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정신없이 훅
(120/130)
120. 정신없이 훅
(120/130)
120. 정신없이 훅
2023.03.26.
“편하게 얘기하거라.”
서연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었다.
석구가 원하는 것이 부의 연속성이라면 그에 걸맞은 내용이 필요했으니까.
“율이 씨와 비율을 달리하더라도 나머지 손자들도 추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네 몫이 줄어들 텐데.”
“가족들과 돈 때문에 감정 상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누군가는 멍청한 선택이라고 할 테지만. 서연은 막 가족이 된 사람들과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관 조항은 있었으면 합니다.”
“정관 조항?”
“등재된 사람들의 만장일치가 없으면 특정인이 양도할 수 없다는 내용이요.”
석구의 주름진 눈가가 잘게 흔들렸다.
“간단히 말해서 마음대로 사고팔지 못하는 겁니다. 강력한 약정처럼요.”
“약정이라.”
“네. 그러면 재산이 흩어질 일도 없고. 돈 때문에 싸울 일도 없을 테니까요.”
사업을 하면서 금전 문제로 틀어지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서연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할아버님이 비율과 시기를 조정해주시면 바로 서명하겠습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 서연을 보며 석구가 피식 웃었다.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구나. 오냐. 좋다. 하지만.”
서연은 석구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누가 더 많이 갖고, 덜 갖고는 무조건 내 마음이다.”
마치 머릿속 장부를 들춰보는 것처럼, 석구가 허공을 향해 눈을 돌렸다.
“서희네야 탄탄한 법무법인이 있고. 거기에 들어간 내 돈도 만만치 않아.”
“모든 건 할아버님 선택이십니다.”
석구의 재산이니 참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뭐든지 첫 번째는 율이. 그다음이 상현이다.”
“네. 할아버님.”
“그리고 서희네는 법무법인에 들어간 돈을 제한 만큼 비율을 조정하마.”
복잡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슬슬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어도 어찌 된 일인지 분위기가 더 심각하고 긴밀해졌다.
“생각했던 것만큼 부동산에 감이 좋구나.”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경험은 돈 주고도 못 산다. 이제야 제대로 된 사람에게 살림을 맡길 수 있겠어.”
석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장 비서에게 손짓했다.
“앞으로 서연이한테 율이 아범이랑 똑같이 보고하고. 회계장부도 보여줘라.”
회계장부까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 와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고 한발 물러나기엔 석구의 표정이 너무도 흡족해 보였다.
‘하. 이렇게 덮어놓고 믿어주시면 더 잘해야 하는데. 어쩌지?’
서연은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의지와 무거운 부담 사이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아, 장 비서야. 서연이한테 숙제 좀 내줘라.”
순간 흔들리는 마음에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건지.
석구는 처음부터 서연이 받아들일 것을 예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숙제요?”
“그럼, 네 말 몇 마디로 될 줄 알았니? 일을 하려면 제대로 배워야지.”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결혼 준비에, 산더미 같은 회사 일이 있는데.
거기다 숙제까지?
‘적게 먹고 적게 가지면 되는데. 뭐하러 또 일을 벌였어.’
서연은 속으로 자신을 원망하면서도 겉으로는 흔들리는 입꼬리를 꽉 붙잡았다.
“신규 계약과 갱신은 직원들이 하니까 보고만 받으면 되고. 네가 신경 쓸 일은 따로 있다.”
어려운 숙제가 나올까 싶어 서연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다 벼락치기로 시험을 보는 사람처럼 ‘제발 쉬운 거’만을 되뇌었다.
“새롭게 매입할 건물이나 신축해야 할 장소를 정해 봐.”
회사의 새로운 먹거리를 결정하라는 석구의 말뜻에 서연이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서연의 가벼운 생각을 비웃듯 장 비서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건넸다.
“이건 미리 생각해둔 곳들이다. 선정하고 싶은 이유와 아닌 이유를 작성해서 가져와.”
하마터면 깊은 탄식이 터져 나올 뻔했다.
“기한은…… 언제까지 할까요?”
서연은 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천천히 말아쥐며 물었다.
어찌 됐건 자신을 높이 평가해주는 석구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그건 네 마음이다. 하지만 얼마 만에 가져오는지는 봐야겠지?”
알아서 하라는 게 제일 무섭다고 했던가.
차라리 기한을 정해주면 그만큼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을 텐데.
‘하. 쉬운 게 하나도 없네.’
이미 번듯한 직장이 있는데, 욕심을 부려 더 좋은 직장에서 ‘투잡’을 뛰면 이런 기분일까.
서연은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어 눈동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늦지 않게 검토하겠습니다. 할아버님.”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서연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석구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
일요일, 암막 커튼이 드리워진 침실.
잠버릇이 상당한 서연은 권율의 품을 집 삼아 소라게처럼 자고 있었다. 분명 정오까지는 일어날 생각이 없었는데.
‘권 알밤. 너 진짜 이럴래?’
무슨 배꼽시계에 알람이라도 맞춰놓은 듯 서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할 것도 없었다. 평소 아침을 먹는 7시일 테니까.
서연은 정수리에 닿는 권율의 숨결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너 진짜 나중에 뭐가 되려고 이래. 이렇게 덮어놓고 먹으면 큰일 난다고.’
젤리 곰도 아닌 콩알만 한 녀석에게 다이어트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일어났어요?”
웅웅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뺨에서 느껴졌다.
“내가 너무 꼼지락거렸죠. 더 자요. 율이 씨.”
“아니에요.”
“나도 아니에요.”
