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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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2023.03.30.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하지만 권율은 재빨리 욕실로 향했다. 뜨겁게 날뛰는 기운을 감당할 수 없어 얼른 문부터 닫았다.
‘사춘기도 아니고. 하…….’
한쪽 벽면을 채운 거울을 보며 권율이 밭은 숨을 내뱉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눈동자와 목울대가 다른 사람을 보는 듯 생경하기만 했다.
그러다 얼른 정신을 차려 수전의 레버를 올렸다.
귓가를 때리는 세찬 물소리가 그만 정신을 차리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대충 옷을 벗어 던지고, 요란하게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에 섰다.
‘참을 수 있잖아. 아니 참았어야지.’
날 선 질책과 어르듯 달래는 말을 되뇌어도. 영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안 되겠어.’
한여름도 아닌 겨울의 초입.
권율이 수전의 레버를 찬물로 완전히 돌려버렸다.
순식간에 바뀐 온도에 어깨가 움츠러들 만도 한데. 오히려 미지근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소나기처럼 퍼붓는 물줄기에 시야가 흔들리자 권율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달뜬 상념은 달아날 생각이 없는 건지. 꽤 오랜 시간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이제 끝인가.’
겨우 안심하던 그때였다.
분홍빛으로 물든 서연의 하얀 목덜미가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여리여리한 그녀의 목에 난 보송보송한 솜털.
거기에 얼굴을 가져다 붙이면 작은 붓으로 살살 쓸어주는 기분인데. 잠깐의 방심을 틈타 또 눈앞이 흔들렸다.
“하. 미치겠다.”
권율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흠칫했다.
찬물로 정신을 차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이번에 병원에 가면 확실히 물어 봐야겠다. 그전까지는 조심 또 조심하고. ’
어깨에 감각이 없어질 때쯤 권율은 대충 수습이라는 걸 했다.
“어디…… 가려고요?”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서연은 이미 나갈 준비를 마친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실 아까부터 집에서 만든 김밥이 먹고 싶었어요.”
“말을 하죠. 김밥은 안 만들어 봤는데. 엄마한테 전화할까요?”
엄마라는 말에 서연이 손을 세차게 내저었다.
“아니요! 일요일 아침부터 무슨. 어머님께 민폐예요.”
큰일 날 소리라는 듯 서연이 팔로 커다란 X자를 만들어 보였다.
“안 그래도 씻기 전에 엄마한테 전화했어요.”
티셔츠에 머리를 집어넣는 권율을 향해 서연이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 집에 가서 김밥 먹고 데이트해요.”
“가고 싶은 곳 있어요?”
“그냥 밖이면 돼요.”
서연이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밖이 꽤 쌀쌀해요.”
“그래도요. 무조건 밖이요.”
혹시 기분이 상했나?
권율은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과했나 싶었다.
“화났어요?”
“아니요.”
“근데 왜 눈도 안 마주쳐요?”
“그, 그건.”
머뭇거리던 서연의 뺨이 순식간에 발그레해졌다.
“율이 씨만 보면 나도 모르게…….”
“모르게?”
“안고 싶으니까.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어서 그래요.”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서연의 말에 권율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서연 씨. 나는요.”
권율이 서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미친놈이 되는 거 같아요.”
갑작스러운 미친놈 타령에 서연의 얼굴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한서연한테 미친놈이요. 내 머릿속이 얼마나 미쳤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요.”
손바닥으로 서연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빈틈없이 당겨 안았다.
“병원에 가서 만나도 되는지 물어보고 허락을 받으면.”
생각만 해도 심장이 요동치자 권율이 콩하고 서연과 이마를 맞댔다.
“그때는 정말…….”
다음 말을 굳이 내뱉지 않았다.
맞닿은 심장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안아주기.”
곧게 뻗은 등줄기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서연이 말했다.
“음. 이렇게 안아줄게.”
순식간에 상체를 기울여 공주님처럼 서연을 안았다.
“어머니 집까지 그냥 이렇게 안고 갈까?”
권율의 가슴에 살포시 머리를 기댄 서연이 어리광을 부리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권율이 서연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빨리 김밥 먹으러 가자. 우리 공주.”
“으. 공주 싫어! 이 나이 먹도록 아빠가 공주라고 불러서 얼마나 부끄러운 줄 알아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급발진하는 서연이 얼마나 귀여운지.
권율은 서연의 정수리에 턱을 붙이며 푸스스 웃었다.
***
기말고사가 모두 끝난 조용한 캠퍼스.
“율아. 떨려?”
“응. 그런데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권율은 여느 때보다 한산한 중앙도서관 휴게실에서 원준과 함께였다.
“너도 참. 대단하다.”
“왜?”
“내일 결혼하는데 공부가 돼? 그것도 방학 중인 학교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원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권율이 소리 없이 웃었다.
“서연 씨랑 알밤이 먹여 살리려면 한 자라도 더 봐야지.”
“알밤이? 너 강아지 키워?”
구경 가도 되냐는 원준의 말에 권율은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뭐야. 고양이였어?”
“하. 동물 아니고.”
“동물이 아니면 그럼 뭔…… 허!”
눈이 동그랗게 커진 원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너. 혹, 혹시!”
원준이 제 머리를 잡아 쥐며 소리쳤다.
“야. 여기 도서관이야.”
권율이 ‘쉿’이라고 말하자 흥분한 원준이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서는 안 되겠다. 너 좀 나와 봐.”
밖으로 끌려오다시피 나오자 원준이 바짝 다가섰다.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
“뭘.”
“너, 너…… 했어?”
아무리 친구라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이야.
하긴 그의 연애사를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었다.
“결혼했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후우. 나한테 현실 조카가 생기다니. 이럴 수가.”
