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뭔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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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뭔가 다르다
2023.03.09.
“나랑 같이 살아서 스트레스받아요?”
“아니요!”
“원래 아이스크림 잘 안 먹잖아요. 특히 밤에는요.”
서연은 자신의 식습관을 떠올렸다.
요즘에는 운동할 짬이 없어 먹는 거로 조절했는데. 꼭 자정쯤이면 주체할 수 없이 허기가 몰려왔다.
거기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만족스러워서일까. 아니면 그의 손맛이 남달라서일까.
그가 해 주는 건 간장 계란밥이라도 한 그릇 뚝딱이었다.
“야근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야식을 찾게 되네요. 혹시…… 나 살쪘어요?”
남편이 생겼다고 안심한 나머지 몸매 관리의 긴장감을 놓치다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연이 온몸을 빠르게 매만졌다.
“아직 괜찮은 거 같은데.”
“살은 하나도 안 쪘어요. 그건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그런데.”
“그런데?”
“뭔가 달라서요.”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변화를 감지한 권율의 말에 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잘 모르겠는데.”
조그맣게 중얼거린 것도 잠시.
서연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냉동실 문을 열었다.
‘상큼한 맛은 다 먹었나? 다 초콜릿 맛뿐이네.’
뒤적뒤적 냉동실을 뒤져도 원하는 맛이 없자 입술을 삐죽 내민 서연이 문을 닫았다.
“내가 뭐라고 해서 안 먹는 거예요?”
“아니요. 원하는 맛이 없어서요.”
“먹고 싶은 맛이 뭔데요? 내가 내일 사 올게요.”
“새콤달콤한데. 상큼함이 톡톡 터지는 맛이요.”
조금 전 라면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놓고도 침부터 고였다.
“그럼 이거라도 먹을래요?”
평소와 다르다고 지적할 때는 언제고, 권율은 서연이 먹고 싶다는 말에 냉장실을 열었다.
“어머니가 가져다 놓으신 건데. 아이스크림보다 나을 거예요.”
“으음. 과일은 별로예요.”
“어제도 과일 안 먹었잖아요.”
안 보는 것 같지만 뭐든지 다 알고 있는 권율의 세심함에 서연은 흠칫했다.
“어제야 배가 불러서 그런 거죠.”
“인스턴트 먹었으니까. 후식은 과일로 해요. 내가 먹여줄게요.”
기어코 과일을 먹이겠다는 듯 권율은 비타민의 효과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했다.
‘이럴 때 보면 엄마보다 더해.’
사실 서연은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입이 짧은 편이었다. 그래서 편식하지 말라는 경숙의 잔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었었는데.
권율의 입에서 다른 듯 같은 말이 흘러나오자 기분이 영 이상했다.
“무슨 과일을 이렇게 많이 먹어요.”
“얼마 안 돼요.”
예쁜 접시에 담긴 과일을 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이 느껴지자 서연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자요. 아. 해요.”
너무도 자상한 남자가 입 앞까지 포도를 가져오자 서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서요.”
아주 작게 입을 벌리자 알사탕만 한 포도가 입안으로 쑥 밀려 들어왔다.
서연은 볼 이쪽, 저쪽으로 포도를 굴리다 빨리 먹으라는 그의 눈짓에 어쩔 수 없이 꽉 깨물었다.
과즙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 껍질에서 오래된 풀향기가 났다.
“으. 풀 비린내.”
“풀 비린내요?”
권율이 얼른 포도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달기만 한데.”
“내가 먹은 건 안이 상했나 봐요. 거름 맛이 나는 거 같아요.”
고개를 갸웃거린 권율이 멜론을 찍어서 건넸다.
“포도 말고 이거 먹어요.”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그의 정성을 생각해 모서리를 작게 베어 물었다.
“읏. 이건 상한 오이 향이 나요.”
“상한 오이요?”
서연이 먹다 만 멜론을 집어 든 권율이 얼른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으면서도 그의 눈빛이 서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빤히 쳐다보던 것도 잠시.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은 권율이 서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뭐를요?”
“혹시 임신한 거 아니에요?”
