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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사위 컬렉션 (108/130)


108. 사위 컬렉션
2023.02.12.



 
어둠이 내려앉은 조용한 주택가.

미끄러지듯 들어선 권율의 차가 급하게 주차를 마쳤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심상치 않은 서연의 목소리도 그렇고, 늦은 시간에 부모님 집이라니.

요즘 묘하게 이상했던 서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권율의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권율은 달리듯 걸어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권율을 맞이한 건 서연이 아니라 경숙이였다.


“어머니!”

“어서 와. 율아.”

“서연 씨한테 무슨 일 있어요?”

권율의 물음에 경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더니 권율의 팔을 살짝 끌어당겼다.


“아주 울고불고 난리였어.”

“네? 왜요?”

“별것도 아닌 걸로 괜히 그러지.”

수수께끼 같은 경숙의 말에 권율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경숙을 따라 주방으로 향하자 태석과 술잔을 기울이던 서연의 어깨가 기우뚱 무너져 있었다.


“서연 씨. 괜찮아요?”

“어? 율이 씨다! 아빠. 우리 율이 왔어.”

“취했어요?”

“아빠랑 나랑 취했어요. 우리 율이 씨한테요.”

웃음 섞인 서연의 말에 목덜미가 불그스름한 태석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얼마나 달렸는지, 식탁 위에 각양각색의 술병들이 즐비했다.

권율은 휘청거리는 서연이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태석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율아. 우리 걸렸어.”

“네?”

“우리가 매주 화요일마다 만나는 거 서연이가 알았다고.”

태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연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눈이 마주치자 서연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화났어요?”

“아니요.”

서연이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율이 씨가 우리 부모님이랑 시간 보내러 와준 게 너무 고맙고…….”

“또, 또. 왜 울어. 아까부터 율이가 우리랑 놀아줬다고 저런다.”

“노력하는 율이 씨 마음이 예쁘니까 그렇지.”

권율은 서연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듯 쓸어내렸다.


“율이 씨. 우리 엄마한테 아들이 되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진짜예요?”

“서연 씨 부모님이면 내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예요.”

“엄마. 율이 씨가 한 말 들었지. 아빠도 들었어?”

그렁그렁한 서연의 눈이 경숙과 태석을 번갈아 쳐다봤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자 권율이 얼른 닦아주며 말했다.


“서연 씨도 우리 엄마한테 잘하잖아요. 얼마나 고맙게 생각한다고요.”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하고. 마음은 더 예쁘고.”

눈썹 끝을 축 내린 서연이 손등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다 주먹까지 말아쥐었다.


“율이 씨! 엄마, 아빠!”

세 사람의 시선이 서연에게로 향했다.


“나. 할아버님 제안 받아들일 거야.”

“제안이요? 무슨…… 제안이요?”

서연이 생각에 잠긴 이유가 따로 있었다니. 권율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머리가 얼얼했다.


“오늘 모든 게 확실해졌어요.”

“할아버지가 서연 씨한테 무슨 얘기를 했는데요?”

석구가 어떤 이상한 제안을 했을까. 권율은 미안함과 궁금함에 견딜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오늘 엄마한테 상의하고 싶어서 왔는데.”

“어쩐지 불쑥 찾아와서 밥 달라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 했어. 뭔데 그래.”

“그래. 서연아. 율이 숨넘어간다. 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해 봐.”

경숙과 태석의 재촉에 서연은 석구와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길게 설명했다.

석구가 결혼을 먼저 제안했다는 것에 놀란 것도 잠시.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권율의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실언하신 것 같아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왜요?”

“결혼은 몰라도 아이까지 간섭하신 건 지나치셨어요.”

서연이 얼마나 불쾌했을까. 권율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르신이 지나치신 것 같지는 않은데.”

경숙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애를 안 가질 거면 모를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낳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 율이 학교 다닐 때 가지면 같이 병원 다니기도 좋고, 낳아서 키우기도 좋고.”

