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진정한 후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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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진정한 후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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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진정한 후계자
2023.03.23.
서연은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임, 임신이라고?”
석구가 되묻자 권율이 서연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네. 며칠 전에 병원 다녀왔어요.”
“그런 중요한 걸 왜 이제야 말해.”
“아직 초기고. 혼인신고는 했지만, 결혼식을 안 올려서요.”
“법적으로 부부면 됐지. 어차피 결혼식이야 남들 보여주기 아니냐.”
곧 말할 일이었지만, 북적거리는 주방에서 알려지다니.
게다가 연희의 앞에서 임신을 말하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연아. 진짜 임신했니?”
어느새 다가온 연희가 서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 뭐. 아마…… 네. 어머님.”
불건전한 만남으로 생긴 것도 아닌데 서연은 자꾸만 말을 더듬었다.
“축하한다. 서연아.”
환한 미소를 머금은 연희가 서연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복숭아 씨앗처럼 턱을 우그러트린 호진이 울먹였다.
“내가 이모라니.”
“…….”
“아닌가? 이제 큰 엄마인가. 암튼 뭐가 됐든 축하해. 서연아.”
눈물을 펑펑 쏟는 호진을 보며 서연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이상했다.
작은 생명체가 과도한 식욕으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더니, 이제는 꿈의 영역까지?
여전히 낯선 현실에 서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서연아. 몸은 좀 어때. 입덧은?”
다정한 연희의 목소리에 서연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입덧은 없고. 고기가 자꾸 먹고 싶어요.”
“고기?”
“네. 매일 먹어도 또 먹고 싶어요.”
고기가 먹고 싶다는 서연의 말에 석구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여기, 고기 있으면 좀 내와요. 아니다. 너 무슨 고기가 먹고 싶니?”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석구가 물었다.
조금 전 수육을 한 접시나 먹었는데도 서연의 눈앞에 숯불갈비가 어른거렸다.
“갈비요.”
석구가 얼른 카드를 꺼냈다.
“서연아. 너는 여기 있지 말고, 호진이랑 나가서 갈비 사 먹어라.”
“아직 손님들 계시는데요.”
“넌 신경 쓸 것도 없다. 이 카드로 실컷 먹고 놀아라.”
석구의 이야기에 제일 신난 건 호진이었다.
“할아버지. 저희 한우로 먹을게요.”
“오냐. 제일 비싸고 좋은 걸로만 먹어라. 율이랑 서희도 같이 따라 나가고.”
석구는 달뜬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 허둥지둥 주방을 나갔다. 그러고는 노래방 기계에 연결된 마이크부터 켰다.
“아아. 아. 잘 들리십니까?”
왕왕 울리는 석구의 목소리에 서연의 귀가 커다래졌다.
“한국대 수석이자 행정고시 최연소 합격에 빛나는 우리 장손과 결혼한 한서연은.”
한서연?
갑자기 등장한 자신의 이름에 서연이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뉴욕 최고의 패션 학교를 졸업한 후에 의류 회사인 하니블랙을 세우고.”
그동안 무슨 조사를 얼마나 했는지.
석구는 서연의 작은 수상 이력까지 줄줄이 읊었다.
“그런 훌륭한 우리 장손 며느리가.”
궁금함을 참지 못한 서연이 주방 문을 열어 빼꼼 고개를 내놨다.
“임신했습니다!”
마치 회사의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를 따낸 것처럼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아니, 이럴 일이 아닌데.’
서연은 민망하면서도 난감했다.
“이 늙은이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기분 최곱니다. 건배합시다. 건배!”
흥분에 찬 목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하, 부담스럽다.”
“야. 율이 씨보다 나이도 많은데. 임신이 안 되면 그게 더 스트레스지. 안 그래?”
오히려 잘된 일이라며 호진이 서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암튼 네 덕분에 일도 안 하고. 나도 오늘부터 분발해야지.”
