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 확신에 확신을 더하다. (109/130)


109. 확신에 확신을 더하다.
2023.02.16.



 
율이 방? 주택이라 남는 방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 그런 방이 있다고?


“내 방 말하는 거야?”

“아니. 율이 방.”

“진짜예요. 율이 씨?”

서연의 물음에 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 와서 공부하고 쉬려면 방이 있어야지. 새로 책상이랑 침대도 들여놨어.”

“언제?”

“얼마 안 됐어.”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경숙은 서연을 힐끔 쳐다보고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권율에게 과일을 건넸다.


“뭐하러 시시콜콜 얘기해. 율이가 좋으면 됐지.”

“와. 소외감 느낀다. 정말.”

“소외감은 무슨.”

“내 방 구경할래요?”

누가 굴러온 돌이고, 누가 박힌 돌인지 모를 만큼 너무도 자연스러운 권율의 행동에 웃음이 났다.

남다른 매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더니. 이제는 부모님의 마음까지 단단히 사로잡은 모양이었다.

그러다 문득 권율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얼굴을 봤다.


‘이런 사이가 되기까지 율이 씨가 많이 노력했구나.’

괜히 코끝이 찡해져 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구경시켜줘요. 율이 씨 방.”

권율이 얼른 손을 잡자 목걸이에서 철컥철컥 둔탁한 소리가 났다.


“나만 따라와요.”

독립하기 전 사용하던 방 맞은편. 오래전부터 작업실로 사용하던 방의 문이 열렸다.

딱 소리와 함께 불이 켜지자 감탄사가 동시에 밀려 나왔다.


“여기가. 이렇게 변했다고요?”

무슨 백화점 가구매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책상이며, 침대며, 벽에 걸린 서연의 그림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된 것이 없었다.

거기다 언제 가져다 놨는지. 두 사람이 핸드폰으로 찍었던 커플 사진이 귀여운 액자에 들어가 있었다.


“어머니가 신경 많이 써주셨어요.”

“나 막 질투 나려고 그래요.”

“질투요?”

“율이 씨는 내 건데. 엄마, 아빠한테 뺏긴 거 같아서요.”

권율의 입꼬리가 씰룩씰룩 움직이자 서연이 그의 허리를 슬쩍 안았다.


“그런데 율이 씨가 부모님 집에 있으니까. 이상해요.”

맞닿은 권율의 체온 때문인지, 술기운이 더 오르는 것처럼 온몸이 화끈거렸다.


“그러면 내가 이상하지 않게 해줄게요.”

씨익 웃은 권율이 서연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갔다.


“화요일마다 여기서 2시간 정도 공부를 해요.”

권율은 서연을 책상 위에 살짝 내려놨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서연의 이마 위에 잔머리를 쓸어올리며 촉, 촉. 입을 맞췄다.

순간 ‘풉’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뭐예요?”

“내 방이랑 인사요. 한 바퀴 돌려면 빨리 움직여야겠어요.”

권율은 책장 앞에서, 서랍장 앞에서, 그림 앞에서, 입술 도장을 빠짐없이 찍었다.


“그리고 여기는 제일 소개해주고 싶은 곳이에요.”

서연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자 권율의 몸짓이 더욱 빨라졌다.


“아직 사용해본 적 없는데. 같이 누워볼래요?”

“같이요?”

누가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문 쪽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여전히 그에게 안긴 채로 침대에 닿자마자 스르륵 뒤로 넘어갔다. 두 사람은 이내 자세를 고쳐 나란히 누웠다.

추억이 가득한 부모님 집. 작업실로 쓰던 방, 익숙한 천장과 낯선 가구들. 그리고 반듯한 권율의 옆모습. 서연은 고개를 돌려 이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율이 씨. 사랑해요.”

저절로 나오는 진심에 권율이 빙그레 웃었다.


“난 더 사랑해요.”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린 권율이 손등에 대고 속삭이자 따듯한 그의 숨결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괜스레 마음이 간지러워 서연의 어깨 끝이 잘게 흔들렸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다가와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서연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술이 아닌 권율에 취한 듯 서연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순간 대단한 계시처럼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확신이 드는 사람이 있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주변에서는 확신을 얘기했었다.

이 사람이라는 확신.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 도대체 그건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었던 기억이 차례로 떠올랐다.

누군가는 원래 한 쌍이었던 것처럼 단숨에 알아본다고 말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뛰어난 조건이 가장 강력한 확신이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서연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감정이었고, 이 사람이라는 확신도 없이 떠밀리듯 결혼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익숙한 향기와 온기에 취해 눈을 감으니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이런 게 운명이고, 확신이구나.’

형체를 알 수 없던 감정이 강력한 실체를 드러내자 서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난 율이 씨랑 행복해지고 싶어요.”

뒷머리를 쓰다듬던 권율의 손길이 그대로 멈췄다. 정수리에 닿는 목울대가 크게 일렁이자 그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달라지는 그의 변화를 감지하며 서연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찰나의 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눅진하게 얽히고,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그의 손끝이 귓가에 흩어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속삭였다.


“내가 더 많이 노력할게요. 서연 씨.”

서연은 대답을 입술로 대신하며 권율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서연 씨.”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무거운 숨이 정수리로 쏟아졌다.


“나갈까요?”

“어디로요?”

