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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그가 사랑받는 이유 (114/130)


114. 그가 사랑받는 이유
2023.03.05.



 
사랑받는 남편의 필수 코스? 게다가 오늘 밤에 어떤 노력을 한다는 거지?

뭔가 오묘한 대화에 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형이 검증된 데이터를 가지고 얘기하는 거야.”

도대체 그 데이터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들끼리 일 얘기를 할 리도 없었다.


“서 변호사님. 괜찮지 않아요? 한번 시도해보세요.”

“아. 꽤 솔깃하긴 하네요. 그럼 저도 오늘 밤 노력해보는 걸로.”

서희까지 참여 의사를 밝히자 서연의 궁금증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율아. 네 사촌 형 하는 말 들었지?”

권율이 서희의 얼굴을 쳐다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어린 사촌 동생 앞에서 이런 주제를 대놓고 얘기하려니까. 좀.”

“뭐 어때요. 더 편하고 좋죠.”

“그럼요. 저희는 어려서부터 옆집 살아서 서로의 흑역사를 다 알고 있습니다.”

두 남자의 말에 서희가 멋쩍게 웃었다.


“호진이가 좋아했으면 좋겠네요.”

순간 궁금함을 참지 못한 서연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무슨 재밌는 얘기 하세요?”

소리도 없이 서연이 등장하자 남자들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운동, 얘기요.”

“운동이요?”

“네. 요즘 밤에 운동하기 좋아서 몇 가지 꿀팁 좀 공유했어요.”

리나의 남편이 말을 얼버무리자 서연의 눈빛이 슬쩍 권율을 쳐다봤다.


“율이 씨?”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거짓말을 못 하는 그의 입이 사실을 말할 테지만.


‘남자들만의 시간을 존중해주자. 뭐 나쁜 거 알려줬겠어?’

남편들 모임에서 막내인 권율의 대인관계를 위해 지금은 모른 척할 타이밍이었다.

서연이 말을 아끼는 사이, 친구들이 와인 오프너를 들고 나타났다.


“여기 직원이 와인 잔 세팅해준대.”

“치즈는?”

“당연히 시켰지. 어, 벌써 오네.”

서연은 어색한 감정을 단번에 지워버렸다. 그러고는 맛있는 술과 안주, 거기다 사랑하는 친구들의 근황에 집중했다.


“서연 씨. 신혼여행은 예약했어요?”

리나 남편의 물음에 치즈를 삼킨 권율이 대신 대답했다.


“멕시코 칸쿤에 마음에 드는 호텔이 있어서요. 곧 예약하려고요.”

“칸쿤 좋지. 근데 거기 직항이 없을 텐데.”

둘이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다 보니 목적지를 고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율아. 차라리 샌프란시스코에서 갈아타고 가.”

“샌프란시스코요?”

“응. 우리가 나파밸리에 와이너리가 있거든요. 이 와인도 거기서 만든 거야.”

“참고로 거기 되게 좋아요.”

지연이 거들고 나서자 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이가 새 브랜드 론칭 때문에 못 가서 그렇지. 우리는 작년에 리나 따라서 갔었어요.”

“아. 맞다. 그랬지.”

여니블랙 론칭 준비로 좋은 기회를 놓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농장 하우스에서 한 일주일 시간 보내면서 샌프란시스코 시내도 구경하고.”

“LA로 넘어가도 좋지.”

다들 열과 성을 다해 신혼여행 코스를 짜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근데 다 갈 수 있을까?”

다양한 건 좋지만, 동선이 꼬일까 걱정스러웠다.


“율이 씨 학교 다닐 때 부지런히 다녀. 나중엔 시간 내기 정말 힘들어.”

“그럼. 너도 바쁘고. 아이라도 생겨 봐 어림도 없지.”

결혼 선배들의 조언에 서연은 순간 진지해졌다.


“또, 또. 우리 한 사장님 재고 따진다. 야, 고민하지 말고 질러.”

“그래. 나야 윗사람 눈치 보이지만, 넌 직원들한테 맡기면 되잖아.”

호진의 적극적인 설득에 더욱 솔깃해졌다.

마치 결혼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근사한 숙소를 빌려주겠다고 하질 않나. 출장 좀 다녀본 남자들이 동선을 짜주질 않나.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닌데.’

