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사람을 >
찌잉-
알싸하게 심장이 조여들어 오는 말.
지금이 일본강점기도 아니고, 독립군을 조직하는 것도 아닌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이 남자는 대체 뭔가?
이달호는 고민하다가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걸었다.
“저 이달호 입니다.”
-아! 시장님! 기자회견 하신 거 봤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제게 미리 말씀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런 새끼들은 제 선에서 싹 잡아 처넣었을 텐데요!
글쎄.. 과연 그랬을까?
피식 웃던 이달호가 진모를 보며 입을 연다. 전화 너머에 그에게 말이다.
“고 검사님. 이제 위로 올라가셔야지 말입니다.”
-하하! 저같이 줄도 빽도 없는 놈이 어딜 갑니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시장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만년평검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고창동.
“오늘 저녁, 시간 되십니까? 오래간만에 껍데기에 소주 한잔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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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총선이 이틀 남은 시점에 뉴스는 온통 선거가 아닌 다른 일로 1면을 채웠다. 인터넷과 모든 방송이 이 사건을 다뤘고, 정부는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어떤 집단이 무작위로 해외의 서버에까지 ‘자료’를 올리는 바람에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사건을 담당하는 고창동 검사는 ‘비리 척결’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한제약과 식약처를 발칵 뒤집었고, 최근 살인청부 루머에 시달리던 대한제약은 812건의 엄청난 비리 의혹에 정일룡 사장이 입원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주가는 폭락하고 그룹 전체가 술렁인다.
이달호 시장은 정부기관의 나태한 공무원을 까기 시작했고 식약처를 정조준했다.
대기업과 붙어먹으며 의도적으로 허가를 몰아준 일.
멀쩡한 신약이나 식품을 딴죽 걸어 몇 년이나 질질 끈 일..
수입해온 식자재를 통관시키지 않거나, 불량만두 같은 사건에 책임을 지지 않은 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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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법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창가에 서서 밖을 보며 말하는 진모. 뒤에 선 태수가 대답한다.
“형량 말입니까?”
“예, 그것도 같은 맥락이겠죠. 전 세계에서 여기만큼 사기치기 좋은 나라도 없습니다. 10억을 해먹어도, 100억을 해먹어도 몇 년 살다 나오면 그만이잖아요.”
“확실히 언제부턴가 그랬던 것 같긴 하네요.”
“법을 만드는 사람이 누굽니까?”
“높으신 분들이죠.”
“자기들이 언제 걸려들어 갈지 모르는데 법을 강하게 만들까요?”
“아..”
“법이란 건 말입니다. 적어도 이 나라의 법은 약자를 보호하는 게 아니에요. 노예들을 다루는 수단일 뿐이죠. 사람들은 속고 있는 겁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노예는 죽을 때까지 일하고, 양반들은 그들의 고혈을 쪽쪽 빨아먹을 궁리만 해요.”
태수는 진모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투는 담담하지만, 그의 눈에서 당장에라도 불길이 치솟을 것 같다.
“나는 바꿀 겁니다.”
진모는 손을 들어 저편을 가리킨다.
정확하게 반이 갈라져 방치된 공단의 반쪽. 의정부에 수렴된 공단은 진모의 GL이 차츰 생기를 불어넣고 있지만, 저쪽은 아직도 폐허나 다름없다.
“바로 여기에서 말이에요.”
그가 뭘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태수는 괜히 가슴이 울컥했다. 진모의 등을 보고 있는데 왜 이런 감정이 밀려오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누가 태수씨의 따귀를 때렸다고 가정해봅시다.”
“저를요?”
뜬금없는 말에 태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그냥 가정이에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가해자는 어떻게 될까요?”
“뭐.. 그냥 한 대 때렸다면 적당히 합의 보라고 하겠죠?”
“그럴 겁니다. 경찰은 비웃을 수도 있을 것에요. 귀찮다고 할지도 모르고.”
끄덕이는 태수.
“그런데 만약 피해자가 이달호 시장이라면요?”
“······.”
“실형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일을 당해도 법은 다르게 적용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판가름하는 건 사람입니다. 여론이 이미 그렇게 만들었어요.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을 말이에요.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높은 사람이라니요? 모두가 평등해야 하는 대한민국 아니던가요?”
공권력은 이미 바닥까지 추락했다. 여자라고 봐주고, 노인이라고 봐주고, 돈 많다고 봐주고, 미쳤거나, 술 먹었다고 봐준다. 그게 당연한 사회를 만들어서 자기들의 치부가 드러났을 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는 거다.
“국회의원은 높은 사람입니까?”
“······.”
태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의사, 판사, 변호사, 검사, 국회의원.. 암묵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높으신 분’이라 부르지 않던가? 그게 옳은 것일까?
진모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돌린다.
“대한제약은 크게 흔들리겠지만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사장이 바뀌고 과징금을 때려 맞겠지만, 대기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그놈들을 두둔해줄 여력은 없겠죠.”
납치범들은 검찰로 넘어갔다. 박두식이란 놈은 외국으로 출장을 떠나버렸지만, 오히려 그건 이쪽에서도 원하는 바다. 그놈이 국내에 있으면 눈 뒤집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지켜보세요. 태수씨. 이번 총선이 지나면 이 나라가 어떻게 바뀌는지. 내가 뭘 하는지.”
“······.”
무섭게 창밖을 응시하던 진모는 가볍게 웃어 보이며 분위기를 푼다.
“아! 혹시 여윳돈이 있으면 엔화를 사두세요.”
“일본 돈이요?”
“예. 금도 괜찮고. 7월까지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진모는 싱겁게 웃으며 태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몇 초만 늦었어도 망치에 맞아 손이 가루가 될뻔한 태수를 위해 작은 보상을 주려는 거다.