“서연 씨 집으로요.”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서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더 가까이 있고 싶어요.”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서연이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



“하. 율아. 마음의 준비 됐어?”

원준이 ‘국가고시 센터’ 사이트를 접속하며 물었다.

너무도 평온한 얼굴의 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될 거야. 될 거니까. 떨 거 없어.”

오히려 원준이 더 긴장한 듯 아까부터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원준이 그러거나 말거나 권율은 화살표 모양의 커서를 마이페이지로 가져갔다.


“으. 못 보겠다.”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원준을 보며 권율이 피식 웃었다.

불합격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변수를 생각하며 권율이 크게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마이페이지를 눌렀다.

순간 권율의 눈매가 커졌다가 이내 부드럽게 휘었다.

속으로 ‘됐다’를 외치며 바로 서연을 생각했다.


“뭐야. 뭔데.”

슬그머니 한쪽 눈을 뜬 원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오, 합격! 우리 율이 합격! 정말 합격!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친구라니.

원준이 제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끌어안는 통에 지나가는 학생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이 형님이 하루도 빠짐없이 점심을 먹어준 보람이 있네.”

감격에 찬 원준이 눈물까지 글썽거리자 권율이 빙그레 웃었다.


“최원준. 그동안 뒷바라지해 줘서 고맙다.”

“너, 누나랑 헤어지고 다 죽어갈 때도 옆에 있었던 게 누구야. 나야, 나. 알지?”

“그럼. 알지.”

나이가 들통나고 서연과 떨어져 있던 시간, 원준이 없었다면 평정심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곤란한 일이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원준이 나타났다. 보라 일도 그렇고, 민혁의 일도 그렇고.


“이제 면접만 남았나?”

“응. 17일 후에.”

“준비는?”

무슨 매니저라도 되는 것처럼 원준은 다음 스케줄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나올 만한 거 이슈별로 정리해놨어. 대본 만들었으니까. 외우기만 하면 돼.”

“율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뭘.”

“널 나라에 뺏길 수 없어. 우리 DN에 들어와서 나랑 세계 일류 기업으로 만들어보자.”

엉뚱한 소리에 권율이 원준의 어깨를 툭 쳤다.


“안 되는 거 알잖아.”

“왜. 우리 삼촌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는데. 권율은 요즘 민혁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대표님은 잘 계셔?”

“뭐. 그럭저럭. 하. 그런데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나.”

적당한 말을 찾으려는지 원준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무슨 일 있어?”

“그전에도 일에 빠져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일에 미쳐 있다고 할까?”

“아…… 그래.”

“근데 아주 이상한 건 말이야.”

원준은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게 속삭였다.


“진상 보라가 우리 삼촌의 안부를 자꾸 묻는다는 거야.”

“보라가?”

“응. 엄청 수상하고, 이상하지?”

짝사랑의 패자끼리 의기투합이라도 한 걸까. 아니면 새롭게 시작된 보라의 일방통행인가.

권율은 홈쇼핑 주차장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암튼. 영양가 없는 보라 얘기는 됐고. 누나한테 빨리 알려야지.”

서연이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원준아. 제주도에 있는 너희 미술관 말이야.”

“미술관?”

“응. 주차장 좀 빌려줄 수 있어?”

원래는 내일 제주도로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합격 발표가 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언제?”

“오늘 밤.”

“얼마나?”

“시간은 모르겠어. 넉넉하게 새벽까지.”

밤 비행기로 티켓을 바꾸고, 이 기쁜 소식을 서연에게 직접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주차장에만 있겠다는데 뭐가 어려워. 관리하시는 분한테 전화만 하면 돼.”

“그럼 부탁 좀 할게.”

“근데 더 좋은 곳 놔두고 주차장은 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원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권율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곳에서만 잘 보이는 게 있거든.”

수수께끼 같은 권율의 말에 원준의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체크 리스트를 빠르게 작성했다. 일정 변경에 따라 새롭게 추가해야 할 것들이 정해지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쉬는 시간. 권율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예약을 변경했다.

어찌나 바쁘게 움직였는지. 수업이 끝날 때쯤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원준아. 밤 11시까지 미술관 주차장으로 갈게. 부탁한다.”

“요트도 빌려줘?”

“아니. 그건 이미 빌렸어.”

“이 철두철미한 녀석.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피식 웃으며 권율이 먼저 일어났다.

짧은 여행에 비해 필요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집으로 돌아와 재빨리 짐부터 꾸렸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챙긴 후 조용히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러고는 매일 들여다보는 반지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천천히 뚜껑을 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란한 빛을 머금은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2차 합격이라는 가장 큰 산을 넘었다는 안도감. 이제는 서연에게 당당할 수 있다는 떳떳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프러포즈를 하루 앞당겨야 하지만, 그래도 꼭 오늘이어야만 했다.

권율은 가방 깊숙한 곳에 작은 상자를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서연의 회사로 바로 출발했다.

가는 내내 심장이 얼마나 쿵쿵거리는지. 손바닥으로 여러 번 가슴을 눌러대도 도통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심장이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권율은 연신 밭은 숨을 쏟아내며 서연의 회사에 도착했다.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이 씨. 괜찮아요?]

최 비서가 옆에 있는지, 나가보겠다는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바빠요?”

[아니, 괜찮아요. 율이 씨는요?]

“지금 서연 씨가 필요해요.”

[거기 어디예요?]

서연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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