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알밤 어린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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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알밤 어린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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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알밤 어린이집
2023.04.20.
하얀 봉투에는 유명 사립 유치원에서 만든 것 같은 안내 책자가 들어 있었다.
다들 놀란 얼굴에 서연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으니까.
충동적으로 센터를 그만둔 날 밤, 권율은 많은 고민을 쏟아놓았다.
앞으로 아이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떨어져 있기 전에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이의 시간.’
서연은 권율이 했던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것은 두 사람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이자 아이를 위한 최선이었다.
“그거 율이 씨가 직접 만들었으니까. 천천히 봐주세요.”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권율에게로 향했다.
“교육 사업이라도 하려고?”
서희의 물음에 권율과 서연이 동시에 웃었다.
이현에게 필요하다면 못 할 것도 없었고, 그만한 능력과 자본은 차고도 넘쳤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형도 알잖아. 내년에 연수 들어가야 하는 거.”
“그걸 잘 알면서 이걸 하겠다고?”
서희는 종이와 권율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우리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아직 안 다니잖아요.”
서연이 덧붙이며 말했다.
“아이가 둘이라서 휴직한 지연이네 빼고 다들 이모님이랑만 있으니까요.”
모두 워킹맘인 관계로 남의 손에 의지한 채 양육 중이었다.
“이건 한국대 수석 권율 원장님이 손수 엄선한 프로그램입니다. 어디 가셔도 이런 어린이집 없어요.”
서연이 안내 책자를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
구미가 당기는 말을 덧붙여서일까.
사람들 손에서 빠르게 넘어가던 종이가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와 한참을 머물렀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눈동자, 연이어 들려오는 작은 감탄사.
성공인 건가?
서연이 눈치를 살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권율이 자신의 생각을 길게 설명했다.
신나는 동요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니라면 흡사 유치원 입학설명회 같다고나 할까.
허투루 듣는 사람도 가볍게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진지했고, 무엇이 최선인지 다 함께 고민했다.
“시작은 일주일에 3번. 9시부터 2시까지요.”
“율아. 학교도 가야 하는데 3번씩이나 되겠어?”
서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야지. 내년에는 이현이랑 오래 떨어져 지내야 하니까.”
“그래서 저도 적극적으로 나설까 해요.”
“네가?”
이번에는 호진이 물었다.
“응. 율이 씨 졸업하기 전에 이현이랑 시간도 많이 보내고.”
순간 서연은 목에 가시가 박힌 듯 따끔거렸다.
그의 졸업과 예정된 이별. 과연 그와 떨어져 하루라도 살 수나 있을지.
권율이 없는 삶을 떠올리자 서연의 마음에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도 곧 닥쳐올 현실이었다.
“가족 여행도 다니고. 올해만큼은 일을 좀 줄여볼까 해.”
서연에게 있어 브랜드를 알리고, 석구의 회사를 지켜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권율과 이현이었다.
특히 지금은 두 남자에게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였으니까.
“그래서 너희들 생각을 알고 싶어. 함께할 수 있는지.”
서연의 말이 끝나자 배턴 터치를 하듯 권율이 나섰다.
“이현이랑 연후는 두 돌이 지났지만. 하준이랑 주원이는 안 지났잖아요.”
권율의 까만 눈동자가 더욱 빛났다.
“제가 모든 걸 할 수는 없으니까. 믿고 맡길 수 있는 선생님을 부르려고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놀면서 수업도 하고요. 단순히 말하자면 공동육아 같은 거죠.”
어른들의 세상에서 사는 이현이를 위한 친구 만들기.
권율은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주제를 꺼냈다.
“우리가 할 일은요?”
리나가 관심을 보이자 서연이 대신 대답했다.
“시간 내기지 뭐. 참고로 리나 너랑 나는 애들 그림 담당이다.”
“그게 뭐 어렵다고. 옷 신경 안 쓰고 물감 가지고 실컷 놀게 하면 애들한테는 최고지.”
“어? 그럼 나는 애들이랑 음악 할까?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피아노를 잘 치는 지연의 말에 서연이 물개박수를 쳤다.
