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보고 싶었어요.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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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보고 싶었어요.
2022.08.05.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지나 혼자 외딴 섬처럼 굳어 있었다.
‘쟤가 왜 저기 있지?’
머릿속이 헝클어진 것처럼 정리가 되지 않았다. 왜 어째서……허윤주 사원이 저기 있는 거지?
분명 도진의 옆자리에 앉아 눈웃음을 짓고 있는 여자는 허 사원이었다.
도진의 여유로운 표정을 보아하니 자기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 지나는 입술을 꾹 물고 도진의 앞에 앉았다.
“도진 씨, 아니 과장님.”
아무래도 허 사원의 눈치가 보여 지나는 얼른 호칭을 바꿨다.
“허 사원이 어떻게 여기에?”
태연한 척 묻는 지나의 얼굴에 당황함이 보였다. 지나와 달리 윤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밝게 대답했다.
“대리님, 여기서 과장님을 우연히 만났어요. 정말 너무 신기했어요.”
우연히? 보통 연인들이 오는 곳을 혼자 온 걸까?
지나가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그 시선을 알아차린 도진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혼자 왔다길래 어차피 이 대리도 온다고 동석하자고 했어.”
“맞아요. 과장님께 제가 맛있는 거 사달라고 했어요.”
도진이 말을 끝나기 무섭게 윤주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대뜸 대답을 했다.
“아…….”
단지 그것뿐이라고……? 그녀의 대답에도 지나의 표정은 영 밝아지지 않았다.
오늘 5주년 기념일이라는 걸 도진은 알긴 아는 걸까? 어째서 허윤주와 동석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허 사원이 또 고민거리도 있다고 하길래 겸사겸사.”
망부석처럼 서 있는 지나를 향해 도진이 한마디 더 보탰다. 지나는 여전히 난감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이 자리를 방해하는 굴러온 돌이 된 것 같았다.
“어서 앉지.”
도진의 말에 지나는 떠밀리듯 도진과 윤주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기라도 하는 듯, 앞에 놓인 잔에 물을 따랐다.
“아 참, 두 분이 사귀신다고.”
윤주가 어딘지 은밀한 눈빛으로 지나에게 조심스레 묻자 지나는 화들짝 놀라며 도진을 바라봤다. 비밀연애를 고수하자는 건 도진의 생각이었다.
“사내 비밀연애 엄청 어렵지 않아요?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아니, 두 분이 사귄다고 상상도 못 했다니까요.”
윤주의 마지막 말은 어딘지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제 몫의 물컵을 들어 목을 축인 지나가 물컵을 세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저희 오늘 5주년이에요.”
지나의 말에 도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치 처음 듣는 소리인 것처럼. 윤주는 그녀대로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벌렸다.
“와, 대박. 5년이나? 진짜 요즘 5년씩 사귀는 사람들 별로 없는데. 짱.”
그녀의 호들갑이 거슬렸다. 지나가 윤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윤주 씨, 나는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서 도진 씨와 둘이서만 식사를 하는 자리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지나는 이어 말했다.
“사실 윤주 씨와 합석해서 기분이 좀 그렇네요.”
“아……”
지나의 말에 윤주가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윤주 씨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감정도 전혀 없구요. 방금 전까진 우리가 사귄다는 것만 알았지, 기념일이라는 걸 몰랐을 테니까.”
“네.”
윤주는 처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느리게 끄덕거렸다. 푸른 조명이라 그런지 비라도 쫄딱 맞은 것 같은 그녀의 불쌍한 모습에 없던 동정심이라도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는 다른 날도 아닌 특별한 오늘만큼은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미안한데 오늘은.”
“허 사원이 미안할 게 뭐 있어. 우리 원래 기념일 같은 거 잘 안 챙겨.”
이만 비켜달라고 부탁하려던 지나의 말을 댕강 자른 도진의 목소리는 마치 깊은 바닷속에서 울리듯이 먹먹하게 들렸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눈치 없이 동석해서……너무 죄송해요.”
도진의 위로에 윤주는 갑작스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지나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도대체 왜 우는 거야?
당황한 도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훔치는 윤주에게 휴지를 뽑아 건넸다.
“윤주 씨, 왜 울어. 괜찮아.”
순식간에 악역이 되어버렸다.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힌 지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허윤주 씨.”
올 초에 입사한 신입사원으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입사 초기부터 그녀의 성씨가 회장님의 성씨와 같아서 회사 오너가와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 돌았다.
비단 그것은 성 때문만이 아니었다. 왜냐면 낙하산이 의심될 정도로 굉장히 일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입사했는지 궁금할 정도로……여우를 닮은 매력적인 얼굴과 육감적인 몸매가 한몫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여기서 윤주 씨가 울면 내가 뭐가 돼?”
이미 5주년이고 뭐고 분위기는 깨진 지 오래였다. 지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넌지시 말하는데, 윤주를 달래던 도진이 지나를 휙 쳐다봤다.
“지나야, 그만해.”
그의 눈이 더없이 차가웠다. 푸른 조명처럼.
지나가 좋아했던 따뜻한 온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둘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기라도 한 듯, 도진이 건네준 휴지를 들고 훌쩍이던 윤주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다.
