸만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런데, 할아버님. 언제 거기까지 생각하셨어요?”
“늙은이가 우두커니 앉아서 할 일이 뭐냐. 남는 게 시간뿐인데.”
놀란 것도 잠시. 서연은 석구의 제안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내년이면 서른인 데다 권율이 졸업하기 전에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임신 기간을 따져보면 그가 발령을 받기 전에 아이를 갖는 것도 무리한 제안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이 키우는 건 걱정하지 말아라. 회사 일에 지장 없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으마.”
지금 눈앞에 계약서가 있었다면 서연은 당장 도장을 찍을 뻔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석구가 아닌 권율과 상의할 일이었다.
“좋은 제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을 해볼 테냐?”
“네.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율이 씨랑도 상의해보겠습니다.”
아무리 솔깃한 제안이라도 권율의 생각이 제일 중요했다.
“오냐. 기다리고 있으마.”
시원시원한 석구의 대답에 서연의 머릿속에는 일생일대 중요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
“율아. 토요일에 제주도 별장으로 가겠다고?”
“응. 형도 프러포즈할 거면 날짜는 똑같이. 동선은 겹치지 않게. 어때?”
매일 밤 석구의 병실에서 자는 권율을 보기 위해 서희가 찾아왔다. 석구가 잠든 틈을 타 두 사람은 잠시 발코니로 나온 참이었다.
“형 친가 쪽에도 별장 있지 않아?”
“강원도. 그런데 우리 호진이는 한적한 거 싫어해.”
“그럼?”
“도시파라서 야경 보는 거 좋아하거든. 난 호텔 스위트룸이나 잡아야겠다.”
그동안 서로가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했다.
서희와 호진은 김 여사의 거처는 물론 운전기사와 공모해 돈을 빼돌린 정황까지 포착했다.
김 여사의 주거지를 급습할 일만 남았지만, 이를 알게 된 석구가 극구 말렸다.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결혼을 앞둔 서희에게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서희와 호진은 참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석구 몰래 김 여사를 찾아가 모든 증거를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집안일을 발설하거나 다시 찾아오면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서류에 서명까지 받아냈다.
“아! 얘기 들었지?”
“뭘.”
“이번에 찾아온 할머니 보석 말이야. 할아버지가 호진이랑 서연 씨한테 고를 기회를 주신다던데?”
“형수님은 뭐래?”
권율은 호진의 반응이 궁금했다.
서연은 생각보다 물욕이 없는지 보석 얘기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뭐라긴. 완전 기대하고 있지.”
“형수님 귀여우셔.”
“그래도 우리 욕심꾸러기가 서연 씨랑 같은 걸 고르면 양보한다더라.”
서희의 말에 권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 요즘 서연 씨는 말이야. 좀 이상해.”
“왜?”
“뭔가 고민 있는 사람 같아. 혹시 형수님한테 뭐 들은 거 없어?”
“아니. 전혀.”
요즘 서연은 종종 생각에 잠겼다.
가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거나, 불러도 대답을 놓칠 때가 있었다.
“왜 그런지 물어봤어?”
“응. 그런데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달래.”
“내가 호진이한테 물어보라고 할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어 권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프러포즈할 때까지 기다려 보고. 정말 중요한 결정이면 말해주겠지.”
“그래. 걱정하지 마.”
서희가 권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서연 씨 보통 사람 아니라니까. 할아버지랑 잘 지내는 것 좀 봐.”
서희에 말에 권율의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다.
“그건 그래. 너무 신기하고 좋아.”
솔직히 서연이 석구와 단둘이 시간을 달라고 할 때만 해도 내심 걱정했었다.
이미 두 사람이 제대로 충돌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서연의 매력이 석구에게 통하기라도 한 걸까. 놀랍게도 두 사람은 꽤 사이가 좋았다.
매일 밤 자기 전. 석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연의 이야기가 빠짐없이 등장했다.
서연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떤 간식을 먹었는지. 일을 들고 온 서연이 얼마나 똑소리가 나는지.
이제 석구는 서연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참! 반지 찾아왔어?”
“응. 매일 한 번씩 꺼내 보고 있어. 도저히 실감이 안 나서.”
권율은 작년 이맘때를 떠올렸다.
군복을 입고 열심히 훈련 중이었는데. 우연히 서연을 다시 만나 1년도 되기 전에 결혼을 꿈꾸고 있다니. 서연과의 인연이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하. 나도 실감이 안 난다. 새파랗게 어린 사촌 동생이 와이프의 절친에 남편이라니!”
서희가 권율의 팔을 툭 치며 장난을 걸자 두 사람이 한바탕 소리 내어 웃었다.
바로 그때. 권율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형. 잠깐만. 서연 씨 전화.”
발코니에서 나온 권율이 조용한 복도로 향했다.
“서연 씨. 안 잤어요?”
“율아…….”
서연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랐다. 나직하게 잠겼고, 말끝에 콧소리가 섞여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응. 무슨 일 있어.”
“지금 어디예요?”
마침 서희가 와 있으니 오늘 밤은 석구의 곁을 부탁해도 될 일이었다.
“부모님 집.”
“바로 갈게요.”
고민할 것도 없이, 권율의 발이 먼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