피식하는 그의 얕은 숨소리에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기말시험 공부하느라고 피곤하잖아요. 얼른 눈 감아요. 나도 더 잘게요.”
서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목이 제대로 잠긴 그의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배고프면 말해요. 아침 해줄게요.”
그러고는 그의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엄청 피곤한가 보네. 하긴 잠든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서연은 눈동자를 올려 그의 매끈한 턱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가 덩달아 일어날 게 틀림없었다.
그는 같이 있어도 서연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금방 찾으러 다니는 남자였으니까.
‘아무리 배가 고파도 딱 1시간만 참자. 정 안 되겠으면 30분이라도.’
그가 더 잘 수 있도록 입술을 꾹 누르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연의 의지와는 달리, 미쳐버린 허기가 그녀의 뇌를 점점 점령해갔다.
어두운 머릿속이 순간 환해지더니, 식당의 메뉴판이 단숨에 그려졌다.
‘집에서 만든 김밥 먹고 싶다. 엄마한테 문자라도 보낼까?’
잠은 도망간 지 이미 오래였고, 서연의 코끝에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기분이었다.
서연은 살짝 몸을 돌려 핸드폰을 집으려다 생각에 잠겼다.
지금 경숙에게 문자를 보낸다면. 분명 무슨 김밥을 먹겠느냐고 전화가 올 테고. 그러면 결국 그의 잠을 깨우는 꼴이었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알밤아. 우리 아빠를 위해서 조금만 참아보자. 알았지?’
그러나 얄팍한 인내심이 자꾸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서연아.”
“자꾸 깨워서 미안.”
“배고파?”
“아, 아니.”
입덧인지 먹덧인지 모를 식욕에 사로잡혀 피곤한 남편을 깨우다니.
서연은 괜히 민망해져 고개부터 내저었다.
“그럼 다른 거…… 원해?”
“으음?”
말랑하고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이런 거?”
서연의 머리가 저절로 뒤로 젖혀졌다.
“아니면 이건 어때?”
커다란 상체가 앞으로 웅크리자 그의 입술이 코끝에 와 닿았다.
“아 참. 이것도 있었지.”
말해놓고도 민망한지.
권율이 여기저기에 입술 도장을 찍으며 푸스스 웃었다. 그러고는 새들이 인사를 주고받듯 콕콕 가벼운 입맞춤을 주고받았다.
“율아.”
입가를 간질이는 숨결이 좋아 서연이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가 서연을 빈틈없이 끌어안으며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거야.’
빙긋 웃은 것도 잠시, 그녀의 머릿속에 순간 달력이 그려졌다.
분명 있어야 할 만남이 여러 번인데. 꽤 오랫동안 건너뛴 채 아무것도 없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서일까.
숨이 넘어갈 듯 먹고 싶었던 김밥을 능가하는 새로운 것이 얼른 자리를 꿰찼다.
서연은 망설일 것도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권율의 뒷머리를 느릿하게 긁어내렸다.
길고 가볍게, 짧고 깊게. 그것도 아주 여러 번.
그러자 오뚝한 그의 코끝이 목덜미 안쪽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율아.”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자 커다란 상체가 들렸다.
조금 전까지 졸음이 가득했던 눈동자는 어디로 가고. 그의 까만 눈동자가 묘한 열기로 빛나고 있었다.
“있잖아…….”
다음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가 하얀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달뜬 열기로 데워진 그의 턱 끝이 목덜미에 닿자 서연의 어깨 끝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우리.”
알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감정 때문일까. 그의 흔들리는 숨결 때문일까.
서연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듯 그의 템포에 박자를 맞췄다.
그의 뒷머리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강아지 털같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졌다.
손가락을 구부려 한껏 움켜쥐었다 느슨하게 풀었다가를 반복하며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붙였다.
그러자 청량한 그의 체향이 코끝에 훅 끼쳤다.
모든 걱정과 긴장감이 날아가고, 안식처를 찾은 듯 온몸이 포근해진 순간.
서연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사랑해. 율아.”
“나는 더 많이.”
귓가를 달구는 그의 대답과 심장을 울리는 그의 숨소리. 거기다 사각거리는 이불 소리가 마음을 간지럽혔다.
흐트러진 잔머리를 조심히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였다.
적게 벌어진 커튼 사이로 기다란 햇살이 권율의 넓은 어깨 끝에 걸렸다.
서연은 그 햇살을 움켜잡으며 그곳에 입술을 옮겼다.
바로 그때, 흠칫한 그의 상체가 순식간에 들렸다.
덩달아 딸려 올라간 서연의 몸이 그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서연 씨…… 배고프죠?”
지금 이 상황에서, 갑자기?
난데없는 그의 태세 전환에 서연의 상체가 뒤로 젖혀졌다.
설명을 요구하며 눈을 마주하자, 그의 잇새로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난 아무래도 양심이 없는 놈인가 봐요.”
여기서 양심은 왜?
서연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참아야 하는데. 도무지 참아지지 않아서요.”
‘그걸 왜 참아요’라고 말하려다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임신 초기라 조심해야 하는데. 이렇게 부주의한 아빠라니. 하.”
“아니. 율이 씨. 그럴 필요가…….”
서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어깨에 매미처럼 매달려 있던 서연도 졸지에 거실로 나왔다.
여전히 가쁜 숨을 내뱉는 그가 서연을 소파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는 얼굴을 마주 보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등을 돌린 채 연신 마른세수만 했다.
“율이 씨, 알잖아요. 나 입덧도 없고 컨디션도 좋은 거.”
전혀 문제없다는 말을 내뱉으려던 찰나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 나겠어요.”
“?”
“찬물로 정신 좀 차리고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