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왜 이렇게 촉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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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왜 이렇게 촉이 좋아
2023.03.19.
“호진아!”
반가운 마음에 서연이 호진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동서. 장손 며느리가 어젯밤부터 대기를 했어야지. 지금이 도대체 몇 시야?”
호진이 서연의 등을 토닥거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바쁘다면서 회사는 어쩌고.”
“아. 어머니가 결혼식에 오신 분들께 인사드린다고 하셔서. 겸사겸사 땡땡이쳤지.”
“난 또. 회사에 있어야 할 애가 한복까지 입고 나타나서 깜짝 놀랐네.”
서연이 호진의 연분홍색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옷도 불편한데, 넌 인사나 해. 일은 내가 할 테니까.”
“역시. 장손 며느리는 다르다. 달라.”
장손 며느리라는 말이 어찌나 생소하고, 우스운지.
말하는 호진도 듣는 서연도 연신 킥킥거렸다.
여유를 부린 것도 잠시, 권율의 가깝고도 먼 친척들이 물밀듯 들어왔다.
“우와. 친척이 왜 이렇게 많아.”
“그러니까. 야. 어머님이 부르신다. 여기서 흩어지자.”
석구가 집안의 무슨 회장을 맡았다는 걸 듣긴 했지만,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명절을 제외하고는 가족끼리 단출하게 지내던 서연의 삶이 순식간에 소란해졌다.
‘이런 게 결혼인가…….’
생각에 잠긴 것도 잠시, 습관처럼 권율이 있는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손님맞이가 익숙한 듯 석구 곁에서 인사 중이었다.
어찌나 반듯하고 예의가 바른지, 서연은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누구 남편인지 되게 잘생겼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서연아. 언제 왔어?”
앞치마를 맨 연희가 먼저 다가왔다.
“어머님. 안 그래도 어디 계신지 찾고 있었어요.”
“주방에서 음식 좀 정리하느라고.”
“저도 도와드릴게요.”
늘 하던 일이라며 연희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짧은 안부를 주고받으며 주방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테이블에 하얀 접시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눈치껏 움직이라는 경숙의 조언을 떠올리며, 서연은 블라우스 단추부터 풀었다.
“그래도 뭐든 시켜만 주세요. 어머님.”
팔을 돌돌 걷어붙인 서연이 말했다.
“그럼, 테이블마다 음식이 겹치지 않게 놓아 줄래?”
“그것만 하면 돼요?”
너무도 간단한 지시에 서연이 되물었다.
“그래.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해. 어차피 반나절은 걸릴 테니까.”
이런 천사 같은 시어머니가 있다니.
서연은 사랑스러운 남편을 만난 것도 좋지만, 며느리들의 워너비 같은 연희가 있어서 더 좋았다.
“그리고 서연아.”
“네. 어머님.”
“어른들이 덕담을 이상하게 하셔도 그냥 ‘네’ 하고. ‘감사합니다’ 해.”
“아…….”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람들 때문에 혹시 상처받을까 봐.”
연희는 많이 앓고 난 후에 면역이 생긴 사람처럼 초연해 보였다.
“기분 나빠하면 우리만 손해야. 정작 저 사람들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 못 하거든.”
“전 어머님 말씀만 귀담아들을게요. 오늘 제 짝꿍은 어머님이니까요.”
서연의 말에 연희가 환하게 웃으며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훈훈한 분위기도 잠시, 더는 얘기를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주방이 빠르게 돌아갔다.
“어머님. 창가 자리부터 놓을게요.”
연희에게 받은 앞치마를 작업복처럼 두르고 서연은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창가 쪽 자리를 한 줄 돌았을 뿐인데.
권율에 대한 집안의 기대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내조에 전념하겠습니다.”
손님들의 덕담을 빙자한 잔소리에 서연은 일부러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이미 연희에게 정신 교육을 단단히 받은 후였으니까.
‘차라리 음식을 담는 게 낫겠는데.’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지.
점점 과도해지는 간섭에 서연은 ‘네’와 ‘감사합니다’로 불편한 상황을 모면했다.
“이제 겨우 한 바퀴 돌았네. 하. 허리야.”
넓은 연회장을 뒤로한 서연이 주방으로 향했다.
