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시작과 끝, 그리고 카노푸스
(110/130)
110. 시작과 끝, 그리고 카노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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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시작과 끝, 그리고 카노푸스
2023.02.19.
행정고시 2차 합격자 발표일.
서연은 달력에 써놓은 글씨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오늘인가?”
빨간색 동그라미와 별표가 그려진 날짜를 보며 서연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권율에게는 아는 척하지 않았다. 굳이 부담을 줄 필요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수험번호도 몰랐지만, 사이트에 들어가거나 결과를 알려 하지 않았다. 합격하면 당연히 연락이 올 테니까.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오후가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마치 물에 젖은 습자지처럼 서연의 마음이 축 처졌다.
“분명히 오전에 결과가 났을 텐데. 이상하다.”
날짜를 착각했나. 갑자기 발표가 연기됐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평소처럼 전화해서 쓱 물어볼까. 아니면 기다리는 김에 몇 시간 더 기다릴까.
서연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 순간 호진이 떠올랐다. 왠지 호진의 목소리를 들으면 불안한 마음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 안 그래도 바쁜 애한테. 귀찮게.’
친구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아도 달라질 건 없었다. 이 불안함을 말끔하게 날려줄 사람은 오직 권율 하나였으니까.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빨리 알고 싶어 서연이 다시 달력을 쳐다봤다.
“혹시, 발표가 안 난 거 아니야?”
어느새 퇴근 시간. 권율에게 어떤 연락도 없자 서연의 인내심이 곧 바닥을 드러냈다.
달력을 쏘아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서연은 검색창을 두드렸다.
“어? 합격자 발표가 났는데. 그럼…….”
그럴 리가 없다고 아무리 되뇌어도 잠잠한 핸드폰이 끔찍한 결과의 예고편 같았다.
‘발표가 났으면 어머님한테나 할아버님한테 연락이 왔겠지. 아니면 호진이한테 축하 전화라도.’
잔인한 침묵이 길어지자 서연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책상 모서리를 잡고 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가를 반복했다.
어떤 말로 그를 위로해야 하나. 그냥 말없이 안아줘야 하나.
서연은 머릿속을 떠다니는 부정적인 생각에 결국 책상 달력을 엎어버렸다.
일이고 뭐고 손에 잡히지 않자 일찌감치 자리를 정리했다.
연락이 오면 바로 나갈 태세를 갖추고 책상 위에 핸드폰만 얌전히 내려놨다.
‘괜찮아. 할아버님 말씀대로 이번에 안 되면. 내년에는 꼭 될 거야.’
걱정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가 평생 시험이 안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다른 일을 잘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넘치도록 충분했으니까.
권율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기에 서연은 이번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퇴근 전 보고를 하기 위해 최 비서가 들어왔다.
서연은 업무보고를 훑어내리면서도 잠잠한 핸드폰을 흘깃거렸다.
“그냥 재미 삼아 만든 건데. 너무 잘 팔리네요.”
‘남자친구 에디션’이라는 명목으로 팔았던 상품이 날개를 돋친 듯 팔려나갔다.
“아무래도 디자인이 깔끔하다 보니 선물용으로 많이 구매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했다.
과부하에 걸릴 만큼 일이 많은 상황에서 남성복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아쉽지만 추가 입고는 없는 걸로 안내 올리세요. 그리고…….”
침묵을 지키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어? 어! 최 비서님. 그만 퇴근하세요.”
권율과의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어 최 비서에게 퇴근을 말하고는 재빨리 통화버튼을 눌렀다.
“율이 씨. 괜찮아요?”
평소처럼 받았어야 했는데. 머리를 어지럽힌 걱정이 입 밖으로 먼저 튀어나왔다. 게다가 너무도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 서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 잘 봤다고 했는데. 답안지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정말 합격했다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었다.
권율이 보내는 부정적인 시그널에 혹시나 했던 기대마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금 서연 씨가 필요해요.]
“거기 어디예요?”
[지하 주차장이요.]
“금방 갈게요.”
서연은 바람같이 일어나 이미 싸놓은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보자마자 안아줘야지.’
다 괜찮다고. 이 정도 시련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아니, 위로의 말도 부담이려나. 서연은 머릿속을 떠다니는 많은 말들을 가차 없이 지워버렸다.
복잡한 마음과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율이 씨.”
흐리게 웃는 권율의 얼굴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괜히 뻐근했다.
서연은 그대로 달려가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피식, 그의 작은 숨이 귓가에 닿자 위로의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오려 했다. 서연은 입술을 우그러트려 쓸데없는 말을 막아버리고, 권율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서연 씨.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오늘 같은 날엔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못 할 것이 없었다. 그동안 공부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좋아요. 어디든 가요.”
“좀 멀리 가도 돼요?”
“난 율이 씨만 괜찮으면 다 괜찮아요.”
손바닥을 올려 그의 뺨을 쓸었다.
“그럼, 빨리 가요.”
어딜 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정확히 40분 후. 그의 차가 공항에 도착하자 서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율이 씨. 여기 공항이에요.”
“맞아요. 공항. 우리 짐 부치려면 빨리 움직여야 해요.”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그의 트렁크에서 커다란 여행용 가방이 나오자 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인공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 곳.
저 멀리 바다가 있다는 것은 희미하게 들리는 파도 소리와 촉촉한 바람이 알려주었다.
아무도 없는 미술관 주차장. 컨버터블 자동차의 의자를 한껏 젖힌 채 두 사람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서연 씨. 저기, 저 별 보여요?”
“별이 너무 많아서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까만 밤하늘, 그곳에 흩뿌려진 모래알 같은 별들. 서연은 이름도 알 수 없는 별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니.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손 줘봐요.”