“대표님 말씀이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많진 않지만요. 하하!”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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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수는 지금 어떤 사무실에 홀로 찾아와 있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얼굴 왼쪽에 긴 흉터가 있는 남자가 서늘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다쳤다고 보기엔 너무 얇고 그냥 넘어가기엔 시선을 잡아끄는 그런 상처. 전문가들은 보자마자 알 거다. 저건 칼에 살이 베인 거라고 말이다.
“난 그때의 네 방법이 옳다고 생각 안 해.”
“뭐야? 설마 그걸 따지러 온 거야?”
태수는 아침부터 꿈자리가 뒤숭숭한 게 이놈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후..”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는 태수.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잠깐 환기할 필요가 있다.
수북한 재떨이. 낡은 소파. 누런 컵과 과연 저걸 먹어도 될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뿌연 정수기까지.
고리대금이나 흥신소 일을 하며 먹고 사는 것 같은데 놈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긴 하다.
“하나가 죽고 둘이 살 수 있다면, 임무까지 완수할 수 있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멍청하게 가만히 도살되길 기다릴까?”
울컥, 태수가 간신히 진정시킨 마음을 다시 뒤튼다.
“살아도 같이 죽고, 죽어도 같이 죽는 게 전우다.”
“그래서 니가 진 거야.”
빠드득.
군시절 내내 태수는 늘 이놈과 경쟁해야 했다. 육체적으로나 전술적으로 탑을 기록하며 부대의 이전 기록까지 전부 갈아치우는 괴물. 물론 태수도 그에 자극받아 더 노력해서 따라잡긴 했지만, 놈이 불명예제대를 할 때까지 가슴 한편엔 언제나 패배감을 가지고 살았다.
비록 연습용 수류탄이긴 해도 그걸 부하의 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적의 매복진영에 밀어 넣는 사악함을 가진 남자. 그런 그의 잔인함이 결국 그를 군에서 내쫓았지만, 녀석이 벌인 엽기적인 일들은 아직도 후배들에게 전설처럼 떠돈다.
“뭐, 너나 나나 말똥 한번 달아보지도 못하고 이용만 당한 거지. 개새끼들.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진심으로 뭘 해보겠다는 새끼는 하나도 없이 군대가 굴러가는데 뭐가 되겠냐? 뭐 해 처먹을 생각만 하는 놈들뿐인데. 그래, 고작 옛날얘기나 하자고 온 건 아닐 거고, 뭐냐? 돈 필요해?”
담배를 입에 물며 태수를 노려보는 남자.
「미친뱀 박윤석」
“돈은 많고?”
“내 돈으로 굴리냐? 너 같은 놈들 돈으로 굴리는 거지.”
태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보라, 놈의 온몸에 빼곡한 문신을.
완전히 망가지기로 작정을 했는지 군대에 있을 때보다 더 눈빛이 안 좋다. 건달도 이놈을 마주치면 슬쩍 피해갈 비주얼이다. 이런 놈을 그분 곁에 둘 수 있을까?
“멍청한 새끼.”
태수는 요 며칠 벌어진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납치되었던 일. 화장실에서 그분을 칼 맞게 한 일.
“그래서 니가 병신인 거야.”
“너라고 달랐을까?”
“당연하지. 내가 너라면 지금 이 시간에 날 찾아오는 게 아니라 그 새끼들부터 조지러 갔겠다.”
“뭐?”
“숨통을 끊어놓던가, 그것도 아니면 팔다리 하나는 못쓰게 해야 다시는 덤비지 못하는 거다. 니가 얼마나 병신새끼처럼 보였으면 안방에서 털리냐?”
빠드득.
태수의 이가 갈렸다. 하지만 화는 자신에게 난다. 녀석이 한 말. 그게 요 며칠 원인 모를 무력감과 패배감을 만들어낸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존심 따윈 버릴 수 있어.’
납치범들은 잡혔고 대한제약은 흔들렸지만, 그걸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
법대로 처리하면 손해 보는 그런 기분.
‘이놈은 할 수 있어.’
“가자.”
윤석은 담배를 비벼끄고 벌떡 일어났다.
“어딜?”
태수가 황당한 얼굴로 올려보는데 윤석이 말했다.
“네 보스. 만나보고 결정하지. 도와달라고 온 거 아냐?”
윤석은 호기심이 생겼다.
태수. 이 고지식하고 병신같은 새끼. 하지만 윤석 역시 군시절 내내 이 남자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더 과격하고 변칙적인 방법으로 인정받으려고 했다.
끝내는 놈보다 먼저 짤렸고 말이다.
“김관식 대대장 기억하냐?”
“그래.”
“네 보스가 만약 그딴 새끼랑 동급이면 너부터 죽는다. 알겠냐? 새끼야.”
전형적인 군대의 꼰대. 그 표본이었던 김관식 대대장.
윤석이 상관폭행으로 불명예제대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랬으면 내가 여기까지 왔을 것 같냐?”
“하긴..”
피식 웃으며 사무실을 나가는 윤석.
태수는 크게 숨을 내쉬며 전화를 꺼냈다. 진모에게 알리려는 거다.
사람이 사람을 모은다.
대의는 말하지 않아도 남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진모는 도와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단단한 껍질을 가진 태수라는 병정개미는 강력한 독침을 가진 말벌을 불러들였다.
왜 이끌리는지 본인은 모른다.
그게 벌과 개미의 운명이다.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달콤함을 찾아 온몸을 내던지는 인생.
힘겹게 피어난 한 떨기 무궁화를 지키기 위해서.
“예, 저 태숩니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남자들은 그렇게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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