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그 남자의 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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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그 남자의 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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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그 남자의 큰 그림
2023.02.23.
서로의 가족을 만났고.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도 오고 갔다.
‘결혼이라는 걸 하겠구나’ 막연한 마음이 권율의 물음에 현실이 되었다.
서연은 그의 손에 들린 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캄캄했던 하늘이 새벽의 푸른빛을 머금을 때까지, 이 반지를 보기 위해 기다렸던 걸까. 서연은 별빛을 실물로 영접하는 기분이었다.
“나랑 결혼해줄래요?”
“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마음속으로는 ‘좋아요’를 백 번이나 외쳤지만,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대답을 하라고. 대답.’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과부하에 걸린 듯 서연은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자 권율이 차에서 내렸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서연의 고개가 함께 돌아갔다.
‘뭐, 뭐 하려는 거지?’
철컥 소리와 함께 조수석 문이 열렸다.
“서연아.”
커다란 권율의 그림자가 스르륵 작아졌다. 한쪽 무릎을 굽힌 그가 서연의 왼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의 체온으로 달궈진 반지가 서서히 밀려 들어왔다.
“결혼하자. 우리.”
‘좋아’라는 말이 왜 이렇게 안 나오는지. 서연은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목소리 듣고 싶어.”
“음. 좋아.”
“더. 더 많이. 서연아.”
“사랑해. 율아. 정말 사랑해.”
순간 포장지에서 알맹이만 쏙 빠지듯 붕 하고 몸이 들렸다.
권율의 어깨에 매달린 채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자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대답을 안 해서 심장마비 오는 줄 알았어.”
“나도 모르겠어. 그냥 말이 안 나왔어.”
“거절했으면 허락할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설득했을 거야.”
“나 때문에 서울 못 갈 뻔했네.”
팽팽했던 긴장감이 풀어지자 그가 코끝을 스치며 속삭였다.
“응. 대답을 들을 때까지 안 놔줬을 거야.”
“오늘 힘들었을 텐데. 괜히 긴장시켜서 미안.”
진심 어린 사과에 권율의 목소리가 더 다정해졌다.
“내 걱정 많이 했어?”
“발표는 난 거 같은데. 연락도 없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까.”
“왜. 나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합격하라고 부담 주는 것 같아서.”
눈썹 끝을 내린 권율이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는 뭐든지 물어봐.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하니까.”
“다?”
“뭐든지, 다. 그리고 참고로.”
권율의 입술이 서연의 얼굴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겼다.
“오늘. 아니 어제 시험 결과는 합격이야.”
“뭐라고요?”
도대체 하루 종일 뭘 한 거지? 혼자 드라마를 쓰고 지우고, 연기한 것도 모자라 무슨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고 위로를 했다니.
서연은 생각할수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합격, 했어요.”
“왜 말 안 해줬어요. 나 혼자 얼마나 오해했다고요.”
“갑자기 제주도 여행 계획하느라 말하는 걸 깜빡했어요.”
“그럼. 부모님께는요?”
“아직이요.”
“아니. 그 중요한 걸 말 안 하면 어떡해요.”
당사자가 말하지 않고 여행을 떠났으니, 차마 묻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오해를 하고 있을까.
“다들 나처럼 오해하고 계실 거라고요.”
“시험 잘 봤다고 했는데. 그럴까요?”
권율은 지금껏 어떤 삶을 살았기에, 잘 봤다는 말 한마디가 보증수표가 되는지. 서연은 기가 막혔다.
“암튼 율이 씨는 특이해요.”
“나쁜 뜻은 아니죠?”
서연은 많은 의미를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러자 권율의 손이 움푹 팬 등줄기를 짚었다.
슬금슬금 손이 올라가더니 아이에게 하늘 구경을 시켜주듯 번쩍 들어 올렸다.
“어! 이러다 떨어져요. 율이 씨.”
