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림자 > >
‘그 녀석이 쉽진 않겠지.’
나 회장은 진모를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아주 젊었지만, 그 눈에 서린 깊이는 측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눈빛엔 여자들이 홀리게 마련. 빠지면 끌려 들어가서 헤어나오질 못하겠지. 하필이면 그런 놈이라니..
‘그래도 그놈만한 놈도 없는 게 사실이니까.’
진모를 보고나니 다른 사윗감 후보들이 눈에 안 찬다.
“고래를 잡으려면 바다에 나가야 하지 않겠니? 누군가에게는 잔잔하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폭풍이 몰아치는 험난한 바다가 기다릴 수도 있을 거야.”
“그 고래를 잡기엔 제 배가 너무 작은 걸요.”
나혜리는 갈수록 자신감이 떨어지나 보다. 작년에 만났을 때보다 진모는 더 큰 사람이 되어있었다.
“혜리야.”
“네, 아빠.”
“고래를 잡는 데 필요한 건 큰 배가 아니란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 회장을 바라보는 나혜리.
“녀석의 몸에 단단하게 박아넣을 작살. 그게 필요한 거지.”
“제게 그런 무기가 있나요?”
“있단다. 너 자신을 믿으렴. 너는 누구보다 예쁘고 강인한 은강의 딸이야.”
딸내미 연애 문제로 이렇게 골치가 아플 거란 생각은 못 해봤지만, 이 일은 그저 막내딸의 혼사로 치부하기엔 너무 크다.
‘그놈이 고작 GL에서 멈추진 않을 거니까.’
나 회장은 진모를 만나 아주 큰 그림자를 봤다.
놈은 더 높이 올라갈 거다. 그리고 그건 은강의 숙원을 풀어줄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거고 말이다.
“힘들면 내가 도와줄까?”
“아니요.”
나혜리는 나 회장의 품을 벗어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시 어떤 결심을 한 다부진 표정으로 돌아온 막내딸을 보며 씨익 웃는 나 회장.
“제가 알아서 할래요.”
‘그래, 그래야 내 딸이지.’
“저 내일부터 양주로 출근해요.”
“그러려무나.”
문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가던 나혜리가 문득 멈춰 서서 돌아보며,
“고래.. 잡아올게요.”
나 회장은 피식 웃으며 미소로 딸을 배웅하고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고작 고래라면 다행인데..’
나 회장이 본 그놈은 그게 아닐 거라는 불길한 예감.
“쯧. 어쩌다 그런 괴물 같은 놈하고 엮여서는..”
딸의 맘고생이 벌써부터 눈에 훤한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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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컴퓨터가요?”
“그래. 가장 진보된, 어쩌면 이미 완성된 세계 최초의 AI가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녀석일지도 모른다.”
고 박사와 근태는 비밀 연구실 안의 모니터를 보며 서 있었다.
“이 녀석이 모든 설계와 도면을 출력해주고, 오류를 잡아주지. 심지어 지시를 내리기도 해.”
“허얼.. 진짜 인공지능이라는 거에요?”
“아마도.”
고 박사는 이 컴퓨터를 헬파고가 조작한다는 걸 모른다. 단지 수년 동안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레이더와 위성을 만들었고, 신기술들을 접했기에 보통 컴퓨터가 아니라는 것만 알 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몰라. 이게 우리 GL의 가장 중요한 보물이라는 것만 알지. 사실 이 녀석이 거의 다 연산하고 시뮬을 돌려 결과를 내주니까. 우린 만들기만 할 뿐인 거지.”
“그럼 미르호도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씁쓸하게 끄덕이는 고 박사.
하지만 고 박사가 아니었다면 레이더와 위성은 아직 제자리걸음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컴퓨터가 똑똑해도 결국 제품을 만드는 건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 반물질인지 뭔지도 여기에 다 들어있을 거다. 공부하고 싶다고 했지? 해봐. 이 녀석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알려줄 거니까.”
“고 박사님은요?”
“나? 나는 기존 연구 전부 인수인계하고 새로 신설될 부서 꾸려야지. 아까 못 들었냐? 연구원만 200명 수준이라잖아. 아이고.. 이러다 내가 정말 제명에 못 죽을 거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저편으로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하는 고 박사.
그가 멀찌감치 저편에서 외쳤다.
“밥은 먹어가면서 해라! 강인이처럼 실려 가지 말고!”
“네! 박사님! 헤헤.”
근태는 웃으며 고 박사를 배웅하고 의자를 끌어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흐음,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라 이거지? 어디 한번 볼까?”