서연의 마음이 자꾸 흔들렸다.


“율이 씨 생각은 어때요?”

서연의 물음에 권율은 대답 대신 형준의 손을 잡았다.


“처음 만났는데 이렇게 잘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형준 형님.”

그가 커다란 어깨를 기울여 리나 남편에게 슬쩍 기대자 세 남자가 ‘풉’ 소리를 내며 웃었다.


“율아. 이제부터 형이라고 불러. 무슨 일 있으면 편하게 전화하고.”

“나한테도 연락해. 너랑 라운딩 꼭 돌고 싶다.”

“저도 형이랑 운동하고 싶어요.”

“서연 씨, 율이가 아주 매력 만점이네요.”

두 남자의 칭찬에 서희가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권율. 내가 편들어 준 게 얼만데. 새로 만난 재벌 형들한테 어필하고 있어.”

“고마워서 그러지. 그래도 나한테는 서희 형이 최고야.”

“암튼 생긴 건 곰인데. 가만 보면 여우야. 아주 커다란 여우.”

서희가 피식거리자 권율도 따라 웃었다.

서로가 어렵다면 어려울 수 있는 관계였다. 그러나 권율은 그 어색함을 단숨에 무너트렸다.


‘이런 게 선한 매력인가?’

달콤함에 취해 와인을 홀짝거려서일까. 아니면 소중한 사람들에게 그가 인정받아서일까.

서연은 뿌듯한 마음에 포만감마저 느꼈다.


“율아. 우리 운동모임 멤버 다 괜찮아. 다음 주 토요일, 어때?”

“장소랑 시간 알려주세요. 형.”

자리를 정리하고 나오는 길.

친구의 남편들은 권율의 어깨를 두드리며 꼭 연락하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어머. 율이 씨는 정말 귀염받게 행동한다.”

“그러게. 난 우리 남편이 남자한테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거 처음 봐.”

리나와 지연의 칭찬에 서연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우리 동서, 좋니? 아주 얼굴에 ‘흐뭇’이라고 쓰여 있네.”

호진이 살살 놀리자 서연이 그녀의 어깨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래, 엄청 좋다. 이 형님아. 넌 일요일 점심에 할아버님댁에서 보자.”

서연의 말에 호진이 깔깔거리며 오케이를 날렸다.


“율이 씨. 우리 먼저 갈까요?”

“먼저요?”

“율이 씨는 술 안 마셨잖아요.”

유일하게 술을 마시지 않은 권율을 제외한 모두가 대리 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으면 형들 가고 갈까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권율은 하나둘 자리를 뜰 때마다 깍듯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비록 제일 마지막으로 출발하긴 했지만, 권율의 예의 바른 태도가 오히려 좋았다.

차에 탄 서연은 괜히 마음이 흐뭇해져 창문을 내리고 밤바람을 만끽했다. 그러다 권율의 반듯한 옆 모습을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왜요?”

“그냥 좋아서요.”

서연은 머릿속을 맴돌던 노래를 흥얼거리다,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아, 참. 율이 씨. 우리 나갔을 때요.”

서연이 아예 상체를 돌려 권율을 똑바로 응시했다.


“남자들끼리 무슨 얘기했어요?”

순식간에 입술을 말아 넣은 권율이 핸들을 움켜쥐었다.


“으응?”

대답을 재촉하듯 서연이 권율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알고 싶어요?”

“말해줄 수 없는 비밀이에요?”

평소 같으면 묻는 즉시 대답이 줄줄 나왔을 텐데. 무슨 심각한 이야기라도 되는지 그는 말을 아꼈다.


“이러니까 더 수상하네. 뭔데 그래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서연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었다.


“집에 거의 다 왔으니까. 30분 안에 자세히 알려줄게요.”

묘한 미소만 지을 뿐 그는 얼른 말을 줄였다.

곧 집에 도착해서도 권율은 어딘가 모르게 달랐다.

더위를 타는 사람처럼 찬물로 샤워를 하질 않나. 자꾸만 피식거리지를 않나.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질 않나.


‘왜 저러지?’

서연은 머리를 말리면서도 권율의 낯선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바로 그때, 거울 너머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서연 씨.”

