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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116/130)


116.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2023.03.12.



 
그저 인절미가 맛있는 것뿐인데. 왜 임신을 말하는 건지.

콩가루가 묻은 손가락을 슬그머니 입에 넣으며 서연이 우물거렸다.


“아, 아니에요.”

“방금 인절미를 씹지도 않고 꿀떡꿀떡 넘기셨잖아요.”

그랬나?

서연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눈동자를 굴렸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어서 그래요.”

핑계 아닌 핑계를 대자 최 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점심에 고기 추가해서 쌀국수에, 삼겹살 분짜랑 반세오까지 드셨어요.”

서연이 기억을 더듬으며 홀쭉한 배를 쓱쓱 문질렀다.


“최 비서님도 아시잖아요. 쌀국수는 배가 금방 꺼져요.”

“라지였는데도요?”

괜히 민망해져 서연이 멋쩍게 웃었다.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제가 신혼이라 요즘 체력 소모가 상당해서요.”

잘 알지 않느냐는 듯 서연이 김 실장에게 눈으로 동의를 구했다.


“돌아서면 어찌나 배가 고픈지. 그래도 체중은 하나도 안 늘었어요.”

“임신 가능성은 정말 없으세요?”

“정말 아니에요. 3주 전인가, 2주 전인가. 암튼 그날이었어요.”

“최 비서가 보기에는 어때요? 매일 대표님 옆에 있잖아요.”

의심을 풀지 않은 김 실장이 최 비서에게 직접 물었다.


“실장님도 아시다시피 대표님은 원래 적게 드시잖아요. 바쁘면 온종일 주스만…….”

순간 최 비서가 착 소리 나게 손뼉을 쳤다.


“잠, 잠시만요!”

최 비서가 부리나케 탕비실로 들어가더니 오렌지주스를 들고 나타났다.


“이거 드셔보세요.”

“지금요?”

인절미로 한껏 올라간 입맛이 순식간에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사탕이나 아이스크림에 들어간 인공적인 맛은 몰라도, 생과일주스의 향이 살짝 거슬린다고나 할까.


“네. 원래 착즙한 오렌지주스를 하루에 하나씩 꼭 드셨잖아요. 아니면 녹즙이나요.”

녹즙이라는 말에 오래된 풀 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속이 울렁거렸다.


“그런데 매일 배달되는 주스가 10개나 밀렸다고요.”

그러고 보니 최 비서가 물어볼 때마다 주스를 거절한 기억이 떠올랐다.


‘마시기 싫다고 도망갈 수도 없고. 참…….’

최 비서가 플라스틱병을 드르륵 땄다.


“자요. 대표님.”

마치 사약을 받아든 사람처럼 서연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눈치를 살피다 한 모금 넘기는데.


“읏.”

“대표님!”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자 서연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저, 약국 좀 다녀오겠습니다.”

“약국은 왜요.”

서연이 손으로 황급히 입을 가렸다.


“임신 테스트기 사러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비서인 저는 확실히 알아야겠습니다.”

분명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최 비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그러자 한술 더 뜬 김 실장이 서연의 팔을 붙잡았다.


“임신이든 아니든. 미리 알아서 나쁠 건 없습니다. 대표님.”

서연이 홀리듯 소파에 앉자 김 실장이 두툼한 쿠션을 허리에 받쳐줬다. 그러면서 친구들의 다양한 임신 사례를 길게 설명했다.

얼마나 실감 나게 얘기하는지, 서연은 이야기에 푹 빠져 최 비서가 약국에 갔다는 사실도 잊을 정도였다.


“대표님!”

언제나 차분한 최 비서가 헐레벌떡 사무실로 들어왔다.


“여기, 테스트기요.”

서연이 입술을 말아 넣으며 까만 약봉지를 받아들었다.


“지금 해보고 아니면 내일 아침에 한 번 더 해보세요. 2개 사 왔습니다.”

아침이 가장 정확하다는 말을 덧붙이자 서연이 어색한 몸짓으로 스르륵 일어났다.


‘저번에 진짜 생리를 했는데.’