화면을 직접 터치할 수도 있고 키보드를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음성인식 역시 가능하다.
“미르호의 현재 진행이 어디까지 된 거지?”
근태의 말에 좌르르륵 화면에 출력되기 시작하는 정보들. 몇 가지는 락이 걸려있었는데, 근태의 보안등급으로는 열람이 불가한 것이다.
“이야, 빠른데?”
근태가 놀란 것은 미르호가 90% 이상 완성되었다는 것보다 컴퓨터의 반응속도였다. 슈퍼컴퓨터라지만 이렇게 쉽고 빠르게 보여줄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폴더 따위를 클릭할 필요조차 없었다. 사용자가 보기 편하도록 맞춤형으로 창을 띄웠으니까.
“나는 어디까지 볼 수 있지?”
-귀하의 보안등급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A입니다. 최고등급인 S 카테고리의 자료를 제외한 모든 것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호오, 후한데? 좋아. 그러면 반물질에 대해서 내게 허락된 모든 정보를 보여줘.”
-총 8,391건이 검색되었습니다.
근태는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고 박사가 그렇게 당부했건만 그 뒤로도 근태의 엉덩이는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이렇게 조금씩 미래가 뒤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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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
“텍사스에서 온 협조공문입니다.”
사내는 공손하게 보고서를 여자에게 건넨다.
“19구역에서요?”
“예. 시설 하나를 증축했으면 하는 모양입니다.”
여자도 미합중국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19구역에 대한 존재조차 몰랐다. 영부인에게조차 감춰야 하는 비밀. 오직 대통령과 허락된 몇 사람에게만 알려지는 은밀한 시설의 정보.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아직 일러요.”
보고서엔 클론을 실험할 연구동이 새로 필요하다고 적혀있었다.
클론. 복제인간을 말하는 거다.
“알겠습니다.”
여자는 이런 종류의 연구를 혐오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학문은 특히나 말이다.
“또 있나요?”
“예. 이게 마지막입니다.”
다른 하나의 보고서를 받아든 여자.
“음.. 이게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음성 파일도 보유 중입니다.”
19구역은 단순히 연구만 하는 곳이 아니다. 아주 다양하고 많은 인력과 장비가 세계를 감시, 관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위성을 이용한 도청기술은 타국에선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말을 할 때 나오는 대기의 떨림을 분석해 음성으로 변환하는 기술이었으니까. 이렇듯 19구역은 지금보다 30년은 앞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우리 정보가 샌 건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19구역의 모든 연구원은 24시간 감시되고 있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알아요. 아는데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일본도, 인도도 아닌 한국에서 반물질을 연구할 수 있다는 거죠?”
19구역이 감시하는 몇 개의 키워드가 있다.
인터넷은 당연하고 모든 주요 도시와 감시지역에서 특수한 단어가 나오면 위성이 감지한다. 공식적으로는 150대가, 비공식적으론 대기권의 정찰기까지 약 300여 대가 전 세계를 감시 중이다. 미국 VS 전 세계가 싸워도 밀리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알려진 것보다 드러나지 않은 게 더 많은 선진기술의 나라.
“분석결과 허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GL이라는 기업이 최근 보인 제품과 사업들을 비추어보면 더욱 그렇고요.”
“발원지는요?”
“경기도 양주라는 곳이었습니다.”
“시도는 했나요?”
남자는 끄덕이며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아시다시피 안심 칩은 아직 우리 기술력으로도 뚫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의 컴퓨터 역시 안심 칩의 기술이 그대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들보다 기술력으로 뒤처지고 있다는 뜻인가요?”
이건 불가능하다.
지금 19구역이 보유한 기술은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이 20년 뒤에도 가지지 못할 기술이다. 그걸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해내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
너무도 쉽게 인정해버리는 남자의 태도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는 여자.
“반물질이 무기로 개발되면 최소 핵폭탄의 50배의 위력을 낼 수 있다고 하신 게 국장님이셨죠?”
“그랬습니다.”
“우리조차 앞으로 10년은 더 연구해야 안정화할 수 있다고도 하셨고요.”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예요? 앞뒤가 맞질 않지 않습니까? GL같은 작은 회사가 어떻게 반물질을 연구할 수 있다는 거예요?”
국가 차원에서 지원해줘도 진척이 없는 사업이었다. 언제 실마리가 잡힐지 기약도 없는 연구이기도 했다.
“어후!”
답답한지 가슴을 치며 얼굴을 찡그리는 여자.
“위엔 핵, 아래는 반물질? 하! 가관이네요! 정말!”
하지만 더 큰 일은 따로 있다.