“힘들지?”
“아니에요. 어머님.”
“앞으로 이렇게 큰 행사는 1년에 한 번쯤 있을 거야.”
“한 번이요?”
“응. 명절이랑 어머님 제사는 따로 있고.”
연희는 알아야 할 행사를 줄줄 읊었다.
소소한 집안 행사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서연은 괜히 주눅 든 사람처럼 발끝만 쳐다봤다. 그러자 눈치 빠른 연희가 빙그레 웃었다.
“내가 너무 겁을 줬니?”
“그게 아니라요. 제가 요리를 못해서요.”
“그건 걱정하지 마.”
“네?”
“아버님도 많이 변하셨고. 일하는 사람이랑 고모님도 있고. 아! 호진이도 있잖아.”
고난의 길을 친구와 함께할 수 있다니. 호진의 요리실력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든든했다.
“그런데 밥은 먹고 왔어?”
적당히 식은 수육을 도마에 올리며 연희가 물었다. 반짝이는 육즙이 도마에 흘러내리자 서연의 식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알밤아. 흥분하지 마. 일단 일 좀 하고. 응?’
분명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는데도. 서연은 저도 모르게 오물오물 입맛을 다셨다.
간절한 마음이 통한 걸까.
연희가 야들야들한 수육 한 점을 겉절이에 돌돌 싸서 서연의 입에 쏙 넣어줬다.
“간이 어때?”
“흐음. 맛있어요.”
“맛있어?”
“네. 완전 꿀맛이요.”
평소 삶은 고기라면 입에도 안 댔었는데.
고소한 육즙과 매콤한 배추가 얼마나 자극적인지. 서연은 입 안에서 사르륵 녹아버린 고기를 씹을 것도 없이 삼켜버렸다.
‘하. 산처럼 쌓아놓고 미친 듯이 먹고 싶다.’
손님 대접이고 뭐고. 수육을 배불리 먹고 싶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아쉬움을 삼키던 그때, 신기하게도 권율이 불쑥 들어왔다.
“서연 씨. 괜찮아요?”
그는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는 서연의 옆에 앉았다.
“힘들지는 않은데…….”
서연이 수육을 눈짓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단번에 의미를 파악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야구 수신호라도 주고받는 듯 권율이 음식을 가리켰다. 그럴 때마다 서연이 눈을 깜빡거리거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
서연의 메뉴 선정이 끝나자 그가 연희를 불렀다.
“우리 배고파요.”
“어. 그래. 뭐 줄까?”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권율은 일회용 접시를 여러 개 가져다 음식이 섞이지 않게 가지런히 담았다.
그러고는 작은 탁자에 보기 좋게 세팅했다.
“서연 씨. 이리 와요.”
입꼬리를 올린 서연이 얼른 의자에 앉았다.
“일하지 말라니까. 아까 쟁반 들고 돌아다닌 거 봤어요.”
“아. 그건…… 한 바퀴밖에 안 돌았어요.”
“이거 먹고, 이제부터 놀아요.”
그가 나무젓가락을 손에 쥐여주자 서연의 마음이 순간 몽글몽글해졌다.
‘우리 남편 최고’를 속으로 외치며 노란 달걀옷을 입은 육전을 입에 넣었다.
“흐흠.”
“꼭꼭 씹어 먹어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고소함에 서연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재빨리 수육을 집어 들었다.
새롭게 데뷔한 먹방 꿈나무처럼 접시를 차례로 비우는 사이, 호진이 재숙과 함께 나타났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지 호진이 자꾸만 킥킥거렸다.
“오셨어요. 형수님.”
“어! 율이 씨.”
“무슨 재미있는 거라도 있으세요?”
권율의 물음에 호진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신기한 일이 있어서요.”
“신기한 일이요?”
“제가 꿈을 꿨는데요.”
꿈 이야기를 하거나 말거나, 서연은 수육을 쌈장에 찍었다.
“어머님도 저랑 비슷한 꿈을 꾸신 거 있죠.”
“무슨 꿈인데요?”
호진이 꿈 이야기를 시작하자 위생장갑을 벗으며 연희가 다가왔다.