“근데…… 난 조사 일정이 빠듯해서 시간을 낼 수가 없는데. 어쩌냐.”
호진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호진아. 나 있잖아.”
“오빠도 재판 준비하느라 바쁘잖아.”
“우리 주원이를 위한 일인데. 일주일에 한 번 시간을 못 낼까 봐.”
안심하라는 듯 서희가 호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까짓거 안 되면 서주원만 사랑하는 아버지한테 말하지 뭐. 그럼 만사 오케이야.”
서희의 호언장담에 호진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다.
“다들 부담 가지실 건 없어요. 어차피 선생님은 따로 부를 거라서요.”
“응. 내가 인맥을 총동원해서 괜찮은 사람들로 추려놨어.”
서연이 선생님들의 이력을 줄줄 읊자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계획한 거야?”
“지난 수요일부터.”
“너도 참. 그 짧은 시간에 대단하다. 정말.”
“내가 한 건 전화 몇 통뿐이야. 다 율이 씨가 한 거지.”
모든 공은 그에게로 돌렸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거니까.
“얘들아. 그럼 다들 하는 걸로?”
“당연하지. 공부의 신 율이 씨가 열심히 해보겠다는데.”
리나가 오케이를 날렸다.
“우리 주원이는 이현이랑 형제나 다름없지 뭐. 작은아버지 표 영재 교육 가보자고.”
호진이 씽긋 웃으며 말했다.
“난 말할 것도 없이 찬성. 그런데 애들한테 들어가는 비용은 1/n하자. 그래야 마음이 편해.”
셈이 정확한 지연이 꼭 필요한 부분을 짚고 넘어갔다.
“오케이. 그럼 자세한 건 이메일로 보낼게.”
서연은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사람의 희생과 헌신이 아닌 모두가 진심이었으면 했다.
“하. 난 ‘알밤 어린이집’ 원복도 만들어야 하고. 바쁘다 바빠.”
“원복까지?”
“당연하지! 난 우리 이현이 일이라면 작은 것 하나까지 장난 아니라고.”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서연은 그 어떤 노력도 아깝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엄마!”
이현이가 두 팔을 뻗으며 쪼르르 달려왔다.
“우리 이현이 물 줄까?”
“아니. 안아. 안아주세요.”
이현은 서연의 허벅지에 얼굴을 감추고 오동통한 다리를 동동거렸다.
“크르르릉!”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괴물 흉내를 내며 쫓아오자 이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어른들만의 공간이던 식탁은 4명의 어린이로 북적거렸다.
다들 얼마나 재밌게 놀았는지. 하나같이 앞머리가 이마에 붙어 땀으로 반짝였다.
“아아악. 엄마.”
이현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비명을 지르면서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너무도 귀여운 아이의 모습에 서연은 이현의 등을 담요처럼 덮으며 킥킥 웃었다.
“우리 이현이는 여기 없어요. 꼬마 괴물들은 돌아가세요.”
“괴물 무서워.”
“이현아. 아빠가 숨겨줄게.”
권율의 말에 이현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재빨리 몸을 틀었다.
마치 애벌레가 꿈틀거리듯 권율의 다리로 올라간 이현은 티셔츠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빠. 배 속으로.”
권율은 동그랗게 볼록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이현을 번쩍 안았다.
그러자 이현이 더 깊숙이 파고들며 권율의 티셔츠 밑으로 발만 보였다.
“으. 귀여워. 율이 씨. 여기 봐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이의 시간.
서연은 핸드폰을 들어 사랑하는 두 남자의 순간을 남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
월, 수, 금 아침 8시 50분.
그 시간만 되면 한적한 주택가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집 앞에 고급 세단들이 줄지어 들어왔으니까.
미술 수업이 있는 날.
서연은 이현을 안은 채 권율과 함께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익숙한 차가 눈에 들어오자 권율이 먼저 움직였다.
“형. 주원이 내가 내릴게.”
권율이 차 문을 열자 주원이 배시시 웃었다.
“주원이 잘 잤어?”
