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 연하남의 남다른 매력 (112/130)


112. 연하남의 남다른 매력
2023.02.26.



 
찬물을 끼얹은 듯 순간 정적이 흐르자 서연이 잠시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곧 지원사격에 나섰다.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한다고 해도 리모델링하려면 시간이 꽤 걸려서요.”

서연이 권율의 손을 꼭 잡았다 놨다. 그러자 배턴 터치를 하듯 권율이 말을 이었다.


“면접도 준비해야 하고, 서연 씨 일도 바쁘니까. 사실 같이 보낼 시간이 부족해요.”

“네. 결혼 준비하려면 상의할 일도 많은데. 같이 있으면 시간도 절약되고요.”

“그리고 할아버지 곧 퇴원하시니까. 그동안 밀린 데이트 겸 같이 있고 싶어요.”

가장 솔직하고도 중요한 이유였다. 어차피 결혼의 궁극적인 이유가 함께 있고 싶어서니까.


“너무 갑작스러워서.”

연희가 경숙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어머니. 저 서연 씨랑 같이 살면 안 될까요?”

“아니…… 뭐. 안 된다기보다는.”

경숙이 태석에게 슬쩍 결정을 미뤘다.


“요즘은 집 때문에 결혼하기 전에 혼인신고부터 하고 같이 사는 사람들 많은데. 뭐.”

“허락해주시는 거예요?”

권율의 까만 눈동자가 더 또렷해졌다.


“이제 율이도 어른인데.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법도 알아야지.”

태석의 말에 재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형만 형수님이랑 같이 사는 거야? 나는?”

서연의 옆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상현이 불쑥 나섰다.


“너는 뭐.”

“나도 형수님 집에서 같이 살면 안 돼?”

“상현아. 네가 거길 왜 가.”

당황한 연희가 상현을 말리자 서연이 웃으며 말했다.


“자주 놀러 와요. 주말에 자고 가도 되고요.”

“진짜요? 엄마 들었지. 형수님이 나 자고 가래.”

“자기는. 고등학교 준비하려면 미리 공부해야지.”

권율이 동생의 외박을 공부로 막아서자 상현이 입을 삐죽거렸다.


“율이 씨. 왜 그래요. 어머님께 허락만 받아와요. 그러면 난 언제든 환영.”

서연이 편을 들어주자 잔뜩 신이 난 상현이 더 찰싹 달라붙었다.


“권상현. 서연 씨 귀찮게 하지 말고 떨어져.”

“형수님, 나 귀찮아요?”

“아, 아니요. 전혀요. 으, 표정 뭐야. 엄마. 우리 상현이 엄청 귀엽지.”

서연이 상현을 가리키자 경숙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넌, 상현이가 뭐야. 도련님이지.”

“이렇게 귀여운데 도련님이 뭐야. 촌스럽게.”

“사돈 어르신 앞에서 이름 부르기만 해. 예의도 모른다고 욕 얻어먹는 줄이나 알아.”

경숙의 말이 길어지자 서연이 ‘알았어’와 ‘그만해’를 연발했다.


“전 이름으로 불러주는 게 좋은데요. 저도 형수님한테 누나라고 부르고 싶어요.”

“권상현. 형수님한테 누나가 뭐야. 그리고 불편하게 얼굴 좀 그만 들이대.”

“형수님. 형이 구박해요.”

형제간에 사소한 말씨름이 벌어지자 연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너희는 집에서도 안 하던 행동을 왜 여기 와서 하고 그래.”

자잘한 잔소리와 작은 신경전이 오고 가자 서연이 피식 웃었다.


‘뭔가 진짜 가족 같잖아.’

오늘 처음 대면한 자리가 무색할 정도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 같았다.

두 가족은 점잔을 빼거나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예의는 지키되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보이고 진심을 나눴다.

어색한 사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광경에 서연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우리 사진 찍어요!”

“이 상황에서 뜬금없이 무슨 사진이야.”

경숙의 말에 서연이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진짜 가족이 될 거니까. 처음 만난 기념으로요.”

“진짜 가족이요?”

권율이 서연에게 되물었다.


“우리 7명이 진짜 가족이 될 거잖아요.”

“좋지. 역시 우리 딸이 뭘 좀 알아.”

태석이 자리를 잡자 제일 키가 큰 권율이 핸드폰을 높게 들었다.