권율은 팔을 내려 서연의 입술을 찾아 포개고, 다시 차로 향했다.
“내가 특이한 놈이 아니라 얼마나 특별한 놈인지 증명해볼게요.”
설핏 묘한 웃음을 흘리며 권율이 말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시동을 걸고, 다급하게 핸들을 돌렸다.
미술관과 멀지 않은 별장. 낯선 공간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뭔가 단단히 결심한 사람처럼 예약해놓은 요트를 다음날로 미루겠다는 문자부터 보냈다.
“서연 씨. 이리 와요.”
두 팔을 활짝 벌린 권율은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또렷이 증명했다.
***
일요일 저녁.
현관에 가득한 신발. 고소한 기름 냄새와 시끌벅적한 대화, 거기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까지.
서연의 본가는 오랜만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 율이. 공부하느라 수고 많았어.”
“난 될 줄 알았다니까요. 아휴. 기특하다. 정말.”
태석과 경숙이 번갈아 가며 칭찬하자 연희가 흐뭇한 얼굴로 권율을 쳐다봤다.
“저희 집으로 모셔야 하는데.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희의 인사에 경숙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동안 뒷바라지하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저희야 늦게나마 밥 한 끼 하는 거죠.”
“전 딱 밥만 했어요. 우리 서연이가 고생 많았죠.”
연희가 서연에게로 공을 돌리자 경숙이 부드럽게 웃었다.
“어쩜 이렇게 좋은 말씀만 해주시고. 제가 너무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서연이가 정말 현명하고, 착해서. 전 요즘 걱정도 없어요.”
“우리 율이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착한가 했더니. 딱 사부인이시네요.”
경숙은 연희의 손을 붙잡으며 잘 부탁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권율의 합격 기념으로 모인 자리. 따로 격식을 차린 상견례가 아니라 그런지 오고 가는 술잔 속에 화기애애한 대화가 계속됐다.
“율아. 결혼 날짜는 생각해봤어?”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권율의 시선이 서연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냈다.
사실 두 사람은 제주도에서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평생 잊지 못할 프러포즈. 서로에 대한 약속과 다짐. 거기다 결혼과 인생 계획까지.
마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여행을 떠난 것처럼, 서로가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결혼은 크리스마스 전에 했으면 해요.”
“서연이랑도 얘기가 된 거야?”
연희의 물음에 서연이 대신 답했다.
“네. 그때면 봄 신상품을 넘길 수 있어서요. 율이 씨도 겨울방학이고요.”
“그럼 아예 날짜를 잡을까?”
경숙이 얼른 일어나 달력을 가져왔다.
“크리스마스 전주 토요일이 괜찮을 것 같은데. 사부인 생각은 어떠세요?”
“저는 좋습니다. 그런데 결혼식까지 몇 달 안 남아서 원하는 식장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경숙과 연희는 순식간에 머리를 맞댔다.
“원하는 날짜를 두고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융통성 있게 움직이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세요. 이렇게 착착 정리해주시니 너무 든든합니다.”
순조로운 출발을 알리듯 경숙과 연희는 손발을 맞췄다.
“아! 식장은 제 친구 시댁이 호텔을 경영하고 있어서 거기 알아볼게요.”
“누구?”
“리나네 시댁이 S 호텔이잖아요. 리나도 거기서 했고.”
“S 호텔이면 깔끔하고 좋지. 서연아. 거기서 하면 참 좋겠다.”
연희가 반색하자 경숙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한국대 교수회관도 있잖아. 거기서 친구 아들이 결혼했는데 깔끔하고 좋더라고.”
태석이 불쑥 나서자 경숙이 툭 치며 말렸다.
“한국대가 아무나 들어가는 학교도 아니고. 학교에서 결혼하면 율이 친구들도 오기 좋지 뭐.”
“당신은 무슨 교수회관에서 하라고 그래요. 서연이가 호텔 알아본다는데.”