원준의 입에서 나온 조카라는 호칭에 권율의 입꼬리가 쓱 말려 올라갔다.
“그래. 너 내년 여름 되기 전에 삼촌 된다.”
“야! 넌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지금 얘기해.”
“서연 씨가 불편해해서. 가족 아닌 사람한테 말하는 건 네가 처음이야.”
원준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뭐가.”
“분명 내가 너보다 키스는 먼저 했는데.”
빠른 출발이었음에도 여전히 텅 빈 옆자리 때문일까.
원준이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네가 아빠가 되는 동안. 하아, 난 뭐 한 거냐. ”
“원준아.”
“…….”
“안 그래도 서연 씨가 지난번 소개팅 실패한 거 신경 쓰인다고.”
원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권율이 말을 이었다.
“내일 식장에서 친한 동생이랑 소개팅 할 거냐고 물었어.”
“하. 너는. 그렇게 중요한 걸 왜 닥쳐서 말해.”
연이어 들려오는 희소식에 원준은 과부하에 걸린 듯 허둥댔다.
“율아.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그러게. 내일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내일을 입에 담는 순간 권율의 머릿속에 서연이 떠올랐다.
그러자 꾹꾹 눌러놓은 열기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뭐지?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하는 이 얼굴은?”
“내일이 공식적인 첫날밤이니까.”
첫날밤이라는 단어를 내뱉어서일까. 권율의 눈두덩이가 화끈거렸다.
“첫날밤? 그럼 아빠는 어떻게 된 거야?”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해맑다고 해야 하나.
연애 경력이 전무한 원준을 쳐다보며 권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준아.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
“왜. 내가 뭐 어때서.”
“내일이 오기 전에 뭐라도 배워서 가자.”
권율은 형들에게 들었던 꿀팁을 슬슬 풀어놓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야기를 전하면 전할수록 권율의 마음 어딘가가 뭉근하게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벌써부터 이러면…… 하.’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생각, 정말 한계였다.
신혼여행까지 기다리기는커녕 지금 당장 모든 걸 쏟아붓고 싶었다.
“더 자세한 건 내일 또 얘기하자. 내가 웨딩카 기가 막히게 꾸며서 아침에 데리러 갈 테니까.”
“…….”
“야. 듣고 있어?”
“으음?”
“이거 미친놈처럼 눈빛이 왜 이래.”
권율은 자신의 머릿속을 원준에게 들킨 것 같아 얼른 표정을 고쳤다.
“어? 아니야. 그런데 서연 씨는 친구들이 데리러 오기로 했어.”
“누나랑 따로 가게?”
따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서연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서연 씨가 서프라이즈하고 싶다고 해서. 아예 숍도 다르고, 어떤 드레스 입는지도 몰라.”
“남들 다 찍는 결혼사진도 안 찍더니. 역시 누나는 뭔가 특별하시다.”
원준이 엄지를 들어 올리자 권율이 피식 웃었다.
“몇 시까지 갈까?”
“아침 7시. 멀쩡하게 하고 와라.”
결국 두 사람은 도서관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 내일을 기약했다.
원준과 헤어져 서연을 데리러 가는 길에도, 나란히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도.
흡사 구름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권율은 자꾸만 발밑을 내려다보며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이미 법적으로는 부부인데도.
지금까지의 결혼생활이 리허설이었던 것처럼 묘한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서연 씨. 느껴져요?”
잠들기 전, 서연의 정수리에 턱을 가져다 붙이며 권율이 속삭였다.
“율이 씨, 왜 이래요?”
결혼식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돼서일까.
점점 줄어드는 시간에 그의 심장이 뻐근할 정도로 요동쳤다.
“컨디션, 괜찮아요?”
서연이 권율의 심장을 지그시 누르며 물었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봉긋한 서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말해두는데요.”
“?”
“난 평생 서연 씨만 보고, 서연 씨만 사랑할 거예요.”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내리자 반달로 휘어진 서연의 눈매가 보였다.
“난 이미 율이 씨랑 한 몸이에요.”
“…….”
“하나라는 증거가 이미 내 안에 있잖아요.”
세상의 모든 사탕을 한꺼번에 깨물어 먹은 사람처럼, 권율은 서연의 그 말이 다디달았다.
“자야 하는데. 그래야 내일이 빨리 오는데.”
서연의 눈썹에 입술을 비비며 권율이 속삭였다.
“난 잠이 도망갔어요. 율이 씨도요?”
서연을 빠듯하게 끌어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숍에 다 말해놨으니까. 내일 최고로 멋지게. 알았죠?”
“알았어요. 우리 이만 자요.”
하지만 눈을 감으면 또 할 말이 생각나고.
진짜 자겠다고 말한 지 10초도 되지 않아 다시 입이 열렸다.
“캐리어에 빠진 건 없겠죠?”
“여권도 다 챙겼어요.”
“결혼식도 결혼식인데. 율이 씨랑 놀러 갈 생각하니까. 너무 설레요.”
앞으로의 인생 계획보다는 뭘 먹을지, 뭐 하고 놀지에 대한 소소한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나른하던 목소리가 뚝뚝 끊기더니 점점 희미해졌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반쯤 깨어 있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도 뒤척이는 서연을 습관처럼 안고 또 안았다.
바로 그때.
쿵, 쿵쿵쿵―.
‘어디서 못이라도 박나?’
권율은 흐릿한 의식 속 어딘가에서 생각이라는 걸 했다.
그러다 지진이 난 것처럼 침대 옆 탁자가 흔들렸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한쪽 눈을 찌푸린 권율이 제 팔을 베고 있는 서연의 머리를 조심히 내려놨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순간 뒷덜미가 싸늘해졌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권율이 세차게 눈을 비볐다.
“서연 씨! 서연 씨!”
“…….”
“우리 늦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