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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새로운 제안 (126/130)


외전 3. 새로운 제안
2023.04.16.



 
화가 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서연의 목구멍까지 험한 말이 차올랐다.

하지만 서연은 입안을 맴도는 그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도 관심이지만, 아이 앞에서 큰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현아. 아까 쿵 했어?”

“엄마. 이현이 아야.”

“어디. 여기?”

단풍잎같이 작은 손이 뒷머리를 쓱쓱 문지르자 서연의 눈가가 대번에 뜨거워졌다.


“엄마가 호 해줄게. 우리 이현이 아프지 마라. 호.”

서연은 일부러 더 크게 호호 소리를 내며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강아지풀처럼 가벼운 아이의 머리칼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이 엄마가 센터에 핸드폰 하러 왔나. 하. 짜증 나.’

작은 틈 사이로 잠시 지켜 봤을 뿐인데.

초면인 여자의 행동이 그동안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었다.

서프라이즈 할 생각에 들떴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서연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치료비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알고 싶지도 않은 아빠 병원 이야기를 어찌나 길게 떠드는지.

하도 기가 막혀서 대꾸할 말도 없었다.


“자기. 그만 가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떠드는 여자와 눈에 카메라를 켠 듯 지켜보는 다른 엄마들의 관심.

서연은 모든 것이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얼른 나갈 생각이었다. 정말 그러려고 했다.


“티셔츠 쪼가리 팔 때는 잘만 생글거리더니.”

작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여자의 혼잣말에 서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저기요!”

권율의 눈썹이 사납게 구겨졌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생전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가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치료해주겠다는데. 사람 성의를 무시하니까 그렇죠.”

“치료가 필요하면 제가 알아서 병원에 데리고 갈 겁니다.”

여자의 적반하장식 태도에 권율의 눈빛이 베일 듯 날카로웠다.


“아이가 한 일이라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티셔츠 얘기가 왜 나옵니까?”

“TV 좀 나온다고 뭐 되는 것 같이 굴어서요.”

서연의 잇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제가요? 언제요?”

서연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톱스타도 아니면서 사람 말하는 데 대꾸도 안 하고. 기분 나쁜 티 팍팍 내면서. 마음 불편하게. 정말.”

“그럼 아이 뒤통수에 혹이 생겼는데. 어떤 엄마가 웃을까요?”

“공인이잖아요.”

연예인도 아닌데 무슨 공인.

서연은 커다란 불덩이를 집어삼킨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TV에 나온다고 다 공인은 아니지만.”

서연은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공인은 내 아이가 다쳐도 괜찮은 척해야 하나요?”

왜요, 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할 말을 찾지 못한 여자의 입매가 일직선으로 굳었다.


“창문으로 보니까 애가 뛰어다니거나 말거나 핸드폰만 보시던데요.”

제대로 정곡을 찔렸는지 여자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자기 아이는 자기가 봐야죠. 핸드폰 말고요.”

하고 싶은 말이 수십 가지였지만 꾹 참았다.

센터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간절하지도 않았다.


“자기. 선생님께 그만둔다고 하고 가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여기를 더?

소중한 두 남자를 저 여자와 한 공간에 두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사회성이야 다른 방법을 찾아서 길러주면 될 일이니까.

두 사람이 아예 몸을 돌리자 구경만 하던 엄마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현이가 그만두면 안 되는데.”

“우리 예서는 이현이랑 놀고 싶어서 여기 온다고요. 아휴. 참.”

“우리 반 최고 순둥이가 빠지고. 정작…….”

대놓고 불만을 쏟아낼 수 없는 엄마들의 만류가 이어졌다.


‘뭐야. 우리 아들, 왜 이렇게 인기가 많아.’

하지만 서연은 곧 깨달았다. 내 아들이 아닌 어머님 아들이 인기가 많다는 것을.

엄마들의 시선이 모조리 권율에게로 향하자 서연의 마음속에 수만 개의 X표가 그어졌다.


“이현아. 친구들이랑 인사하자. 안녕.”

“안녕.”