커다란 권율의 상체가 밀고 들어오자 주원이 카시트 버클을 잡아 뜯었다.
“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가 입에 붙지 않는지. 서희의 아들인 주원은 권율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서주원. 아빠 잊으면 안 돼.”
밧줄같이 묶여 있던 안전벨트가 풀리자 주원은 어서 안으라며 양팔을 벌렸다. 그러고는 단풍잎 같은 손을 몇 번 흔들었다.
“아빠. 빠이빠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주원의 모습에 서희의 잇새로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 서주원. 아빠 뽀뽀도 안 해주고 가게?”
서희가 몸을 돌렸는데도 주원은 입술을 대는 둥 마는 둥 했다.
“주원아! 작은아버지 말씀 잘 듣고. 집으로 꼭 돌아와야 해. 넌 내 아들이라고!”
서희가 농담하거나 말거나.
주원은 권율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현이한테 빨리 가자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마치 형제처럼 권율의 품에는 주원이가, 서연의 품에는 이현이가 서희를 향해 사이좋게 손을 흔들었다.
연이어 도착하는 아이들도 주원이와 다르지 않았다.
누구 하나 내리기 싫어하기는커녕 빨리 내려달라고 난리였다.
거기다 서연이 엄선한 선생님들이 속속 도착하자 집 안팎은 그야말로 북적거렸다.
교실로 쓰는 방으로 모두 들어가자 높은 음자리표 같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아이들의 대답이 메아리처럼 되돌아오자 서연이 빙그레 웃었다.
“뭐가 저렇게 재미있을까?”
까르르거리다 킥킥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미술 재료를 정리하던 서연의 얼굴에 덩달아 함박웃음이 걸렸다.
“서연아.”
“할아버님. 오셨어요?”
“율이는?”
“애들이랑 교실에요.”
석구는 수업이 있는 월, 수, 금이면 증손주들이 궁금해 아예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가 지정된 의자에 앉으면 기다렸다는 듯 이현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왕 할아버지!”
“오냐. 우리 이현이 강아지. 아이고. 우리 주원이 강아지도 왔어.”
석구가 이현의 엉덩이를 두드리면, 교실에 있던 아이들이 모조리 뛰쳐나와 똑같이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그러면 이현이 석구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얼굴을 비볐다.
“얘들아. 빨리 들어오세요.”
아이들은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서 격한 인사를 마무리했다. 그러면 석구는 조용히 신문을 꺼냈다.
물론 서연의 집을 방문하는 건 석구뿐이 아니었다.
“김 기사. 과일 좀 안에 들여놓지.”
재벌 회장들은 지나가는 길이라는 핑계로 손주의 먹거리를 직접 싣고 왔다. 게다가 할머니들은 아이들의 점심을 돌아가면서 준비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른들은 권율이 만든 어린이집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선생님의 인건비를 제외한 모든 것이 자급자족이었다.
각자 집에서 가져온 간식과 밥으로 식사를 하고, 소풍이나 체험학습은 주말에 몰아서 갔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다시 겨울이 왔다.
“리나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참. 오늘 율이 씨 학교 간다고 했지?”
“응. 기말고사 끝나는 날이라서 이현이랑 외식하려고.”
서연은 마지막 시험을 치른 권율과 약속이 있었다.
“얼른 가봐. 여기는 내가 마무리할게.”
“괜찮겠어?”
“매번 신세 지는데 이 정도도 못 할까.”
빨리 가라는 리나의 재촉에 서연은 정신없이 준비를 마쳤다.
“아직 안 끝났나?”
서둘러 찾아온 한국대 캠퍼스. 서연이 시간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주위를 둘러봤다.
겨울이 시작됐는데도 아직 노란빛을 머금은 교정은 왜 이렇게 낯선지.
그의 학교는 여러 번 와봐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
“이현아. 아빠가 어디서 나오는지 볼까?”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경영대 건물 입구를 바라보며 서연이 이현을 안았다.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몸을 좌우로 움직이는데.
“어! 율이 씨다.”
한쪽 손을 번쩍 들려던 그때.
서연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