“중국에선 눈치챘나요?”
“아직 모를 겁니다. 그들도 안심 칩을 뚫진 못했으니까요.”
“어떻게든 그들의 손에 넘어가는 건 막아야 합니다. 요원들을 더 파견하세요. 필요하다면 우리 수중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
백악관.
남자와 여자는 두 가지 실수를 했다.
하나는 핸드폰을 꺼놓지 않은 것.
그리고 또 하나.
최고의 도청기술은 19구역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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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진모는 헬파고가 그려낸 홀로그램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너무 빨랐나?’
사실 그냥 엔진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다. 반물질이라는 카드를 꺼내기엔 너무 빠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 하지만 이내 머리를 흔드는 진모다.
‘조금씩 내가 알던 미래가 바뀌고 있어. 준비는 빠를수록 좋아.’
아무리 헬파고가 있다고 해도 반물질 연구가 완숙단계로 접어들려면 최하 3년은 필요할 거다.
3년.
이달호의 임기가 끝나고 다음 대통령이 뽑히는 시기.
그래서 어떻게든 이 안에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독한 커피로 잠을 쫓으며 깊은 고민에 한참을 빠져있는 진모.
그가 문득 묻는다.
“어디까지 진행됐지?”
-17.08% 완료했습니다.
“일단 된 것부터 보여봐.”
-예. USA 텍사스 주의 19구역에 관한 정보 출력합니다.
진모 역시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외계인을 가둬놓고 연구하고 있다는 21구역인지 뭔지 하는 루머는 들은 적 있어도 19구역은 진정 듣도 보도 못한 기관이다.
-8대의 대분류로 나뉘는 연구, 군사시설이 있습니다.
진모는 하나씩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헬파고는 아주 작은 틈만 있으면 비집고 들어간다. 그렇게 침투하면 이용 가능한 모든 것들을 활용해 정보를 습득하고 분류해서 저장한다. 예를 들면 네트워크가 안되는 지역이라도 그곳 사람들의 대화 내용으로도 원하는 정보와 대조하고 추론해서 기록하는 것이다.
19구역이라는 시설 전체를 그런 식으로 스캔하고 있는 헬파고.
“으음..”
‘대단한데?’
진모는 감탄했다.
생명공학, 신소재 공학, 신무기, 바이러스와 세균 실험까지. 거의 모든 분야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도 아무런 제약 없이 말이다.
‘내가 하려던 게 거의 다 있어.’
GL이 앞으로 진행할 사업. 그 사업의 핵심기술이 될 것들이 이 19구역이란 곳에서 지금 연구되고 있다. 특히 의료, 무기 분야에서 말이다.
“흐으음..”
진모는 계속 정보를 살펴보며 신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진모가 살았던 2040년에 쓰일 기술들 대부분이 이 19구역에서 지금 다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이것들이 전부 완성되긴 힘들겠지만, 조금씩 미래가 바뀌고 있는 지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기에,
“전부 저장해.”
진모는 일단 헬파고에게 그렇게 명령하고 홀로그램을 껐다.
‘혹시나 했는데 큰일 날 뻔했어.’
중국, 일본, 러시아와 미국을 헬파고로 항시 체크하고 있지 않았다면 오늘 19구역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진모는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접니다. 윤진모. 주무셨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초저녁인 걸요.
진모는 피식 웃었다.
새벽 2시가 넘어가는데 초저녁이라니.. 그만큼 바쁘게 산다는 증거겠지.
“미국이 눈치챘습니다.”
-허! 벌써요? 어디까지요?
“우리가 시작했다는 것 정도요. 하지만 이제 움직이겠죠.”
뿌드득, 이갈리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어떤 식으로 움직일 것 같습니까?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요.”
-윤 대표님.
“예.”
-이번엔 절대 안 숙입니다. 어떻게든 완성할 거에요. 모든 걸 지원하겠습니다. 약해지지 마세요.
우리도 한때 핵을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은 미국이 막았기 때문이다. 이달호는 그걸 빗대 말한 것이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인데 먼저 하셨네요. 하하!”
-겁나지 않으십니까?
“전혀요.”
-그들은 세상이 아는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무서워요.
“알죠. 하지만 여긴 한국이에요. 제겐 믿을 수 있는 사람도 많고요. 그들이 빼앗으려 한다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중국에 이어 미국까지.
다른 이들이 알면 까무러칠 적과 상대하고 있음에도 진모는 담담하다.
“국정원을 움직이실 때가 됐습니다.”
-그래요. 이제 때가 됐네요.
< < 그림자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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