“상현아. 가운데로 가. 어머니 조금 더 왼쪽이요. 네. 좋아요.”

동그랗게 모여 권율의 핸드폰을 쳐다봤다.

누구는 눈을 감았고, 누구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여러 장의 사진 속에 모두가 한결같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가족 방 만들어서 사진 공유할게요.”

서연의 말에 다들 ‘좋다’를 외쳤다.


“그럼 저희 같이 사는 거 허락하신 걸로 알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틈타 권율이 확정적으로 말했다.


“언제부터?”

“내일 짐 싸려고요.”

“그렇게나 빨리?”

연희의 얼굴에 섭섭함이 묻어나자 상현이 얼른 팔짱을 끼며 말했다.


“엄마. 나 있잖아. 나.”

“어머님. 저도 있잖아요.”

“그래도…….”

“심심하시면 회사로 나오세요. 제가 맛있는 것도 사 드리고, 뭐든지 다 해드릴게요.”

연희의 기분을 헤아려 서연이 얼른 팔짱을 꼈다.

묵직해진 팔을 내려보며 연희가 입술을 꾹 눌렀다.


“그렇게 가고 싶어?”

연희의 물음에 권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 정말.”

“부탁드려요. 엄마.”

“네가 정 원한다면 뭐. 그렇게 해.”

그렇게 완벽한 허락이 떨어졌다.

***

금요일 오후 회의.


“가을 신상품 중에 재킷 반응이 가장 좋네요.”

“네. 아무래도 고가의 수입 원단이다 보니 핏 자체가 다르다는 평가입니다.”

김 실장은 베스트 리뷰 목록을 건네며 말했다.


“애쓴 보람이 있네요. 이번 디자인은 절개가 살렸어요.”

리뷰를 눈으로 훑으며 서연이 중얼거렸다.


“이번에 금성무역에서 원단 들어오면 바로 추가 제작 들어가세요.”

석구의 전화 때문인지. 평소에는 어림도 없을 물량이 생각보다 빨리 확보됐다.


“어! 대표님. 눈이 충혈됐어요.”

“네? 아, 네.”

깜짝 놀란 김 실장이 손가락으로 서연의 눈동자를 가리켰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요즘 일도 많았지만, 대놓고 말하기가 어려운 그런 무리도 있었다.


“아. 뭐. 아무래도 일도 일이고, 결혼 준비 때문에요.”

“뭐 도와드릴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서연은 회의 자료를 탁탁 정리하며 손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실장님. 제가 드레스 만들 시간은 없고. 베일만 따로 제작하고 싶은데요.”

“드레스는 고르셨어요?”

핸드폰을 켜 사진 몇 개를 보여주자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눈에는 2번 드레스가 제일 좋아요.”

“역시 저랑 보는 눈이 같으세요.”

내심 본식 드레스로 낙점한 디자인이었는데. 김 실장이 정확히 집어내자 서연이 빙그레 웃었다.


“하. 진짜 결혼이라니. 대표님, 기억나세요?”

“뭐를요?”

“율이 씨가 연락처 안 준다고 답답해하셨잖아요.”

“저도 제가 이렇게 드라마틱한 한 해를 보낼 줄 몰랐어요.”

옛 기억이 떠오르자 서연이 피식 웃었다.


“같이 사니까 어떠세요?”

사실 직원 중에 권율과 함께 사는 걸 아는 사람은 김 실장과 최 비서뿐이었다.


“한 3주 되셨죠?”

“아. 벌써 그렇게 됐네요.”

바쁘게 지내서일까. 아니면 권율과 보내는 시간만 상대적으로 빨리 지나서일까.

서연은 눈만 깜빡이면 일주일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알콩달콩 좋으세요?”

이걸 물을까 말까. 서연이 잠시 머뭇거렸다.


“저…… 실장님. 남편분이 1살 연하시잖아요.”

아무래도 결혼 선배에게 궁금할 걸 묻기로 했다.


“남편분이 되게 오빠처럼. 막 아이 대하듯 그러세요?”

“예를 들어서요?”

“데이트할 때는 그렇게까지 안 그랬거든요. 그런데 같이 사니까 뭘 하나도 못 하게 해요.”