임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서연이 손을 세차게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과일에는 이상이 없는데 서연 씨가 느끼는 게 이상하잖아요. 내가 나가서 테스트기라도 사 올게요.”
“이 시간에 문 연 약국이 어디 있다고요.”
24시간 하는 약국을 찾아보려는지 권율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진짜 아니에요. 2주 전에 그날이었잖아요. 율이 씨도 알면서.”
그가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서연의 몸은 항상 정확한 패턴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은 저녁을 일찍 먹었고, 율이 씨가 끓여준 라면이 유독 맛있었어요. 내가 먹은 과일은 약간 오래됐고요.”
서연의 깔끔한 정리에 그제야 권율이 핸드폰을 내려놨다.
“나중에라도 이상하면 꼭 알려줘요. 서연 씨 일은 내가 제일 먼저 알아야 하니까.”
“알았어요. 근데 이 과일은 그만 먹어도 되죠?”
입 안에 남아 있는 껍질의 비린 맛을 당장 게워내고 싶었다.
‘양치하고 싶다.’
그러나 권율이 여전히 걱정하는 표정이라 내색할 수 없었다.
서연은 일부러 숨을 멈춘 채 목구멍을 꾹 눌렀다. 약간 피곤한 척 눈을 끔뻑거리며 권율을 쳐다봤다.
“여긴, 내가 치울게요. 서연 씨 먼저 씻어요.”
서연은 티가 나지 않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권율이 개수대로 몸을 돌리자마자 재빨리 방으로 도망쳤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욕실 문을 잠근 서연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과일이 오래됐나?”
양치하면서도 어찌나 잔향이 가시질 않는지. 나중에는 눈동자와 코끝이 빨개지도록 헛구역질을 했다.
“윽, 풀 냄새. 괜히 입맛만 버렸네.”
제대로 비위가 상해서일까.
서연은 며칠 동안 과일만 보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가 차려주는 샐러드나 토스트 옆에 놓인 과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심지어 최 비서가 가져다주는 과일 주스만 봐도 입맛이 뚝 떨어졌다.
“대표님. 키위주스 별로세요?”
“저번에 상한 과일을 먹었더니. 좀 안 땅겨서요.”
“다른 걸로 가져다드릴까요?”
서연은 시선을 돌리며 숨을 참았다.
“아니요. 죄송하지만, 이 주스는 치워주시겠어요?”
최 비서가 초록색 컵을 들고 나가자 서연은 책상 위에 놓인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알싸한 맛이 나는 사탕을 혀로 살살 굴리며 결산 보고서를 보려던 그때.
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엄마.”
[별일 없지?]
“항상 똑같지. 왜?”
[아니. 오늘 반찬을 갖다 놨는데 그대로라서.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이틀에 한 번꼴로 반찬을 가져다 놓는 경숙의 말에 서연이 피식 웃었다.
“엄마. 율이 씨가 아무리 잘 먹어도 그 많은 반찬을 어떻게 다 먹어.”
[얼마나 된다고 그래. 너 혹시!]
“혹시?”
[다이어트한다고 율이까지 굶기는 거 아니야?]
다이어트는 무슨. 간식이다 야식이다, 너무 잘 먹어서 탈인데.
“아니야. 하루에 한 끼는 집밥으로 먹어.”
[사부인이 찬밥 한번 안 먹이고 율이 키웠다는데. 배달 음식만 먹이지 말고. 내가 해준 반찬이랑 밥 먹여.]
도대체 누가 자식이고, 누가 사위인지.
경숙은 권율의 먹거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가 잘 먹는 음식을 줄줄이 읊으며 잘 챙겨 먹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애도 아니고. 우리가 알아서 할게.”
경숙의 잔소리를 잘라버리고 슬슬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이었다.
[참. 사돈 어르신이 고향에서 잔치한다면서. 준비는 하고 있어?]
“아. 맞다. 잔치!”
아무리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그의 최종 합격기념으로 열리는 잔치를 깜빡하다니. 소나기처럼 쏟아질 경숙의 잔소리에 서연이 슬그머니 핸드폰을 떼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경숙의 핀잔이 랩처럼 시작됐다.
[얘가 정신이 있어, 없어. 율이 행시 붙어서 하는 잔치를 까먹으면 어떡해.]
