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드라마를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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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드라마를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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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드라마를 찍다
2023.04.23.
서연은 마치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권율을 발견하고 콩콩 뛰어가는 여자. 귀여운 단발머리가 춤을 추듯 찰랑거리자 곱게 휘어진 눈매가 반달로 접혔다.
너무도 반가운 얼굴의 여자는 권율의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
그러고는 손발을 어떻게 할 줄 모르겠다는 듯 흐느적거리며 이내 권율을 지그시 올려봤다.
‘저 여자, 뭐지?’
처음 보는 여자였다.
그의 주변에 있는 선배나 후배는 서연도 웬만큼 알고 있었으니까.
단발머리의 여자는 그를 향해 뭔가를 계속 묻고 또 웃었다. 너무도 해사한 모습으로.
‘율이 씨를 좋아하나?’
단순한 물음표가 확신의 느낌표가 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웃느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쪽 귓가에 꽂으며 여자는 권율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권율과 눈을 마주하고 싶은지, 그의 쪽으로 한껏 몸을 기울였다.
‘다른 사람이 율이 씨를 저런 눈으로도 볼 수 있구나.’
저렇게 예쁜 눈으로, 라는 말을 삼키던 서연이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미 결혼했다는 걸 모르나? 심지어 아이도 있는데.
아니면 가정이 있는 것쯤은 상관도 없는 건가?
그와 한 번이라도 수업을 들은 사람이라면 권율의 사정을 모를 수가 없었다.
대학생이 일찍 결혼하는 경우가 드문 데다 서연 또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의 옆에 서 있는 여자는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눈빛은 거짓말을 못 하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순간 서연의 마음 한구석에 잔잔한 파장이 일었다.
단순히 불쾌하다는 말로는 단정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권율이 그 여자에게 예쁘게 웃어주거나 살갑게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는데도.
마치 감기가 올 것 같이 으슬으슬 추운 날, 쓰디쓴 약을 집어삼킨 사람처럼 서연의 입안이 씁쓸해졌다.
‘그냥 밖에서 만나자고 할걸.’
괜히 여기까지 와서는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장면과 마주하다니.
그러다 불현듯 서연의 머릿속에 쓸데없는 가정들이 떠올랐다.
그가 이른 나이에 결혼하지 않고, 아이가 없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제 나이에 누릴 수 있는 보통의 연애와 이별,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겠지.
단순하면서도 다양할 수 있는 그의 삶이 자신과 아이로 인해 지나치게 무거워진 건 아닌지.
‘혹시 부담스러웠을까?’
사랑이라는 화려한 포장지로 둘러싼 책임감을 그에게 강요한 거라면…….
순간 서연의 마음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생기로 가득한 캠퍼스 한편.
아이를 안고 있는 흑백 같은 자신과 총 천연한 색깔을 머금은 풋풋한 여자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그러자 서연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자신은 하이틴 로맨스물의 배경 같은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이현아. 우리 다시 차로 가자.”
“아빠. 아빠.”
권율을 찾는 아이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차에서 비타민 냠냠하면서 기다릴까?”
“비타민 냠냠?”
“응. 엄마가 우리 이현이한테 공룡 비타민 2개 줄게.”
서연은 일부러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이야.’라는 말이 목에 걸렸지만, 아이를 다시 고쳐 안았다.
서연은 동그란 아이의 뒷머리를 부적처럼 쓰다듬으며 앞만 보고 걸었다.
“바보같이…… 정말 바보같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조금씩 속도를 냈다.
바로 그때, 뒤에서 불어온 바람에 서연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세차게 진동하는 공기에 빨려가듯 서연의 몸이 그대로 뒤로 젖혀졌다.
“서연아!”
청량한 우드 향, 그리고 단단한 그의 가슴이 등에 와 닿았다.
서연은 순간 스르륵 눈을 감았다 떴다.
“어디가?”
“아빠!”
이현이 팔을 뻗어 권율의 어깨에 매달리자 두 사람의 몸이 더 가깝게 겹쳐졌다.