“도진 씨……”
도대체 뭘 그만하라는 거야. 라고 묻고 싶은데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나는 그의 이름만 부른 채 도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먼저 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
지나의 바람을 무참히 깨버리듯, 도진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넘겼다.
“지나야.”
어딘지 화를 참는 듯한 목소리에 지나의 맞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윤주 씨가 몰랐다잖아.”
고작 하는 말이 허윤주 사원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같이 밥 먹을 수도 있는 거지. 혼자 온 사람 무안하게.”
“우리 오늘 기념일인 거 알았어요?”
도진이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응. 알아. 그래서 보자고 했잖아.”
지나는 단지 그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정말 멍청하게도, 고작 그 말 한마디에 도진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윤주 씨가 얼마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대. 상심이 크더라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잘 대해주자.”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이 우리의 기념일을 공유할 이유는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같은 사무실 사람이고 방금 전 눈물까지 보였기에 지나는 속상한 마음을 애써 추슬렀다.
“네.”
여전히 속상했지만 지나는 도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괜찮다는 듯이.
“그래. 지나야.”
그제야 도진은 지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이내 윤주가 돌아왔다.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눈치 없이 끼어서 너무 죄송해요. 저는 과장님이 여기 계시는 거 보고 너무 반가워서 아는 척을 했거든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애교스러웠다.
“아냐 아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지. 뭐.”
도진은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머, 인연.”
도진의 말에 윤주가 감동받은 듯,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저 사실 입사할 때부터 과장님이랑 대리님이 너무너무 좋은 분 같았거든요. 진짜 인연인가 봐요.”
윤주는 아마 업무 능력 대신 사람 비위 맞추는 능력을 보유한 게 분명했다.
“뭐? 하하하하.”
도진은 결국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그를 따라 웃는 윤주와 달리 지나에게는 침울한 그림자가 그려져 있었다.
‘도진 씨가 행복한 것 같아 다행이네.’
그들을 보며 지나는 씁쓸한 입매를 끌어올려 간신히 웃어 보였다.
5주년의 식사는 허무하게 끝이 났다. 마침 집이 같은 방향인 도진과 윤주는 택시에 함께 올랐다.
지나는 그들을 보내고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10시에 가까운 시간이라 회사가 몰려 있는 길거리는 썰렁했다.
‘윤주가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내가 가는 길에 내려줄게.’
도진의 말에 딱히 불만을 말할 수 없었다.
헤어진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며 술을 잔뜩 마신 윤주는 혼자 돌아가기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또다시 제가 발끈하면 되레 이상한 사람이 될 것만 같아서 지나는 꾹 참았다.
‘나도 술이나 왕창 마셔버릴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속상함이 밀려왔다. 5주년은 너무나 허무하게 지나갔다. 5주년을 기대한 건 자신뿐이었던 것 같았다. 그에게 청혼이라도 받을 거라 기대한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아직 때가 안 된 거야. 아니, 허 사원이 나타나서 준비했지만 안 한 걸 수도 있고.’
버스 정류장에 선 지나는 아직도 허 사원의 코맹맹이 소리가 머릿속에 맴도는 것 같아 잠시 눈을 감았다.
보고서를 다시 쓴 것도 무리였는데 저녁까지 마음이 평안치 않으니 뒤늦게 피곤이 몰려왔다. 한산한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지나는 가까스로 정류장을 지나치지 않고 내렸다.
너무 피곤했는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인지 버스를 내리던 지나의 몸이 살짝 비틀거렸다. 그대로 넘어질 걸 예상한 지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어질 통증 대신, 누군가 지나의 팔을 잡았다.
“아, 감사합니다.”
덕분에 넘어지진 않았지만 창피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지나는 도와준 사람의 얼굴을 보는 대신 고개를 숙여 대충 인사하고는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몇 걸음도 채 가지 않아 등 뒤에서 지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도와준 이가 젊은 남자라는 걸 알았다. 혹시 자신이 실수라도 한 걸까 싶어 지나의 걸음이 느려졌다.
“지나 누나?”
불현듯 불린 이름에 지나가 걸음을 멈췄다.
‘서진우?’
돌아선 지나의 앞에 서진우가 서 있었다. 지나의 기억 속의 서진우를 그대로 앞에 재현해 놓은 것처럼.
“서……진우?”
“누나, 잘 지냈어요?”
지나에게 한걸음에 다가간 진우가 해사한 미소를 그렸다. 어두웠던 주변이 단번에 환해지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보다 훨씬 커진 키는 지나가 고개를 들어 올려봐야 할 정도였다.
하얀 피부는 변함없이 매끈하고 하얬고, 그의 반듯한 이목구비 또한 여전히 수려했다. 딱 벌어진 어깨와 도드라진 근육으로 흰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어른이 된 서진우는 치명적으로 멋졌다.
“여, 여긴 웬일이야.”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여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10년 만이네요. 우리.”
진우의 짙은 밤갈색 눈동자가 지나를 또렷이 바라봤다. 그 속에 어린 열기는 마치 한 여름날처럼 뜨거웠다.
“보고 싶었어요. 누나.”
진우의 말은 흑백처럼 빛바래 있던 내 기억을 순식간에 되살렸다.
오래전 여름날, 나에게 고백하던 눈동자.
지금, 내 앞에 선 채 날 바라보는 서진우의 눈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