이래저래 현명한 선택이라는 태석의 말에 권율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과 출산이라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절대 있어서는 안 되고, 전혀 그럴 생각도 없었다.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고 해도, 서연 씨 마음대로 해요.”

“…….”

“난 아이는 없어도 되지만, 서연 씨가 없으면 안 돼요.”

권율에게 정답은 오직 서연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고민했어요.”

“괜찮아요. 고민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해요.”

권율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연이 스르륵 손깍지를 꼈다.


“내가 고민한 건, 결혼에 딸려오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요?”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였어요.”

모두의 시선이 서연의 입으로 쏠렸다.


“결혼 후에도 성공하고 싶어요. 일도, 사랑도.”

“…….”

“거기다 육아까지도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드니까. 덜컥 겁이 났어요.”

권율의 손등을 쳐다보던 서연의 시선이 천천히 들렸다.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데…… 하나도 제대로 못 하면 어쩌나 두려웠어요.”

“고민하지 말아요. 내가 있잖아요.”

평생을 좌우할 중요한 결정, 그 앞에서 자꾸 생각이 많아진다는 서연의 고민.

석구의 제안이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더 잘하고 싶다는 의욕 때문이라면 권율은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다.


“예전에 율이 씨한테 말했죠. 친구들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요.”

“지연 씨랑 리나 씨처럼요?”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난 할 줄 아는 게 일밖에 없어요.”

“살림하고 애 키워줄 사람 찾으려고 결혼하는 거 아니잖아요.”

권율의 말에 경숙이 불쑥 나섰다.


“예전에는 안 그러더니. 왜 이렇게 겁쟁이가 됐어.”

경숙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사업하느라고 하도 재고 따지다 보니까. 우리 서연이가 변했네. 변했어.”

“그러니까. 옛날에는 그렇게 말려도 일단 저지르고 보더니.”

태석이 거들자 경숙은 더 적극적이었다.


“사돈 어르신이 물심양면으로 돕는다고 하셨다면서.”

석구가 사돈 어르신으로 불리자 권율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안사돈이 그렇게 살림 솜씨가 뛰어나시다면서. 네가 실컷 자랑해놓고선.”

“서연이 얘기 듣는데 내가 다 침이 다 고이더라고. 손맛이 그렇게 좋으시다면서.”

쏟아지는 연희에 대한 칭찬에 권율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 뒀다가 뭐 하려고. 우리가 도와주면 되지. 뭘 걱정하고 있어.”

“그래. 서연아. 양쪽 집안에서 한 번씩만 거들어도 수월하지.”

“내 말이. 그리고 우리 율이가 얼마나 자상해. 저번에 계란말이 만드는 것 보고 깜짝 놀랐네. 너보다 훨씬 나아.”

경숙의 말에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우리 딸이 이렇게 소심하게 변할 줄 몰랐네.”

“엄마도 회사 망할 뻔하고 어려운 일 겪어봐. 뭐든지 생각이 많아지지.”

점점 작아지는 서연의 변명에 경숙은 아예 쐐기를 박았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 율이 없으면 안 돼.”

태석이 권율을 쳐다보며 씽긋 웃었다.


“아빠가 화요일을 얼마나 기다리는지 알아?”

“왜?”

“무슨 데이트 나가는 사람처럼, 30분 전부터 대문 앞을 기웃기웃. 오매불망 율이만 기다린다고.”

그런 줄은 미처 몰랐었다.

권율은 태석과 좋아하는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같이 바둑을 뒀다.

그러다 경숙이 요리할 때면 말동무를 해주고, 맛있게 먹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물론 몇십 년을 타인으로 지냈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에게 애틋하기는 했다.


“서연아. 더 말할 것도 없어. 뭐든 순리대로 해.”

“그럼. 어르신도 허락한 마당에 뭐가 문제야. 12월에 하면 좋지. 뭐.”

태석은 허공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꼽았다 폈다 했다. 그러더니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상견례부터 하고. 당신이 안사돈을 뵙고 먼저 상의를 하라고.”

