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 진심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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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6. 진심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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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6. 진심을 다해
2023.04.27.
커튼 너머로 희미한 빛이 비쳤다.
잠든 서연의 얼굴을 바라보는 건 권율의 기쁨이자 습관이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아 서연의 뺨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비볐다. 마치 애정을 표현하는 고양이처럼.
그녀는 알고 있을까?
이렇게 말랑한 몸을 빈틈없이 안고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해지는지.
혼자만의 기분에 취해 그녀의 얇은 눈꺼풀에 입술을 내렸다.
그러다 불쑥 서연의 말이 떠올랐다.
‘율이 씨 옆에 귀여운 여자가 있어서. 그냥 기분이…… 그랬어.’
귀여운 여자?
순간 권율의 잇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건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평가였으니까.
서연이 말한 그 여자는 같은 수업을 듣는 후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끔 지나칠 정도로 웃음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 후배가 부담스러운 사인을 보낸 적은 없었다. 그랬다면 스치듯 마주치는 것도 피했을 테니까.
하지만 서연이 신경 쓰였다면 쓰인 거겠지.
권율의 눈앞에 이현을 안고 거침없이 돌아서던 서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서연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오늘 하루는 어땠을까.
너무도 섬뜩한 가정에 권율의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그냥 빨리 졸업했으면 좋겠다. 서연 씨가 신경 쓰이지 않게.’
사실 두 사람은 누가 일방적으로 져주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서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애초부터 만들지 않았으니까.
오늘 서연의 행동이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질투였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권율에게 있어 질투는 사랑을 확인하는 수단도. 자신의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도 아니었다.
민혁으로 인해 느껴봤던 그 감정이 말할 수 없이 찝찝하고, 성가실 정도로 짜증스럽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더 조심할게.”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목소리로 권율이 속삭였다.
서연의 마음에 티끌만 한 불편함이 남아 있지 않기를. 마치 상처를 보듬는 것처럼 권율의 손이 서연의 등을 쓰다듬었다.
***
“아빠. 눈!”
권율의 마지막 겨울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졸업식만 남아서일까.
권율은 인생 처음으로 빈둥거리는 중이었다. 물론 두 사람과 함께.
함박눈이 내리는 2월의 어느 날.
세 가족은 하얀 이불이 깔린 정원을 뛰어다녔다.
“이현아. 눈 먹으면 안 돼. 지지.”
펄펄 내리는 눈이 신기한지. 이현이 고개를 젖혀 혀를 날름거렸다.
“하늘에서 아이스크림이 내려요.”
‘차가워’를 연발하면서도 이현은 장갑에 내려앉은 눈을 입으로 가져갔다.
“에헴. 권이현 씨.”
서연의 과장된 기침 소리에 이현의 작은 어깨가 흠칫 뛰어올랐다.
“눈 먹으면 배 아야해. 안 되겠다. 율이 씨, 우리 그만 들어가요.”
“안 돼여.”
아이는 머리와 손을 마구 흔들었다. 결국에는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쿵 하고 주저앉았다.
제법 함박눈이 쌓여서일까.
이현은 울기는커녕 눈치를 보다 벌러덩 누워버렸다. 그러더니 하얀 설탕 위를 굴러다니는 찹쌀 도넛처럼 여기저기를 데굴거렸다.
“엄마. 아빠.”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권율은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현아. 엄마처럼 해 봐.”
아이의 눈높이에서 잘 놀아주는 서연이 털썩 주저앉더니 그대로 누워버렸다.
발그레한 뺨과 코끝. 서연은 입꼬리에는 웃음을 매단 채 아이처럼 깔깔거리다 천사의 날개라도 만드는 듯 양팔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비처럼?”
“응. 나비처럼 팔을 움직여 봐. 어. 그렇지. 우리 이현이 잘한다.”
서연은 아이와 눈밭을 굴러다니다 신나게 동요를 불렀다.
“엄마. 또, 또.”
끝날 줄 모르는 앵콜 요청에 서연이 권율에게 눈짓하며 지원요청을 했다.