주먹을 말아 쥔 호진이 파이팅을 외치자 뒤에 서 있던 서희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권율.”
“음?”
“형이 반지 사러 갈 때도 말했지. 좋은 계획 있으면 미리 공유 좀 하자고.”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하. 형이 이런 걸로 너한테 뒤처져야겠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서희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달력을 확인했다.
“뭐 해?”
“뭐 하긴. 부인들끼리 절친인데. 우리 애들도 친구로 만들어주면 좋잖아.”
“어?”
“앞으로 5개월 안에 성공하면 애들끼리 친구 가능. 아직 여유 좀 있네.”
서희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찔러 넣으며 권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율아. 아빠 된 거 축하한다.”
“고마워. 형.”
사람들의 축하 인사를 뒤로하고 네 사람이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석구가 서연에게 손짓했다.
“부르셨어요?”
“서연아.”
석구가 반쯤 남은 술잔을 마저 비우며 말했다.
“다음 주 수요일 오후에 사무실로 나오거라. 너 혼자.”
혼자?
내심 의아했지만, 서연은 얼른 대답했다.
“네. 할아버님.”
***
수요일 오후, 강남 K 타워 꼭대기 층.
일찌감치 회의를 정리한 서연이 막 석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흐릿한 한약재 냄새와 삐죽 솟은 동양란의 꽃대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서연은 탁자 사이에 끼워진 권율의 증명사진을 내려다봤다.
“이 사진 뭐야. 너무 귀엽잖아.”
어린 권율의 증명사진을 핸드폰으로 찍던 그때, 철컥 문이 열렸다.
“오래 기다렸니?”
석구가 매서운 눈매를 가진 남자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다.
“방금 왔습니다.”
“내 사무실은 처음이겠구나.”
“네. 할아버님.”
석구가 상석에 자리를 잡자, 그 옆에 정체불명의 남자가 그림자처럼 섰다.
‘사무실이라 그런가. 어딘가 달라 보이시네.’
잔뜩 긴장한 탓일까.
석구의 굽은 어깨와 주름진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영화 속에 나오는 보스처럼 위압적으로 보였다.
“장 비서야.”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건장한 남자가 봉투 하나를 서연 앞에 내려놨다.
“열어 봐라.”
가느다란 서연의 손가락이 하늘색 서류 봉투를 천천히 열었다.
봉투에 든 서류를 꺼낸 서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할아버님. 이건…… 건물 등기 권리증인데요.”
게다가 건물의 소유주 이름이 한서연이었다.
“임신 선물로 주는 거다.”
“네?”
출산용품도 아니고, 임신 선물로 건물을?
석구의 남다른 스케일에 서연은 어리둥절했다.
“안 그래도 집을 안 받겠다고 해서 적당한 걸 고민하던 차였다.”
“그래도 이건, 너무 과분합니다.”
“과분하기는. 이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살겠니.”
느긋하게 등을 기댄 석구가 중얼거렸다.
“내가 가진 재산이 말이다.”
석구는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목록을 읊기 시작했다.
‘아니. 그 건물이 할아버님 거였어? 도대체 재력이 어느 정도이신 거야.’
나름 성공한 사업가라고 자부했었는데.
서연의 경제력은 석구에 비하면 구멍가게도 어림없었다.
“내가 너에게 일급 비밀을 알려주는 건.”
놀란 토끼 눈이 된 서연을 쳐다보며 석구가 말을 이었다.
“네가 이걸 감당할 수 있는 장손 며느리라서다.”
“네?”
“솔직히 율이 애미나 서희 애미는 이런 쪽으로는 영 아니거든.”
순간 커다란 바위에 억눌린 듯 서연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이제는 나, 재형이랑 율이. 그리고 너. 이렇게만 아는 거다.”
아무리 아끼는 손자와 결혼했다 한들, 특급 대외비를 알려주는 석구의 의도가 궁금했다.
서연은 그의 참뜻을 알고 싶어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그러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석구를 응시했다.