괜히 인절미 먹방을 하는 바람에 쓸데없이 오해만 산 꼴이었다. 그래도 최 비서의 정성을 생각해 테스트기를 집어 들었다.


“……다녀올게요.”

서연은 친자매처럼 눈을 반짝이는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고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하. 정말.”

이럴 일이 아니라며 중얼거리면서도 상자에 적힌 대로 차분히 움직였다.


“이러면 된 건가?”

서서히 물드는 막대기를 내려다보는 서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좋고 싫고를 떠나 기분이 묘하게 이상했다.


“어!”

이상한 성적표를 받아든 사람처럼 서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휴지 걸이 위에 올려놓은 상자를 집어 들어, 작은 글씨까지 읽고 또 읽었다.


“불량인가?”

서연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표님. 어떻게 나왔어요?”

심상치 않은 얼굴로 서연이 들어오자, 김 실장이 먼저 물었다.


“……이상해요.”

“왜요?”

“두 줄이에요.”

“두 줄이요!”

최 비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표님, 그것 좀 줘 보세요.”

김 실장은 서연의 손에 들린 작은 막대기를 가져가 선명한 두 줄을 확인했다.


“너무도 선명한 두 줄인데요.”

“그러니까요. 분명히 생리를 했거든요. 아무래도 하나 더 해봐야겠어요.”

“요즘에는 거의 확실하다던데. 그래도 이상하시면 한 번 더 해보세요.”

김 실장이 테스트기를 집어 들었다.


“아니요!”

최 비서가 만류하며 말했다.


“차라리 병원으로 가세요. 뭐든지 확실하게 해야죠.”

“아닐 수도 있는데. 병원이요?”

“그럴수록 더 가 봐야죠. 분명 생리를 했는데.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뭔가 설득력이 있었다.

임신 여부를 떠나 무슨 문제라도 생겼으면 어쩌나, 서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대표님. 율이 씨 불러서 같이 가세요. 처음엔 무조건 같이 가야 해요.”

김 실장의 말에 서연의 시선이 시계로 향했다.

수요일 오후 4시.

머릿속에 입력해놓은 그의 시간표를 빠르게 소환했다.


‘수업은 끝났을 텐데. 병원 문 닫기 전에 갈 수 있을까?’

서연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 참다못한 김 실장이 먼저 움직였다.


“여기 핸드폰이요.”

“대표님. 저는 괜찮은 병원 찾아볼게요.”

직원들의 일사불란함에 서연은 홀리듯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율이 씨. 수업 끝났어요?”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리자 왠지 모르게 심장이 쿵쿵거렸다.


“지금 괜찮으면 회사로 와 줄 수 있어요?”

무슨 일이냐는 그의 물음에 입술만 달싹거리다 순간 저도 모르게 진실이 튀어나왔다.


“임신인지 확인하러요.”

어떤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모든 사고가 멈춰버렸다.


“대표님. 여기요. 이 병원이 산모들 평가가 제일 좋습니다.”

병원 정보를 톡으로 공유하며 최 비서가 말했다.

서연은 들이쉬는 숨마다 버거운 생각들로 가득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

다양한 배 모양을 가진 산모들로 가득한 대기실. 예약을 취소한 이름 모를 산모 덕분에 마지막 접수가 가능했다.

서연은 권율의 손을 꼭 잡은 채 주위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한서연 님.”

“네, 네!”

“2번 진료실로 오세요.”

“서연 씨. 천천히 일어나요.”

진짜 임산부를 대하듯 그의 행동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권율은 서연의 어깨를 감싸 안은 것도 모자라서 평소보다 더 느리게 움직였다.


‘으, 떨려.’

진학 상담을 앞둔 학생처럼 어찌나 가슴이 콩닥거리는지. 서연은 진료실 문 앞에서 여러 번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을 거예요.”

말은 그렇게 해도 권율의 손바닥이 점점 촉촉해졌다.

평범해 보이는 진료실. 푸근해 보이는 의사와 눈이 마주쳤다.


“일회용 바지만 착용하고, 이 문 뒤로 오세요.”

