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시간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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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시간이 필요해
2023.03.16.
어린 시절 수박씨를 잘못 삼키는 날이면 서연은 밤새 걱정했었다.
배 속에서 수박이 싹을 틔우면 어쩌나 하고.
그러나 다음날이고, 그다음 날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납작한 배를 쓱쓱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아직 내 배 속에 있어? 진짜, 거기 있는 거 맞아?’
잔뜩 상기된 권율의 얼굴을 보며 서연은 뜬금없이 옛 생각에 사로잡혔다.
분명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걸 확인했는데. 예전 그때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서연 씨. 우리 파티해요.”
이제 목덜미까지 붉어진 그의 모습에 문득 궁금해졌다.
“율이 씨.”
“상큼한 아이스크림 사러 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요.”
감동으로 가득 찬 그의 까만 눈동자를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도대체 아기가 언제 생겼을까요?”
“…….”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까.
오만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서연의 머릿속을 점령해갔다.
어떤 운명의 끈으로 묶여 부모와 자식으로 정해진 것일까. 괜찮은 부모가 되지 못하면 어쩌지? 일 때문에 아이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선 사람처럼 서연은 막막하기만 했다.
이 길의 중간에 얼마나 많은 난관이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불안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자 서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5주 2일이라고 했지만.”
권율은 서연의 턱 끝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잇새에 물려 있던 아랫입술이 톡 하고 빠져나왔다. 그는 서연의 붉어진 입술을 살살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수정할 때 변수가 있을 수 있어요.”
그는 날짜를 계산하는 사람처럼 잠시 허공을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서연의 입술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14, 15, 16일 중의 하나일 거예요.”
구체적인 날짜가 특정되자 서연이 사레에 걸린 듯 헛기침을 해댔다.
“감기 기운 있어요?”
권율의 커다란 팔이 서연의 어깨를 망토처럼 둘러쌌다.
“아, 아니요. 그냥 좀 민망해서요.”
“민망하기는요. 그런데 그것도 정확하지는 않아요.”
권율이 서연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사실 거의 매…… 흡.”
그의 다음 말은 서연의 손에 제대로 막혀버렸다.
“내가 괜한 걸 물어서는. 흐흠. 이러다 주차장에서 시간 다 보내겠어요.”
“어디 가고 싶은 곳이나,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먹고 싶은 거?
언제 심각했었냐는 듯 서연의 머릿속이 다양한 메뉴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먹고 싶은 것은 확실했으니까.
“꽃등심 있잖아요. 마블링이 촘촘하게 박힌 걸로요. 그리고 아!”
후식은 인절미여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말하고 나니까. 으. 못 참겠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파르르 떨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서 가요. 내가 다 사줄게요.”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안전벨트를 매주는 그의 행동에 서연이 빙그레 웃었다.
‘오늘은 더 다정하네.’
특별한 소식을 들어서일까.
평소와 다름없는 그의 행동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제일 맛있는 곳으로 데리고 갈게요.”
이런 완벽한 남자가 내 남자라니. 괜히 뿌듯한 마음에 안전벨트를 만지작거렸다.
“어디 불편해요?”
“아니요.”
“이제는 작은 거라도 다 나한테 맡겨요. 뭐든지 내가 다 할 테니까.”
더욱 깊어진 그의 눈동자가 말했다.
어찌나 든든한지 서연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들었죠?”
“뭐를요.”
“나한테 한서연 보호자님. 그랬잖아요.”
기쁨에 찬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진짜 남편으로 인정받는 기분이었어요.”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 권율의 모습 때문일까.
서연은 첫사랑을 시작하는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율이 씨도 너무 좋아하고, 다이어트 걱정 없이 실컷 먹어도 되고. 임신…… 괜찮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알밤이가 좋겠어요.”
“알밤이요?”
“태명이요.”
아들인지 딸인지 알 수 없지만, 순간 동글동글한 알밤이 떠올랐다.
“율이 씨 한자가 ‘밤 율’은 아니겠지만. 율이의 아이니까 알밤이. 어때요?”
“알밤이, 알밤이라.”
핸들을 돌리던 그가 태명을 여러 번 중얼거렸다.
“어! 좋은 거 같아요. 부르기도 쉽고. 귀엽고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알밤이의 존재를 몰랐었는데. 이렇게 부모가 되다니.”
여전히 낯선 서연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최고로 맛있는 꽃등심을 먹으면.”
“…….”
“이상한 마음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정답 같은 그의 말에 설득당한 듯 서연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장식이 거의 없는 흰 블라우스.
거기다 베이지색 핀턱 롱 스커트를 입은 서연이 거울 앞에서 긴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렸다.
잔머리 하나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깔끔하게 쓸어올리자 진주 귀걸이가 작은 종처럼 달랑거렸다.
“서연 씨. 다시 생각해 봐요.”
“몸이 안 좋으면 몰라도,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난 이런 행사가 정말 싫어요. 시험 좀 붙었다고 친척들 만나는 것도 우습고요.”
권율은 처음부터 합격을 기념하는 집안 행사를 반대했었다.
하지만 석구는 결혼 전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뜻을 꺾지 않았다.
“그 멀리까지 서연 씨 데리고 가는 거 불안해요. 초기에는 조심해야 하는데.”
“율이 씨도 알잖아요. 입덧은커녕 식욕만 폭발하고 있다고요.”
남들은 입덧으로 몇 달씩 고생한다는데, 서연은 매일 1일 2식으로 고기를 먹었다.
처음에는 임신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고기를 못 먹으면 입맛이 사라지는 걸 발견하고는 대놓고 고기만 찾았다.