“바쁘니까 그렇지.”
[암튼 내가 전화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어머니가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어.”
그가 한국대 수석 입학할 때 이미 잔치를 했던 경험 때문일까.
연희는 서연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서연이 뭐라도 시켜만 달라고 애원할 정도였다.
[안 되겠다. 내가 외삼촌한테 얘기해서 대게 좀 주문하고. 나라도 도와야지.]
“그냥 당일에 와서 친척 어르신들께 인사만 하라고 했는데.”
그러자 경숙의 한숨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서연아.]
“…….”
[엄마는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네가 시댁에 밉보일까 봐 조마조마하다.]
“어머님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할아버님도 잘해주셔. 걱정하지 마.”
그의 집안에서 반대했던 일이 목에 가시처럼 박혀서일까. 경숙은 작은 일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우리 딸을 믿지만.]
경숙의 걱정 어린 당부가 길게 이어졌다.
[호진이랑 비교당하지 않게 눈치껏, 센스 있게. 알았지?]
다는 아니더라도 어떤 마음에서 하는 소리인지 알기에 서연도 고분고분 대답만 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엄마! 내가 또 전화할게.”
김 실장이 노크하지 않았다면 경숙과의 통화가 더 길어질 뻔했다.
[어어. 일해. 엄마가 사부인이랑 통화해서 다 알아서 해놓을 테니까.]
결국 자신의 몫을 엄마가 떠맡는 모양새였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서연은 마커 뚜껑만 만지작거렸다.
[넌 하나도 걱정하지 말고.]
“고마워. 엄마. 어, 들어가.”
경숙과의 통화가 끊어지자 옆에 서 있던 김 실장이 얼른 패드를 건넸다.
“저번에 말씀하신 겨울 신상품 최종안입니다.”
서연은 쓱쓱 손가락을 움직이다 화면을 크게 키웠다.
“구스 패딩이 안 보이네요.”
“잠시만요. 여기 있습니다.”
바짝 다가온 김 실장이 다른 폴더를 열자 순간 고소한 콩가루 냄새가 났다.
서연은 강아지라도 되는 것처럼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인절미 드셨어요?”
“네?”
눈을 동그랗게 뜬 김 실장이 재킷을 재빨리 살폈다. 작은 티클 하나 보이지 않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떡이야 냄새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닌 데다가 부하 직원이 돌린 결혼 답례품을 하나 집어 먹은 것이 다였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실장님한테서 고소한 콩가루 냄새가 나서요.”
냄새라는 말에 김 실장이 소매를 킁킁거렸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아까 점심을 적게 먹어서 그런가. 왜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지.”
“간식으로 떡 좀 드릴까요?”
서연의 머릿속에 떡이 그려진 순간 입안에 홍수가 났다.
‘얼마나 살이 찌려고 이래. 아. 근데 맛있겠다.’
참고 싶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네! 있으면요.”
“결혼 답례품으로 떡을 돌렸다고 했으니까. 아마 여기도 왔을 거예요.”
사무실 전화기를 든 김 실장이 최 비서에게 떡이 있는지 묻고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최 비서가 금방 가져온다고 합니다.”
서연은 말랑말랑하고 고소한 인절미를 먹을 생각에 손에 들고 있던 패드를 슬쩍 내려놨다.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도 안 되겠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무실을 서성인 것도 잠시, 최 비서가 쟁반을 들고 들어오자 돌진하듯 다가갔다.
대표의 체면이고 뭐고, 서연은 인절미부터 집어 들었다.
검은 원피스 위로 콩가루가 우수수 떨어지거나 말거나, 서연은 인절미 하나를 꿀떡 삼켰다.
“흐음.”
어찌나 꿀맛인지.
“체하세요. 여기 앉아서 차랑 같이 드세요.”
서연은 최 비서의 만류에도 어정쩡하게 선 채로 인절미 5개를 먹어 치웠다.
“인절미, 더 없어요?”
“이게 다라서요. 꿀떡은 싫으세요?”
난감한 표정의 최 비서가 서연을 쳐다보자 김 실장이 쓱 다가왔다.
“대표님. 혹시 임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