작은 손을 별처럼 반짝이는 이현의 등을 쓰다듬으며 서연이 가볍게 묵례했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교실을 빠져나왔다.


“서연 씨. 이현이 내가 안을게요. 팔 아파요.”

“아니에요. 주차장까지만 내가 안을게요.”

서연은 이현이 등을 가만히 토닥이며 귓속말을 속삭였다.


“콰당해서 울었어?”

고개를 가로젓는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며 또 물었다.


“아프면 울어도 돼. 참지 말고. 응?”

타고난다는 말이 딱 들어맞게 매사 조심스러운 아이인데. 울지도 못하고 얼음처럼 굳어있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우리 이현이. 엄마가 와서 좋아?”

“네에.”

“얼마나?”

열 손가락을 나뭇잎처럼 활짝 펴는 아이의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눈으로 안 봤으면 몰라도. 괜히 마음 한구석이 짠해져 서연은 내 새끼를 연발했다.


“이현아. 엄마 속상해. 우리 아들 머리에 혹 생겨서.”

“미안해요.”

“율이 씨가 왜요.”

“서연 씨 회사에 갔으면 안 다쳤을 텐데.”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서연이 권율의 몸을 쓱 밀었다.


“다른 수업을 생각해 봐야겠어요.”

“여기 다시는 오지 마요. 나 아까 눈에서 레이저 나올 뻔했어요.”

권율이 눈썹 끝을 내렸다.


“아니. 이현이 다쳐서가 아니라. 그 여자가 율이 씨 팔 잡았잖아요.”

그러자 그가 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안 되겠어. 차 타기 전에 정화부터 해야지.”

“정화요?”

익숙한 차가 보이자마자 서연이 걸음을 멈췄다.


“붙잡힌 팔 들어봐요.”

커다란 팔이 들리자 서연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의 팔에 촉, 오동통한 이현의 팔에 촉하고 입을 맞췄다.

그러자 두 남자의 까만 눈동자가 똑같이 휘어졌다.


“엄마. 더, 더 해주세요.”

바로 그때 거대한 품이 이현을 안은 서연을 감싸 안았다.

서연은 두 남자의 뺨에 쪽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하. 이제야 살겠네. 아까는 정말 욕 나올 뻔했다고요.”

숨이 닿을 거리, 권율이 서연의 코끝을 스치며 중얼거렸다.


“근데 아까 왜 자기라고 불렀어?”

“다른 여자들이 율이 씨 이름 아는 거 싫어서요.”

서연이 정답을 말했는지 권율의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다.

그는 이현을 카시트에 앉히면서도 자꾸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다 불쑥.


“자기라고 해줘서 좋았어.”

당연히 이현이 아빠인 권율을 닮은 거지만.

이럴 때 보면 이현을 커다랗게 늘려놓은 것처럼 그는 한없이 귀여웠다.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요. 싹 다 불러줄 테니까.”

“뭐든지, 다?”

돈이 드는 일도 아니고, 돈이 든다고 해도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불러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의 까만 눈동자가 오묘한 빛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율이 씨. 이렇게 나온 김에 놀이공원이나 갈까?”

“놀이공원?”

“이현이 기분도 그런데. 사파리 버스 태워주게요.”

외할머니표 도시락도 먹고, 실컷 놀고 오자는 서연의 말에 그가 바로 시동을 걸었다.

빠르게 핸들을 돌리는 그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툭툭 돋아났다.

선생님이 ‘주목’을 외친 것도 아닌데. 순간 서연의 시선이 그의 손등에 꽂혔다.

힘을 줄 때마다 굵게 튀어나오는 핏줄이 뭐라고. 피부 속 혈관에 이렇게 설렐 일인지.

서연은 여러 계절을 함께 보냈어도 매번 그의 매력에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다.


‘하. 주말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다가올 데이트를 떠올리던 서연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엄마.”

은밀한 상념을 밀어내는 아이의 부름에 얼른 뒤를 돌아봤다.


“우리 이현이 심심해? 노래 틀어줄까요?”

“네에.”

“잠깐만.”

쿵짝쿵짝 신나는 노래를 틀고는 발밑에 있는 보냉가방을 열었다.