“이현아. 아빠 보고 싶었어?”
“네에.”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권율의 숨소리가 서연의 귓가를 맴돌았다.
“무슨 일 있어?”
그의 레이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걸까.
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그럼 왜 그냥 가?”
“차에 뭘 놓고 와서.”
“급한 거야?”
작은 단서를 찾으려는 형사처럼 권율의 눈동자가 서연의 표정을 빠짐없이 훑었다.
“이현이는 비타민 먹으러 가요.”
“비타민?”
“네에. 비타민 먹으면서 아빠 기다려요.”
적당한 핑계를 찾기도 전에 아이의 입에서 서연이 했던 말이 쏟아져나왔다.
“이현아. 엄마 팔 아프니까 이리 와. 아빠가 안아줄게.”
커다란 권율의 손이 이현을 번쩍 안았다. 그러고는 나머지 손으로 서연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서연은 시선을 돌린 채 잠시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왜 그래?”
“뭘.”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씁쓸한 마음을 억지로 삼켰다.
“말하기 싫어?”
“그냥 좀 피곤해서.”
그의 까만 눈이 두 배는 커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디 아파?”
“그 정도는 아니야.”
서연은 지금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유치한지 절절히 느끼고 있으니까.
‘하. 나잇값도 못 하고. 이게 뭐야.’
나잇값을 떠올리다 버럭 짜증이 솟구쳤다.
이 망할 나이는 언제까지 신경을 거슬리게 할 건지.
그와 사는 평생 ‘7살 차이’라는 나이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서연이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자 권율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유심히 살펴볼 뿐 더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이가 오늘 있었던 일을 참새같이 재잘거리지 않았다면 얼마나 어색했을지.
두 사람은 마치 말다툼이라도 한 것처럼 잠시 침묵했다.
‘이래서 아이가 있어야 하나?’
중간 역할을 톡톡히 하는 이현을 보며 서연은 생각했다. 그러나 곧 ‘괜히 왔어’만 속으로 되뇌었다.
“엄마 차! 저기!”
이현의 통통한 손가락이 익숙한 차를 가리켰다.
“키 줘. 내가 운전할게.”
권율이 서연의 어깨를 당겨 안으며 말했다.
“율이 씨 차는 어쩌고.”
“학교 주차장에 놔둬도 돼. 어차피 정기 주차권 끊었으니까.”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다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권율의 짧은 숨결이 이마에 내려앉았다.
“서연아.”
“…….”
“우리 공주님. 한서연.”
공주님이라니. 그렇게 싫다고 여러 번 말했는데.
왜 지금 또.
“공주라고 부르는 거 싫다고 했잖아.”
안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상황이라 목소리가 커졌다.
“그럼. 이렇게 해줄까?”
어깨를 감싸던 묵직한 팔이 스르륵 내려갔다.
“흡!”
서연의 몸이 붕 떠올랐다.
“이러다 이현이 떨어트려. 빨리 내려놔.”
혹시라도 아이가 떨어질까 봐 발버둥을 칠 수도 없었다.
“내 목을 꼭 끌어안으면 되잖아. 이현이처럼.”
이렇게 애 취급이라니.
서연의 잇새로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전혀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 권율이 한쪽 눈썹을 씰룩였다.
“하. 뭐야.”
서연은 마지못해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좋다. 너무 좋다.”
그의 목소리가 뺨에서 울렸다.
“뭐가.”
“이제 지긋지긋한 시험도 끝났고. 우리 서연이랑 이현이를 양팔에 안고 있으니까.”
말귀를 제법 알아듣는 이현이가 까르르 웃자 서연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나야.”
그의 말끝에 환한 웃음이 묻어났다.
“그러니까 오늘은 더 맛있는 거 먹자. 알았지?”
서연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아. 우리 뭐 먹을까?”
“고기!”
임신 중에 고기만 먹어서일까. 이현은 유독 고기를 좋아하고 잘 먹었다.
“우리 서연이는?”