안내에 따라 느리게 움직이면서도, 다리가 후들거려 몇 번이고 벽을 짚었다.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자.’

서연은 요동치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쪽으로 편하게 누워보실까요?”

얼떨떨한 기분에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갑자기 산부인과에 온 것도 모자라서 권율과 함께 진료실에 있다니. 서연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꺽거리며 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웠다.

달칵 소리와 함께 불이 꺼지자 회색빛 화면만이 어두운 주위를 밝혔다.


“원피스 좀 올리겠습니다.”

검은색 원피스가 올라가자 홀쭉한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미지근합니다.”

푸우욱 소리와 함께 적당히 데워진 젤이 아랫배에 뿌려졌다. 찝찝함보다는 팽팽한 긴장감에 숨이 막혀왔다.


“초음파는 배로 보겠습니다. 꾹 누르면 불편하실 수 있어요.”

경고 같은 안내가 끝나자마자 서연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

뻑뻑하던 것도 잠시, 쓱쓱 젤을 묻히자 기계가 한층 부드럽게 움직였다.


“생리는 하셨는데. 양성이 나오셨다고요?”

“네.”

“다른 증상은 없으셨고요?”

서연이 대답하기 전에 그가 먼저 나섰다.

그는 서연의 주치의처럼 그녀가 인지하지 못했던 증상까지 낱낱이 설명했다.

의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서연의 아랫배 여기저기를 꾹꾹 문질렀다.


“이쪽 화면을 봐주세요.”

의사가 모니터 모서리를 움직이자 서연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여기, 작은 주머니같이 생긴 거 보이세요? 이게 아기집입니다.”

아기집?

난생처음 접한 단어에 서연의 머릿속에 지진이 났다.


“이건 난황입니다.”

달칵 소리가 나더니 화면 안에 작은 실선이 생겼다.


“주수는 5주 2일 차 정도 됐고요.”

“5주 2일이요?”

권율의 상체가 앞으로 바짝 기울어졌다.


“네. 오늘은 아쉽게도 심장 소리는 안 들릴 것 같네요.”

“그럼, 그때 출혈은 뭔가요?”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착상혈일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은 괜찮나요?”

서연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권율은 궁금한 질문만 콕 찍어 물었다.


“현재는 출혈의 흔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의사의 진지한 얼굴에 권율의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갑작스러운 통증이나 비정상적인 출혈이 생기면 바로 내원하십시오.”

“입원을 안 해도 정말 괜찮을까요?”

미간이 한껏 좁아진 권율이 물었다.


‘회사는 어쩌지?’

이 상황에서도 회사를 걱정하다니. 서연은 대책 없는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네. 초반에 무리하는 건 좋지 않지만, 평소처럼 생활하는 게 훨씬 좋습니다.”

심장 소리를 못 들었지만,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나오시면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몸을 일으키면서도 영 믿기지 않아 서연은 몇 번이고 손가락을 잡아 쥐었다.


‘내가 임신을 했다니.’

서연은 일회용 바지를 벗으면서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진료실 의자에 앉아 안내 사항을 들었는지, 무조건 고개만 끄덕였다.


“서연 씨. 괜찮아요?”

몇 번의 대답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진료실 밖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기분이…… 이상해요.”

서연의 눈앞에 커다란 흑백화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넘어지지 않게 내 손 잡아요.”

다음 예약을 잡고, 수납을 마칠 때까지. 권율은 서연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산모 수첩과 서연의 손을 보물처럼 잡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조용히 걷던 것도 잠시, 익숙한 차가 보이자 권율이 걸음을 멈췄다.


“서연 씨.”

권율이 서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당겨 안았다. 넉넉한 품에 빨려들어 가자, 그의 뺨이 목덜미에 닿았다.


“고마워요.”

 

 
조금 틈을 벌린 그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날 아빠로 만들어줘서.”

그의 말끝이 크게 흔들렸다.


“율이 씨.”

“사랑해. 정말 사랑해. 서연아.”

그는 서연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1등을 거머쥔 사람처럼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번쩍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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