“내가 율이 결혼 상대에게 바란 건 오직 하나였다.”
“…….”
“내 재산을 제대로 지키고 이어나갈 사람.”
“제가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욕심만 부리면요?”
권율과 혼인신고를 하고 임신을 했지만, 사람 일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드러내놓다니.
서연은 석구의 진짜 속마음이 알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제 그릇이 있다.”
서연의 눈이 어느 때보다 빛났다.
“배포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고 말지, 남의 것을 탐하지 않거든.”
석구가 서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율이는 몇 년 안에 공직 생활을 시작할 테니. 돈이랑은 멀어져야겠지.”
그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명예직에 가깝다는 말을 덧붙이며 서연을 쳐다봤다.
“율이 성격상 금전적 일에 휘말릴 일은 없을 거다. 그건 걱정이 없다만.”
그건 서연도 수긍하는 바였다.
“아무래도 공무원인 율이가 내 일을 맡는 건 힘들 거 아니냐.”
석구는 소파의 손잡이를 꽉 잡아 쥐며 말했다.
“그래서 율이랑 결혼할 아이를 고르고 골라서 내 일을 물려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재벌 집 딸인 보라를 염두에 둔 건가?
서연은 버거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지금 율이 아범이 이 일을 맡았지만, 천년만년 할 것도 아니고. 알다시피 상현이는 어려.”
이 일의 적임자가 서연이라는 걸 강조하듯 석구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율이가 그러더구나. 적은 돈으로 회사를 시작해 연 매출 700억으로 키웠다고.”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서연은 석구의 다음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똑같은 걸 쥐여줘도 금방 털어먹는 놈이 있고, 열 배, 백 배로 키우는 놈이 따로 있다.”
석구의 예리한 눈동자가 서연을 꿰뚫었다.
“내가 죽기 전에 우리 집안의 미래를 너한테 걸까 하는데.”
“제가 금방 털어먹는 놈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도 부담스러운 상황에 서연이 진심을 내뱉었다.
그러자 석구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네가 털어먹지 못하게 제대로 된 약속을 받아야겠구나.”
“약속이요?”
감당이 안 될 정도의 재산을 원한 것도 아닌데. 그걸 도맡으라니.
서연은 심장이 두근거려 손가락을 꽉 잡아 쥐었다.
“네가 열과 성을 다해 이 재산을 지키고, 자손들에게 물려주겠다는 의지 말이다.”
“그걸 어떻게 받으시려고요?”
당황스러울수록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장 비서야.”
그림자같이 서 있던 남자가 하얀색 봉투를 다시 내려 놓았다.
“읽어보고 이의가 없으면 서명해.”
서명까지?
흔들리는 숨을 입술로 꽉 누르고 서연이 봉투를 열었다.
결혼 계약서라는 서류에는 앞으로 서연의 권리와 의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게 다 뭐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혜택. 거기다 석구가 세운 회사에 이사로 등재됨과 동시에 지분 비율이 순차적으로 늘어난다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제일 마지막 장에 있었다.
서연은 밑줄까지 그어진 굵은 글씨를 읽고 또 읽었다.
― 권율과 이혼하지 않는다. (만약 이혼 시 한서연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는 박탈된다.)
― 아이는 성별에 상관없이 한 명 더 낳는다.
― 한서연이 가진 모든 권리는 자녀가 성인이 되는 시기에 맞물려 순차적으로 양도된다.
사업을 하면서 많은 계약서를 봐왔지만, 이렇게 꼼꼼하고 자세한 계약서는 처음이었다.
거기다 재산이 양도되는 시기와 비율이 얼마나 세분화 되어 있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앞으로는 여기 있는 장 비서가 널 도와줄 거다.”
눈빛이 예리한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덩달아 고개를 숙이던 서연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니블랙을 경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책임감, 죽을 때까지 만져볼까 말까 한 돈.
숨 막히는 부담감과 솔깃한 제안 사이에서 서연은 몹시 흔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저…… 할아버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