“짜짠! 이현아. 이게 뭘까.”

“우와.”

“우리 아들 상어 음료수 마시면서 기분 좀 내.”

두 손을 뻗어 반기는 아이를 보며 서연이 빙그레 웃었다.

캐릭터가 그려진 음료수가 뭐라고 저렇게도 좋을까.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싱글벙글했다.

기분이 좋아진 이현의 모습에 찝찝했던 서연의 마음이 말끔하게 개었다.


“서연아.”

안 그래도 깊은 그의 눈매가 한층 진해졌다.


“정했어.”

“뭐를.”

“아까 원하는 거 다 불러준다고 했잖아.”

지금까지 그걸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아이 용품을 고를 때도 신중한 남자가 뭘 선택했을지 서연은 궁금했다.


“3개도 괜찮아?”

“그럼. 더 생각나는 거 있으면 얘기해요.”

권율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 끝을 올렸다.


“‘자기’라는 말 좋았어.”

서연이 단번에 접수를 외쳤다.


“‘여보’도 좋겠어.”

“알았어. 여보.”

서연이 바로 적용하자 권율의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마지막은 뭔데?”

“……오빠.”

“!”

“불편하면 안 불러줘도 돼.”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오빠라는 말이 듣고 싶었구나.’

친구들이 남편에게 ‘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유심히 쳐다보더니.

그게 부러웠었나?

나이에 상관없이 오빠라고 불러주는 게 뭐 대수라고. 망설일 것도 없었다.

서연은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여 턱을 괴고는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오빠.”

그의 목덜미에 분홍빛 열꽃이 피어올랐다.

너무도 달뜬 반응에 서연은 그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오빠라고 불러주고 싶었다.


“율이 오빠.”

“음. 서연아.”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거짓말을 못 하는 그의 입꼬리가 크게 흔들렸다.


“사랑해. 오빠.”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에 햇살 같은 미소가 내려앉았다.


 

***

넓은 정원이 훤히 내다보이는 거실.

빠른 비트의 동요가 광광 울리자 어린이 전용 클럽을 방불케 했다.


“요즘 동요는 왜 이렇게 신나.”

서희가 술잔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오빠. 나 아까 우리 서주원이랑 리듬 탈 뻔했잖아.”

호진이 아들 주원에게 손을 흔들자 아이가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었다.

크리스마스 전구로 장식한 인디언 텐트 안에는 고만고만한 아이들로 만원이었다.

게다가 한쪽에는 블록과 갖가지 장난감들이 키즈카페처럼 놓여 있었다.

특히 유일한 여자아이인 지연의 딸은 공주님 드레스를 입고 요술봉을 흔들었다.


“지연아. 방금 봤어?”

“응?”

“방금 우리 하준이가 연후 요술봉 주워준 거. 이렇게 썸이 시작되는 건가?”

리나가 어필하듯 말했다.


“우리 서주원은 오자마자 연후가 좋아하는 스티커부터 줬어. 여심을 공략할 줄 아는 어린이라고.”

다들 아들만 낳아서인지.

인형같이 예쁜 지연의 딸과 서로 사돈을 맺자는 농담을 즐겼다.


“야. 연후가 한 저 공주님 세트 보여?”

“왜, 너도 하나 사게?”

호진이 킥킥거리자 서연이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거 우리 율이 씨가 사서 이현이한테 주라고 한 거야.”

“하, 권율. 우리 주원이까지 이현이한테 뒤처져야겠냐?”

서희도 농담에 동참하자 권율이 씨익 웃었다.

다들 오래 만나서일까.

각자 돌아가면서 집에서 아이들을 놀리고 가볍게 술잔을 기울였다.


“근데 오늘따라 대접이 더 융숭하다.”

눈치 빠른 호진이 평소보다 다양한 요리와 값비싼 와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율이 씨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서연이 권율의 손을 잡았다 놓으며 중얼거렸다.


“율이 씨가…… 우리한테?”

순간 친구들의 시선이 권율에게로 쏠렸다.


“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기다렸다는 듯 봉투를 들고 온 권율이 사람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아니, 이게 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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