“아무래도 그래야겠네. 엄마들끼리 만나야 얘기가 진행되지.”

경숙과 태석은 중요한 프로젝트에 들어간 것처럼 진지했다.

그러자 서연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엄마. 이럴 거면 ‘사위 컬렉션’ 빨리 꺼내. 오늘이라도 율이 씨 주게.”

“사위, 컬렉션이요?”

처음 듣는 단어에 권율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나중에 사위 생기면 준다고 20년 전부터 차곡차곡 모아놓은 게 있거든요.”

“20년이나요?”

“나름 비싸지만, 절대 하고 다닐 수는 없어요.”

왜 웃는 것인지. 서연이 자꾸만 킥킥거렸다.


“왜요?”

“보면 알아요.”

그 사이, 안방에 들어간 경숙이 화려한 자개로 장식된 나무 상자를 들고나왔다.


“이제 우리 가족이 될 거니까. 이건 오늘부로 율이 거야.”

얼마나 묵직한지. 식탁 위에 상자를 내려놓자 쿵 소리가 났다.


“얼른 열어 봐요. 율이 씨.”

어깨를 들썩거릴 정도로 서연이 웃었다.


“취향에 안 맞아도. 그냥 우리 마음이니까.”

“당시에 이거 사는데, 꽤 줬어.”

“나중에 재산 됐으면 하고. 다 합치면 외제차 한 대 값도 넘어.”

경숙과 태석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권율이 화려한 문양의 금속 장식을 들어 올렸다. 빡빡한 소리를 내며 뚜껑이 열리자 권율의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3단으로 열린 서랍. 검은 벨벳으로 장식된 속은 온통 황금빛이었다.

20년 전부터 모았다는 순금은 종류도 다양했다. 게다가 정기적으로 관리라도 했는지, 황금빛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새끼손가락 굵기의 체인 목걸이, 세트인 팔찌와 반지. 넥타이핀과 커프스는 물론이고,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명품 시계 옆에는 커다란 황금열쇠도 보였다.


“율이 씨. 사위 컬렉션, 어때요?”

기대에 찬 경숙과 태석의 얼굴에 권율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요.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진짜요?”

“너무 좋아요.”

“그럼, 어디 한번 해봐요.”

웃음을 참는지, 서연이 입술을 꾹 누르며 말했다.


“서연 아빠. 목걸이는 당신이 걸어줘. 워낙 골격이 커서 팔찌랑 반지는 늘려야겠다.”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태석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무슨 거창한 의식이라도 거행하듯 황금빛 목걸이를 느긋하게 꺼냈다.

척 소리와 함께 차가운 금속이 목에 닿는 순간 권율의 어깨 끝이 움찔했다.

어찌나 목덜미가 묵직한지, 권율은 저도 모르게 사슬 모양의 납작한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역시. 우리 율이는 뭘 해도 잘 어울린다니까.”

“그렇지? 얼굴이 확 사는 게 금값 좋을 때 미리 사두길 잘했어.”

너무나 좋아하는 두 사람의 반응에 권율은 미소로 화답했다.


 


“우와. 목걸이 하나 했을 뿐인데.”

“서연아. 네가 보기에도 멋지지?”

“모범생이 불량배 되는 건 순식간이네.”

경숙이 서연을 쏘아보며 말했다.


“율이가 좋다는데. 넌 괜히 그래.”

“네. 어머니. 전 정말 마음에 들어요.”

여전히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권율이 웃었다.


“율아. 밤도 늦었는데 여기서 자고 갈래?”

‘사위 컬렉션’의 진정한 주인을 찾아서일까. 경숙이 환한 얼굴로 물었다.


“자기는 어디서 자. 집에 가야지. 그리고 여기 율이 씨 잘 때가 어디 있다고.”

“왜 없어. 율이 방에서 자면 되지.”

“으음. 무슨 방?”

눈을 동그랗게 뜬 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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