“눈처럼 하얗고 커다란 호랑이 꿈이요. 그런데 우리 어머님도 호랑이 꿈을 꾸셨대요.”
“호랑이요?”
호진이 양팔을 끝까지 벌리며 생김새를 설명하자 권율이 서연을 힐끔거렸다.
“정말 신기하다. 나도 얼마 전에 호랑이 꿈꿨는데.”
“엄마도요?”
“응. 꿈에서 상현이 학원 데려다주고 내리는데. 새끼 호랑이가 달려와서 안기더라고.”
그러자 호진이 연희를 쳐다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외숙모님한테 달려든 거라면. 혹시 태몽 아닐까요?”
“태몽?”
“율이 씨가 분가해서 적적한 마음에…… 늦둥이라든가요.”
“어머. 아니야. 호진아.”
얼굴이 새빨개진 연희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호진은 평소에도 엉뚱한 행동을 잘 하더니, 시외숙모인 연희를 대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난 서희랑 너한테 좋은 일 생기는 거 아닌가 했는데.”
“요즘 야근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더욱 노력해보겠습니다.”
새색시 한복을 입은 호진이 얼마나 시원시원하게 농담을 잘하는지, 모두가 덩달아 웃었다.
그러나 웃을 수 없는 오직 한 사람.
서연만이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다들 왜 이렇게 촉이 좋아.’
이건 누가 봐도 노골적인 태몽이었다. 그것도 세 사람이나 똑같은 동물 꿈을 꾸다니.
“서울 가는 길에 어머님이랑 로또 사기로 했는데. 외숙모님도 동참하실래요?”
“로또 좋지.”
남의 속도 모르고, 호진은 누구든 당첨되면 돈을 나누자는 알찬 계획을 떠들었다.
“서연 씨.”
상체를 기울인 권율이 작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알밤이 꿈인 거 같죠?”
서연은 듣는 사람이 없는지 눈동자를 굴리다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가 호랑이 태몽이 뭔지 찾아봐야겠어요.”
“호랑이 태몽? 누가 임신했어?”
분명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서희가 석구와 함께 서 있었다.
“어, 어. 형수님이 호랑이 꿈을 꾸셨다고 해서.”
“아. 엄마도 꿨다는 그 꿈.”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꿈? 무슨 꿈?”
석구의 물음에 서희는 쓸데없이 자세하게 꿈을 설명했다.
“근데 할아버지. 외숙모님도 비슷한 꿈을 꾸셨대요.”
난감한 서연이 눈동자만 굴리는데 호진이 불쑥 끼어들었다.
“서희야. 너희들 혹시 좋은 소식 있는 거 아니냐?”
“아니에요. 할아버지.”
서희와 호진이 동시에 손사래를 쳤다.
“진짜 아니야?”
“그런 걸 뭐하러 거짓말해요.”
거짓말은 아니지만, 말을 하지 않은 서연이 권율의 등으로 얼굴을 감췄다.
그러자 석구의 눈빛이 연희에게로 향했다.
“율이 애미야. 상현이 동생 아니냐?”
“아, 아닙니다. 아버님. 절대요!”
대체 호랑이 꿈이 뭐라고. 마치 용의자를 색출하는 것처럼 석구의 심문이 이어졌다.
“재숙아.”
“아버지!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호진이 앞에서 망측한 소리를 하세요.”
그러자 석구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용의자에게로 향했다.
“율아.”
석구가 권율의 이름을 부르자 서연의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난 아직 공개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요.’
텔레파시를 보내듯 서연이 권율의 등을 꾹 눌렀다.
“율아. 너희 아니니?”
석구의 물음에 흔들리는 권율의 시선이 서연을 돌아봤다.
‘율이 씨. 일단 아니라고 해요. 빨리!’
서연의 간절한 눈빛을 읽은 권율은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아니, 말로 해요. 말로.’
순간 모두의 시선이 권율에게로 쏟아졌다.
“왜 대답이 없어?”
“그게…….”
“혹시 너희들이냐?”
“서연 씨. 미안해요.”
‘하. 이런.’
사과를 전하는 그의 눈동자를 차마 볼 수 없어 서연이 눈을 가려버렸다.
“할아버지, 서연 씨가 임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