“아빠!”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잘 아는 권율이 핸드폰에 저장된 동요 리스트를 눌렀다.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정원.
눈사람 동요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권율이 두 사람 옆에 누웠다.
“서연아. 이리 와.”
커다란 팔을 툭툭 두드리자 이현을 몸 위에 올린 서연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싱긋 웃는 서연의 얼굴이 장난꾸러기 같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율이 씨. 우리 눈싸움 할까?”
“눈싸움?”
“나랑 이현이랑 한 편 먹고. 이렇게 공격.”
서연이 눈을 한 움큼 집어 권율의 볼에 가져다 붙였다.
“윽!”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이현아. 아빠랑 눈싸움 하자.”
“싸움은 안 돼여. 사이좋게 지내요.”
이현은 싸우자는 말에 화들짝 놀라 양손을 황급히 내저었다.
“이건 그냥 놀이야. 진짜 싸움은 아니고.”
“놀이?”
“응. 이 눈을 동그랗게 만들어서 아빠한테 던지는 거야.”
서연이 권율을 향해 작게 뭉친 눈을 던지자 이현의 까만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안 돼여. 아빠 아야해요.”
권율의 잇새로 푸스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이현은 다른 아이들보다 진지했고, 장난치는 걸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아이의 세상은 좀 엉뚱하고 가벼워도 되니까.
권율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현아. 아빠는 튼튼해서 하나도 안 아파. 이렇게 눈을 집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 봐.”
아이의 손을 포개 잡은 권율이 눈 던지는 시범을 보였다.
“어!”
돌멩이만 한 눈 뭉치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멀리 날아갔다. 그렇지? 이번에는 이현이가 해볼까?”
“네에.”
오동통한 볼이 땅바닥에 쏟아져 내릴 듯 이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하얗고 사락거리는 눈을 만지작거렸다.
“힘껏 던져 봐.”
야구를 가르치듯 권율은 아이에게 팔 쓰는 방법을 알려줬다. 천천히, 아주 여러 번.
작은 눈 뭉치를 만드는데 뭐 이렇게 진지할 일인가 싶다가도. 아이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추억이 되기를.
“아빠 도와주세요.”
“혼자 할 수 있어. 해 봐.”
아직 힘 조절이 어려워서일까.
이현이 팔을 크게 휘둘렀지만, 작은 눈 뭉치가 아이의 발 앞에 떨어졌다.
“이야. 우리 이현이 대단하다. 한 번 더 해볼까?”
약간의 호들갑과 몇 번의 용기를 준 후에야 아이는 자신의 그림자만큼 작은 눈 뭉치를 던졌다.
“우리 권이현, 준비됐나요?”
서연이 골프공만 한 눈을 뭉치며 말했다.
“혹시 그거 나한테 던지려고?”
권율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하얀 눈 뭉치가 어깨로 날아와 파스스 부서졌다.
“이현아. 지금이야. 빨리 던져. 엄마는 아빠 뒤를 공격할게.”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임하는지. 나중에는 눈을 뭉칠 새도 없이 다급하게 뛰어다녔다.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아이처럼 뛰어다니는 서연이나 처음 하는 눈싸움에 푹 빠진 이현이나.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아이인지 모를 만큼, 두 사람이 까르르 웃었다.
“권이현 이쪽으로 붙어. 거대한 아빠가 쫓아온다.”
서연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 같았다.
“으으. 아빠다. 이현아 도망쳐.”
“엄마. 같이!”
잔뜩 신이 난 서연의 괴성과 다급한 아이의 외침. 권율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외동딸로 자라 사랑을 많이 받아서일까. 아니면 워낙 활발한 성격 때문일까.
서연은 이현과 항상 몸으로 놀았다.
‘이런 모습도 이제 곧 못 보겠지?’
부대 복귀를 앞둔 군인처럼, 요즘 권율은 모든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더 깊은 생각을 하는 건 무리였다. 두 사람이 그의 정신을 쏙 빼놨으니까.
“읏.”
“서연아!”
퍽 소리와 함께 서연이 그대로 엎어졌다. 물론 그녀의 뒤를 오종종히 따르던 이현도 마찬가지였지만.