커다랗고 따듯한 손이 다가와 서연의 손등을 포개 잡았다. 그러고는 캄캄한 하늘을 느릿하게 갈랐다.
“점 3개 보여요? 이렇게 주르륵이요.”
“어어. 보여요.”
“오리온자리에 삼태성이에요.”
한 번도 흥미를 갖지 않던 관심사에 서연의 눈동자가 별처럼 빛났다.
“더 밑으로 내려와서 여기. 저 빛나는 별이 시리우스예요.”
“저 반짝이는 점이요?”
“네. 태양 빼고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밝은 별이에요.”
권율의 손이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자 서연의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갔다.
마치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라디오를 틀어놓은 것처럼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권율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부드럽게 귓가를 흔드는 바람도, 손등에 전해지는 그의 온기도, 시야를 가득 채운 알 수 없는 별들도.
모든 것이 완벽한, 그런 밤이었다.
권율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심취해 서연은 아무 별이나 콕콕 찍어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도 없었다. 시동도 켜지 않은 차에 핸드폰도 꺼내지 않았으니까. 그저 나란히 누워 어두운 밤하늘만 한없이 올려다봤다.
“저 별은요?”
“어디요?”
“시리우스 밑에 빛나는 별이요. 엄청 반짝거리는 저기, 저거요.”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권율의 손을 얼른 잡아끌었다.
“서연 씨랑 같이 와서 운이 좋은가 봐요.”
“왜요?”
“저 별은 남쪽에서 볼 수 있는 카노푸스예요.”
“특별한 거예요?”
“아주 특별해요. 서연 씨처럼요.”
서연은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권율을 바라봤다. 그의 반듯한 이목구비가 희미한 별빛에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작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율이 씨. 괜찮을까?’
내색하지 못하는 저 마음이 얼마나 무거울까. 차라리 속 시원히 털어놓게 물어볼까? 작은 생각 하나가 큰 걱정이 되어 별처럼 쏟아졌다.
“율이 씨.”
권율이 대답 대신 서연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뭐든지 해요.”
“하고 싶은 말이요?”
“밤을 새워서라도 율이 씨 얘기 다 들어줄게요.”
그의 손등을 뺨에 가져다 붙여 체온을 나눴다.
“그럼 내 얘기 들어줄래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권율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저기, 저 카노푸스라는 별을 보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어요.”
웃음이 섞인 권율의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카노푸스의 다른 이름이 노인성이거든요.”
서연은 진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권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병장수를 바라는 왕이 신하한테 대신보고 오라고 할 만큼 아주 특별했대요.”
“신하가 봐도 왕이 본 것처럼 효과가 있었나 봐요.”
“그렇게 믿고 싶었겠죠. 그런데 우리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권율의 눈동자가 유난히 빛났다.
“이렇게 같이 보네요.”
“율이 씨 덕분에 내 수명이 방금 늘어났어요.”
농담을 섞자 권율의 어깨가 작게 흔들렸다.
“서연 씨는 오래 살 수밖에 없어요.”
“왜요?”
“슬픔이 끼어들 수 없을 만큼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니까요.”
“난 이미 넘치도록 행복해요.”
서연이 권율의 손등에 촉하고 입을 맞추자 그의 입에서 작은 바람이 일었다.
“오늘, 제일 생각나는 사람이 서연 씨였어요.”
이제야 아픈 말을 꺼내놓으려나. 서연이 권율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아직 가야 할 길이 조금 남았지만, 앞으로 더 노력하면 서연 씨랑…….”
“충분해요. 지금도 넘칠 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거 잘 알아요.”
순간 서연의 감정이 앞서 나갔다.
어쭙잖은 위로의 말은 넣어두려 했는데. 노력이라는 그의 말에 말릴 틈도 없이 급발진 버튼을 눌러 버렸다.
“지금 율이 씨 기분이 어떨까. 온종일 생각했어요.”
“…….”
“확신에 찰 만큼 자신했던 일이 안 될 때도 있어요.”
권율의 얼굴이 돌아가자 그를 꽉 끌어안았다.
“오늘의 시련이 진짜 실패는 아니에요.”
“서연 씨. 그게 무슨.”
“시험 좀 못 보면 어때요. 난 다 괜찮아요. 율이 씨.”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서연이 뺨을 비볐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옆에 있어 줄게요.”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도요?”
“이미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아니 아무 말도 안 하고 이렇게 안아줄게요.”
말이 길어질수록 위로를 빙자한 잔소리처럼 들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서연 씨.”
“…….”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도 옆에 있어 줄 거예요?”
서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매일 안아도 주고요?”
얼굴을 돌려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세상이 어두운 푸른 빛으로 변해갈 때쯤. 권율의 몸이 천천히 틈을 벌렸다.
그는 서연의 왼손을 들어 제 심장 위에 올려놓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날 생각해주는 서연 씨 마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권율의 눈썹 끝이 살짝 구겨졌다.
“내 선택이 결국 옳았구나.”
“…….”
“내 시작과 끝이 서연 씨라서 정말 다행이다.”
작게 흔들리는 권율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곧 그가 손을 내려 작은 상자를 꺼냈다.
“내게 확신을 주는 서연 씨를 볼 때마다.”
서연의 시선이 점점 선명해지는 권율의 얼굴에 박혔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요.”
달칵 소리와 함께 작은 상자에 갇혀있던 커다란 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권율은 자신의 심장에 닿아 있던 서연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약지에 입술을 내렸다.
“서연 씨.”
“…….”
“나랑 결혼해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