그의 눈동자가 뭐라 형언할 수 없이 반짝거렸다.


“왜요?”

어느새 다가온 그가 헤어드라이어를 끄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그의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서연의 몸이 붕 하고 떠올랐다.


“아까 궁금하다는 거요. 이제부터 하나씩 설명하려고요.”

“아니. 흣.”

설명을 왜 이런 방식으로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서연아.”

“…….”

“불편하면 말해.”

한층 과감한 그의 몸짓에 서연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오늘은 다른 사람이 되려고.”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알려줬냐고 묻기도 전에 서연의 이성이 뚝 하고 끊어졌다.


 

***



“아직 마무리를 다 못 했어요. 잠깐 올라올래요?”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권율의 전화에 서연이 말했다.

권율은 특별한 과제가 있지 않으면 서연과 출퇴근을 함께했다.


“서연 씨. 여기 테이블 좀 쓸게요.”

“이 방에 있는 건 뭐든지 써도 돼요. 배고프면 간식도 꺼내 먹고요.”

신혼여행 일정이 잡히자, 일에 진심인 서연은 자발적으로 야근 중이었다.

아무래도 업무 공백을 철저히 대비하려다 보니 권율의 기다림도 길어졌다.


“행시 끝나서 놀아야 하는데. 매일 공부시켜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리포트로 대체하는 시험이 있어서 미리 해두면 좋아요.”

그의 정답 같은 말에 디자인 시트를 넘기던 서연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고개만 들면 서연 씨가 보이잖아요. 책 한번 보고, 서연 씨 한번 보고.”

“나도 디자인 안 풀릴 때마다 율이 씨 눈썹 슬쩍 훔쳐 봐요. 이렇게요.”

커다란 눈동자만 올려 훔쳐보는 시늉을 하자 대각선에 앉아 있던 그가 씽긋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공간에 있다는 편안함 때문일까. 요즘 서연은 야근이 즐겁기만 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그래요. 우리 그만 퇴근해요.”

기지개를 켠 서연이 자정이 되기 전 일을 마무리했다.

모두가 잠든 도시의 밤, 서연은 단단한 그의 손을 붙잡고 걸었다.

한밤의 데이트 같은 퇴근도 좋은데, 그와 한집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그러면 마음이 잔뜩 몽글몽글해져 행복함과 함께 허기가 몰려왔다.


“율이 씨. 라면 먹을래요?”

“라면이요?”

그는 ‘이 시간에?’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치즈가 많이 들어가서 국물이 꾸덕꾸덕한 라면 있죠. 아까부터 그거 먹고 싶었어요.”

“많이 배고파요?”

“마음 같아서는 율이 씨 안 주고 나 혼자 다 먹고 싶을 정도요.”

진담 같은 농담에 권율이 서연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내가 끓여줄게요. 저번에 라면 넣다가 손 델 뻔했잖아요.”

세상을 다 가지면 이런 기분일까.

자정이 다 되는 시간에 라면을 끓여주겠다는 남자라니. 서연의 어깨가 춤을 추듯 흔들렸다.


“이래서 다들 결혼하나 봐요.”

“왜요?”

“율이 씨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좋아서요.”

서연은 그가 끓여줄 라면을 한껏 기대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바로 식탁에 앉았다.


“자요. 천천히 먹어요.”

“우와.”

손이 빠른 권율이 노란 치즈가 올려진 라면을 서연의 앞에 내려놨다.


“여기 앞접시에 덜어줄게요.”

뜨겁지 않게 후후 불어서 주는 권율의 얼굴을 보며 서연이 젓가락을 들었다.

분명 젓가락질을 몇 번 안 했는데. 10배속 버튼을 누른 것처럼 라면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배고팠어요?”

국물까지 싹 비운 빈 그릇을 내려다보며 권율이 물었다.


“정말 엄청난 맛이었어요. 율이 씨는 왜 이렇게 라면도 잘 끓여요.”

씹지도 않고 너무 흡입했나 싶어 서연이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런데 후식은…… 없어요?”

“후식이요?”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요. 상큼한 맛 나는 아이스크림이요.”

“서연 씨. 혹시…….”

순간 권율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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