경숙이 재차 말리자 순간 멋쩍어진 태석이 재형에게 술을 권했다. 아무래도 결혼과 관련해서는 엄마들의 입김이 세질 수밖에 없으니까.
“전 상관없어요. 호텔이 예약 안 되면 한국대에서 해도 괜찮아요.”
“서연 씨는 정말…… 쿨해.”
외모는 화려하지만 담백한 서연의 모습에 권율이 작게 중얼거렸다.
“율이 씨. 생각은 어때요?”
“정말 괜찮겠어요?”
“난 율이 씨랑 결혼하는 데 의미가 있는 거지. 식장은 그냥 장소일 뿐이에요.”
정답 같은 말에 권율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럼 식장은 호텔로 알아보고, 안 되면 교수회관도 리스트에 넣을게요.”
“난 율이 씨 말에 뭐든 찬성이에요.”
권율은 서연의 긍정적인 반응에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경숙과 연희도 시선을 맞추며 빙그레 웃었다.
“날짜랑 식장은 얼추 정리됐고. 그다음에 중요한 게 뭐가 있지?”
경숙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장 큰 건 신혼집이에요. 서연 어머님.”
“아. 집이요.”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주제다 보니 경숙이 말을 아꼈다.
“안 그래도 상의를 드리려고 했는데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아버님이 결혼을 허락하시면서 신축 아파트를 마련해주신다고 하셨어요.”
연희의 말에 권율이 먼저 나섰다.
“이번에 서연 씨랑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봤는데요.”
권율의 시선이 서연에게로 닿자 그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집은 제가 마련하겠습니다.”
“율아. 할아버지가 좋은 아파트 봐두셨다고 했어.”
“알고 있어요.”
“그런데 뭐 하러 그래. 서희도 이번에 청담동 집 받기로 했는데.”
괜히 경숙의 눈치를 살피며 연희가 말렸다. 그러자 권율이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결혼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제가 부담할 생각이에요. 그게 맞는 거고. 그러고 싶어서요.”
“엄마가 서연이한테 해주고 싶은 것도 있고. 그건 집에 가서 따로 의논해보자.”
마다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연희가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신혼집은 우리 집하고, 여기 서연 씨 본가 사이에 주택으로 구하려고요.”
권율은 외동딸인 서연과 일찍 독립하는 자신의 상황을 처음부터 고려했다. 서로의 부모님에게 최대한 공정하고 비슷하게. 갈등이 불거질 상황을 아예 차단시켰다.
“아파트가 아니고. 주택? 관리하기 번거로울 텐데.”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아파트는 제약이 많을 것 같아서요.”
뛰지 말라는 잔소리를 하고 싶지 않다는 권율의 말에 서연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까지 생각해 몇 수 앞을 내다봤으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서연아. 네 생각은 어때?”
연희가 잠자코 있는 서연의 의견을 물었다.
“저는 율이 씨가 하자는 대로 하려고요.”
“얘는 뭐 이렇게 만사 오케이야.”
가만히 있던 경숙이 엉뚱한 말을 하기 전에 서연이 선수를 쳤다.
“엄마. 이사가 쉬운 일도 아닌데. 처음부터 오래 살 집으로 구하면 좋잖아.”
서연은 제주도에서 결론 낸 얘기에 굳이 다른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연희가 권율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율아. 집은 큰돈이 왔다 갔다 하는데. 더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앞으로 저희가 서로를 책임지려면 지금부터 잘 상의해서 결정하려고요.”
쐐기를 박는 권율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연희는 입만 벙긋거렸다.
“인터넷으로 몇 군데 알아봤어요. 마음에 드는 곳으로 서연 씨랑 가보려고요.”
“벌써?”
“12월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권율은 결혼에 있어 절대 머뭇거리지 않았다. 직진 신호만 있는 사람처럼 서연의 손을 붙잡고 앞만 보고 달렸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진지한 권율의 목소리에 연희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이제 한집에서 같이 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