삼시세끼를 포식해서 그런지, 서연의 컨디션은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그냥 나 혼자 갔다 올게요.”
“아. 왜요. 난 율이 씨랑 당일치기 여행 가는 거 같아서 좋단 말이에요.”
가지 말라고 아무리 말려도 서연은 갈 생각이었다.
가뜩이나 연희의 만류로 돕지도 못했는데 불참이라니. 연희에게 미안한데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어른들께 임신했다는 말도 안 했는데. 아프다고 핑계 대기도 그렇고요.”
“차라리 이번 기회에 임신한 거 말하면 어때요?”
“그건 좀…….”
지금도 잘 지내고 있는데. ‘이건 조심해라’, ‘저건 먹지 말아라’ 등등의 염려가 귀찮았다.
게다가 임신 사실을 완전히 체감하지 못한 상황에서 가족들의 관심을 받는다고?
생각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도 싫단 말이에요.”
“무슨 오해요?”
“임신해서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그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가능하다면 결혼식 때까지는 비밀로 했으면 했다.
안 그래도 7살이라는 나이 차이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텐데.
속도위반이라는 말도 안 되는 오해로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신경 쓰여요?”
부드러운 그의 손길이 서연의 하얀 목덜미를 매만졌다.
“이번에 가짜 열애설 터지고 나서 알았어요.”
“뭐를요.”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내가 잘못되기를 가장 바라고 있다는 걸요.”
사실 ‘가짜 열애설’의 주동자였던 보라가 말해준 조력자가 알고 보니 지인이었다.
다정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사실을 부풀렸었는데.
결혼 전 임신 사실을 밝힌다? 그것도 초기에?
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혼식 전까지는 티 내고 싶지 않아요. 신혼여행도 일정대로 가고요.”
“장거리 여행은 어렵지 않을까요?”
존중과 반대 사이에서 고민하는지, 권율의 눈썹 끝이 움찔거렸다.
“결혼까지 한 달도 안 남았잖아요.”
“…….”
“평생 한 번뿐인 신혼여행인데 가고 싶어요.”
입술을 꾹 누르며 말을 삼킨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고민해 봐요. 우리 셋 다 좋은 방향으로요.”
“내가 고집부리는 거 같아요?”
“아니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커다란 손이 목덜미를 가볍게 받치며 촉하고 입을 맞췄다.
“첫째도, 둘째도 서연 씨 안전이에요. 그건 무조건이에요.”
알밤이와 상관없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가 조금 더 깊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서연 씨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방향으로.”
달콤한 입맞춤에 스르륵 눈을 감았다.
“같이 생각해 봐요.”
“율이 씨.”
서연의 손가락이 그의 턱선을 덧그리며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예쁜 말만 해요.”
스치듯 맞닿은 입술 사이로 작은 바람이 일었다.
그의 따듯한 숨결이 어찌나 좋은지, 서연이 그의 허리를 슬쩍 당겨 안았다.
“율이 씨 입술. 더요.”
평소처럼 부드럽게 다가가 빈틈없이 파고들려던 찰나.
그의 입술이 쪽하고 떨어졌다.
“서연 씨.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서연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쳐다보며 빠르게 시간을 계산했다.
“10분.”
그의 가슴팍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남았어요.”
“10분이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가슴에 이마를 붙였다.
동그랗게 말아 올린 머리가 그의 팔을 간지럽히자 넓은 어깨 끝이 작게 흔들렸다.
“우리 율이는 정말 포근해.”
늘 하던 대로 듬직한 그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붙였다.
일정하지만 빠르고, 저절로 기운이 나는 역동적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그의 등줄기를 느긋하게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온몸에 힘을 빼고 그에게 빈틈없이 닿았다.
“서연아.”
“으음.”
“이러면 좀.”
나직한 숨을 쏟아낸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음?”
“힘든데.”
서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번쩍 떠졌다.
“아…… 아!”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과감할 수 없는 현실과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는 아쉬움에 천천히 틈을 벌렸다.
“미안. 내 생각만 했어.”
“그냥. 보고만 있어도 너무 좋으니까.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린 그가 헛기침하자 서연도 괜히 팔을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그럼 이제 갈까?”
서연이 시선을 피하며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잠깐만…… 혼자 있게 해줘.”
난감한 그의 얼굴에 서연은 얼른 몸을 돌렸다.
“아! 어어. 난 거실에서 기다릴게.”
서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뚝딱거리며 방을 나갔다.
“맞다. 핸드폰이랑 가방!”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빼꼼 방문을 열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권율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미안.”
빛의 속도로 화장대 위에 물건을 챙겨서 다시 나갔다.
10분의 기다림, 그리고 출발.
고속도로 위에서 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가다 서기를 반복했지만, 짜증은커녕 즐겁기만 했다. 그와 함께라면 매 순간이 데이트였으니까.
“늦지 않게 도착해서 다행이에요.”
“이제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
“아니다. 차라리 엄마한테만 말할까요?”
“나 정말 시간이 필요해요.”
아직 적응 중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그의 손등에 뺨을 비볐다.
“숟가락도 들지 말고, 앉아만 있어요.”
“알았어요. 가만히 앉아만 있을게요.”
서연은 여러 번 약속을 한 후에야 석구가 빌려놓은 회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율이 씨. 난 어머님께 먼저 가볼게요.”
그와의 약속은 약속이고, 며느리의 도리는 도리였다.
마음이 급해진 서연은 그를 석구에게 보내고, 연희를 찾아 돌아다녔다.
바로 그때.
“어? 여긴 왜.”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의 등장에 서연이 얼른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앞서가는 사람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