“……아무거나.”
괜히 멋쩍어져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당연히 고기네.”
갈수록 점점 능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는 그의 모습에 서연은 기가 막혔다.
“맛있는 고기 많이 사줄게. 그 대신.”
권율이 고개를 돌려 서연을 쳐다봤다.
“차 타기 전에 뽀뽀.”
“아빠 뽀뽀?”
동글동글 하얀 이현의 얼굴이 다가와 권율의 왼쪽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만족스러운 그의 입매가 느슨해지자 서연이 또 피식 웃었다.
“이제 엄마 차례다. 그렇지. 이현아?”
아이에게 동의를 구하는 그의 목소리에 서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율이 씨. 여기 학교 주차장이야.”
“그러니까 남들 안 보게 빨리 하면 되잖아.”
“엄마 뽀뽀. 나도 뽀뽀.”
아이의 재촉 아닌 재촉에 서연은 이현의 볼에 촉, 그리고 권율의 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순간 고개를 돌린 그가 입술에 촉하고 입을 맞췄다.
“이제 됐다. 가자. 고기 먹으러.”
그가 햇살 같이 웃었다.
서연은 여전히 다정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
“이현이는요?”
나무 빗으로 긴 머리끝을 정리하던 서연이 물었다.
“잠들었어. 아주 깊게.”
힐끔 시계를 쳐다봤다.
밤 9시.
서연이 긴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에 내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늘 쓸데없이 감정을 낭비해서일까.
아직 잠자리에 들 시간도 아닌데, 평소보다 더 피곤한 기분이었다.
일찍 쉬고 싶은 마음에 서연이 침대 시트를 정리했다.
툭툭.
구김 하나 없이 정리한 침대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침실 옆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서연은 서랍에 가지런히 개어놓은 잠옷을 꺼내 선반 위에 올려놨다. 막 티셔츠를 벗으려던 그때.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왔다.
“나 오늘은 일찍 자려고.”
“피곤해?”
“약간. 책 볼 거예요?”
그는 대답 대신 서연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그러고는 숨이 모자란 사람처럼 깊고도 느릿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도 뜨거운 그의 뺨과 간지러운 숨결에 서연의 어깨 끝이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술이 깊게 팬 목 안쪽을 지분거렸다.
“율이 씨. 간지러워.”
서연의 상체가 앞으로 흔들리자 그가 빈틈없이 맞붙어 왔다.
“흣. 율아.”
“아까 왜 그런 거야? 응?”
듣고 싶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커다란 그의 손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권율 특유의 집요함.
그는 뭐 하나에 꽂히면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올 때까지 물러나지 않았다.
“서연아. 말해줘.”
권율은 서연을 안은 것도 모자라 어깨 여기저기에 입술을 내리며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하. 정말.’
버거운 감각이 한꺼번에 몰아닥치자 서연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할까?’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하는 편이 나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밤새 이럴 테니까.
“율이 씨 옆에 귀여운 여자가 있어서.”
흡, 숨을 들이마시며 서연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냥 기분이…… 그랬어.”
“귀여운 여자? 누구?”
“단발머리에 율이 씨 보고 막 예쁘게 웃던 여자 있었잖아.”
피식하고 그가 웃었다.
“걔가 귀여워? 대체 어디가?”
“내 눈에는 보송보송 귀여웠어. 나이도 한참 어리고.”
왜 자꾸 웃는 건지, 괜히 얄미운 마음에 고개를 홱 돌렸다.
“진짜 귀여운 사람이 누군지 알려줄까?”
“싫어.”
“알려주고 싶은데.”
서연의 몸이 순식간에 돌려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서연의 이마에 권율이 입술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우리 서연이가 벌써 잊었구나.”
“뭘.”
“널 안을 때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됐어, 라는 말을 작게 속삭이자 권율의 입술이 귓가에 와 닿았다.
“잊었으면 처음부터 다시. 아주 자세히 알려줄게.”
‘밤새도록’이라는 그의 말이 입술 사이로 뭉개지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