사실 요리도 못하지만, 권율은 다친다고 칼질은커녕 뜨거운 물도 못 끓이게 했다.


“게다가 자다가 물 마시러도 못 가겠어요.”

“왜요?”

“분리불안 있는 사람처럼 제가 옆에만 없으면 금방 일어나서 찾아요.”

무슨 재밌는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김 실장이 잇몸을 보이며 웃었다.


“뭐, 또 다른 것도 있으세요?”

“으음. 그리고 그, 뭐, 그. 그거요.”

서연이 말을 더듬자 김 실장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아! 무슨 주제인지 알겠어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분명 지쳐야 정상이거든요.”

“그런데요?”

김 실장은 아예 의자를 당겨 앉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뭐랄까. 보조배터리를 어디 숨겨놓고 나 몰래 충전하는 것처럼…… 너무 생생해요.”

“얼마나요?”

“도저히 보조를 못 맞출 정도로요.”

“지극히, 정상입니다. 신혼에는 원래 그래요. 대표님.”

김 실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나요?”

“대표님. 아주 남다른 연하남과 산다고 지금 자랑하시는 거예요?”

“아니, 아니요!”

매일 PT를 10세트쯤 하는 기분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권태기가 올까 말까 한 아줌마는 듣기만 해도 부럽네요.”

김 실장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신혼을 즐기라고 했다가, 얼굴 살이 너무 빠진 것 같다고 걱정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툭 터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서연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삼키며 입꼬리를 힘겹게 올렸다.


“그런데 신기한게요.”

“또 뭔데요?”

“뭔가 되게 로봇 같아요. 자기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끝내요. 집안일도 각 맞춰서 딱딱 해놓고요.”

사실 권율의 도움으로 집안일을 신경 쓰지 않아서 편하기는 했다.


“입 뗄 것도 없이 완벽한 남편상이네요.”

“그래요?”

“그럼요. 착하지. 자상하지. 나만 사랑하지. 손 하나 까닥 못 하게 하지. 거기다 집안일도 잘하지. 다른 것도…….”

손가락을 꼽다 말고 김 실장의 잇몸이 다시 만개하자 서연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바로 그때, 테이블에 올려놓은 서연의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김 실장의 눈이 액정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퇴근 시간이라 데리러 왔나 봐요.”

발신자를 확인한 서연이 입술 끝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장님.”

서류를 챙긴 김 실장이 재빨리 나가자 서연도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율이 씨. 어디예요?”

다정한 권율의 목소리에 서연의 눈매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정리하려면 10분 정도 걸리는데. 잠깐 올라올래요?”

알겠다는 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서연이 회의 자료를 챙겨서 책상으로 향했다.

순간,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어. 호진아. 이 시간에 웬일이야?”

결혼을 앞두고 한창 바쁜 호진이 퇴근 시간 전에 전화라니. 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한 서연이 물었다.


[오늘까지 드레스를 가봉 안 하면 결혼식 못 한다고 해서. 반차 냈어.]

“라인 예쁘게 잡았어?”

[그냥 대충했어. 그래서 나온 김에 오빠가 애들한테 저녁 산다고 해서. 우리 동서도 나와야지.]

동서라는 호칭에 서연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율이 씨가 데리러 왔어.”

[더 잘됐네. 내가 리나랑 지연이한테 남편들도 부르라고 할게. 결혼하기 전에 인사하면 좋잖아.]

다들 바쁘다 보니 밥 한 끼 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 뭐. 우리 율이 씨를 세상에 공개할 때가 됐지.”

서연의 말에 호진이 깔깔거렸다.

얼떨결에 약속장소가 정해지자 서연의 마음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결혼할 사람이라고 권율을 소개하는 자리. 거기다 친구 남편들은 재벌 3세들이었다. 재력이 문제가 아니라 권율의 남다른 매력을 어필하고 싶은 욕심이 솟구쳤다.


“우리 율이 씨는 어디 내놔도 빠지질 않지.”

누구의 남편이 더 멋진가. 배틀을 벌이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신경이 쓰였다.

똑똑―.

조용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함박웃음을 지은 권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왔어요.”

서연의 예리한 눈동자가 권율의 착장 상태를 빠르게 훑었다.


“율이 씨.”

어느새 가까이 다가가 권율의 셔츠를 쓱 매만졌다.


“여기, 단추 좀 풀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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