“으아.”
“이현아!”
도대체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깐의 방심이 이렇게 사고로 이어졌으니까.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다급하게 뛰어가는 권율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대자로 엎어진 서연과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는 이현의 모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귀여웠다.
권율은 게임 아이템을 줍듯 이현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눈 범벅이 된 아이의 가슴을 툭툭 떨어내고, 조금 떨어진 서연을 번쩍 안았다.
“서연아. 괜찮아?”
“하아. 무릎이 까졌나?”
“무릎이 문제가 아니야. 얼굴에 상처 났어.”
서연의 뺨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어쩐지 따갑더라.”
“예쁜 얼굴이 이게 다 뭐야. 속상하게.”
서연이 눈치를 보며 입꼬리를 쓱 올렸다.
“빨리 들어가서 약 바르자.”
권율이 서연을 빈틈없이 고쳐 안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난 양호하지. 우리 아들 좀 봐. 눈에서 놀았다고 완전 촌스러워졌어.”
서연의 말에 권율의 시선이 단숨에 내려갔다.
“안 돼! 이현아. 콧물 빨아 먹지 마. 지지.”
투명한 콧물을 혀로 날름거리던 이현과 눈이 마주쳤다. 멋쩍긴 한지, 아이가 씩 웃었다.
이 두 사람은 정말…….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들과 떨어져 지낼 수 있을까.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또, 또.
권율은 쓸데없이 무거워진 마음을 툭툭 털어냈다.
“빨리 씻고. 따듯한 코코아라도 마시자.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
괜찮은 척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율아. 이현아.”
서연이 팔을 뻗어 권율과 이현의 등을 감쌌다.
“사랑해. 내 남자들.”
“엄마. 뽀뽀.”
“콧물 줄줄 흘리는 남자와 뽀뽀라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연은 아이의 볼이 납작해지도록 입을 맞췄다.
권율은 킥킥거리는 두 사람을 양팔에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씻고 나와. 이현이는 내가 씻길게.”
서연을 내려놓으며 권율이 말했다.
그러고는 커다란 욕조에 따듯한 물을 틀어놓고 고무로 된 장난감을 우르르 쏟았다.
“이현이는 잠깐만 있어.”
권율은 눈에 젖은 옷을 재빨리 벗어, 아이와 함께 욕조로 들어갔다.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적당한 온도의 물을 말랑한 등에 끼얹었다.
커다란 그의 손이 콧물로 반짝이는 아이의 얼굴을 쓸고 지나가자 금세 말갛게 돌아왔다.
“오늘 재미있었어?”
“네에.”
아이의 까만 눈동자가 사르르 접히자 권율의 눈매도 부드럽게 휘었다.
추운 곳에서 실컷 뛰어놀아서인지. 물놀이 중이던 아이의 속눈썹이 느릿느릿 속도를 줄였다. 그러다 이내 쓱쓱 눈을 비볐다.
“이현아. 졸려?”
“아빠. 안아.”
볼이 발그레한 이현이 쓰러지듯 권율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한 손으로 아이를 받쳐 들고 맑은 물로 재빨리 씻겨내자 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율이 씨. 이현이 다 씻었으면 내가 데려갈게.”
이미 씻고 나온 서연이 커다란 수건으로 아이를 감싸 안았다.
“마저 씻고 나와요.”
잠깐의 여유가 생겨서일까.
권율은 따듯하게 찰랑거리는 욕조 안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이현이는 자?”
티셔츠를 든 권율이 물었다.
“완전히 곯아떨어졌어. 여기. 아까 마시기로 한 코코아.”
서연이 내민 머그잔에서는 그윽한 초콜릿 향이 났다. 후우, 불어서 한 모금 삼키자 머리가 쨍하도록 달콤했다. 순간 권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참. 율이 씨. 핸드폰 여러 번 울리던데.”
권율은 식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가볍게 집어 들었다.
부재중 연락을 확인하며 다시 코코아를 마시려던 그때.
“어!”
그가 머그잔을 탁하고 내려놨다.
“왜?”
“연수 일정이…… 잡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