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수상한 과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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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수상한 과장님
2022.08.09.
익히 잘 아는, 아니, 알고 있는 그의 열기 서린 눈동자를 보자 서진우가 돌아왔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서슴없는 그의 보고 싶다는 말을 애써 무시하며 지나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진짜 오랜만이다.”
완벽한 성인으로 흠잡을 데 없이 자란 그의 멋진 모습에 지나는 돌연 제 추레한 모습을 떠올렸다.
정말이지 후줄근하기 짝이 없을 텐데……하필 10년 만에 만난 모습이 하루종일 보고서 작성에 찌들다가 눈칫밥을 먹고 온 후라니. 창피했다. 완벽하게 엉망진창인 재회였다.
“아,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뭔가 생각난 것처럼 지나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몸을 급히 돌리려했다.
“누나.”
하지만 진우는 쉽게 그녀를 보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번호가 뭐예요?”
***
진우를 만나서인지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하고 나서야 도진과 허 사원의 일이 생각났다.
‘참, 어제 잘 들어갔냐고 연락도 못 했네.’
정신없이 둘러대기 바쁜 밤이었다. 진우를 만나 반가운 마음도 있었지만 놀랍고 어쩐지 그를 피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더 컸다.
‘나는 이제 남자친구가 있으니까……’
5주년하고도 하루가 지난 시간을 함께한.
지나는 별표가 쳐진 달력을 씁쓸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저만 생각했던 특별한 날이었다.
지나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어제 대충 작성한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집중해서 한다고 했지만 워낙 짧은 시간에 몰아서 작성한 탓에 여기저기 실수가 보였다.
“지나 씨.”
도진의 목소리에 마우스 휠을 굴리던 지나의 손이 멈췄다.
“네.”
지나는 서둘러 일어나려다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었다.
어제 손목까지 내려온 카디건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도진의 눈빛이 떠오른 탓이었다. 싸늘한 냉기에 팔뚝에 금방 소름이 돋았지만 손으로 쓱 문지르고는 도진에게 향했다.
“어제…….”
언제나처럼 날카로운 도진의 눈이 지나를 향했다.
잘 들어갔는지 물어보려나 싶어 지나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 보고서 작성은 다 했어?”
단조롭기 그지없는 말투에 지나는 괜히 무색해져 입술을 꾹 물었다.
“오늘 안에 끝낼게요.”
“그래요.”
할 말이 그것뿐인가요…… 보고서보다 내게 궁금한 건 없나요.
지나는 대답을 마치고도 물끄러미 도진을 바라봤다. 마치 다른 할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도진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볼일이 끝났을 때의 도진의 행동인 걸 지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
지나가 몸을 돌리려는데 도진이 나지막하게 소리를 냈다.
“오후에 외근이 잡혀서 이후에 가져오면 내일이나 확인 가능할 거야.”
외근…… 연애 초반에 도진과 외근을 함께 나갔던 기억이 났다. 최근 들어 거의 한 적이 없었지만.
“네.”
회사에 입사하고부터 도진과 함께한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사수였고, 어리바리한 지나를 여러모로 이끌어준 사람…… 그때부터 자연스레 연애가 시작되었다.
자리로 돌아온 지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도진의 적극적인 스킨쉽과 구애로 마음을 간신히 열자마자 목표를 이뤘다는 듯이 도진은 승진만 운운하며 일 얘기만 했다.
‘과장만 달면 결혼해야지.’
입버릇처럼 말끝에 나온 얘기 또한 지나는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도진과의 관계는 정열적인 연인이라기보다는 가족처럼 긴 시간을 함께한 오래된 친구 같은 사이라고 생각했다.
지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그만하려는 듯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다른 무엇보다 도진에게 중요한 것은 이번 프로젝트였다. 과장에 올라 처음 맡았기에 무엇보다 그를 잘 도와야 했다.
‘집중하자!’
어쩌면 프로젝트를 잘 마치고 도진이 프러포즈를 할지도 모르니까.
바짝 기합을 넣은 지나는 기세 좋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자기!”
같은 사무실, 점심메이트 지혜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그녀의 등장에 비로소 점심시간이 된 걸 확인했다.
“아이, 뭐야. 회사일에 목숨 걸었어? 금쪽같은 점심시간을 허투루 쓰려고!”
지혜의 장난스러운 핀잔에 지나가 피식 웃었다.
“지혜 씨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치? 나밖에 없지?”
지혜는 지나의 동갑내기 입사 동기였다. 서글서글하고 시원한 성격에 둘은 금방 친해졌다. 살벌한 회사 생활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존재였다.
“내가 앱으로 예약했거든. 빨리 가자.”
지혜가 얼마 전부터 말한 회사 앞에 오픈한 맛집. 유명 SNS는 물론이고, 유명한 인플루언서들의 포스팅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핫한 곳이라고 했다. 그런 곳에 관심 없는 지나에 비해 지혜는 트렌드에 민감했다.
‘맞아. 우리 회사가 이런 곳이었지.’
새삼스레 지나가 제 팔짱을 끼고 연행하듯 걸어가는 지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나가 몸담은 부서가 패션 업종인 만큼 남다른 패션 센스와 유행을 선도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괜히 내가 바둑돌이 아니야.’
다시금 저를 돌아보며 쓴웃음을 짓는 지나는 우뚝 선 지혜를 따라 걸음을 멈췄다.
“지혜 씨 왜?”
“헐…… 대박…….”
지혜는 로비 입구 쪽으로 시선을 둔 채였다. 정말 연예인이라도 본 반응이라 지나는 무심히 그녀의 시선을 따라 돌렸다.
처음 든 생각은 연예인인가 싶었다. 입구 쪽 벽에 비스듬히 기댄 남자의 밀가루 반죽 같은 하얀 피부에 흡사 누가 저 남자에게만 조명을 틀어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이목구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훤칠한 키에 긴 다리는 해외 유명 잡지에서나 볼 법한 비율이었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잡힌 근육은 흰 셔츠 위로 도드라져 보였다.
‘서진우?’
반 박자 느리게 지나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봤다. 도대체 여기에 왜 있는 거지?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사람 맞지? 내 눈에만 보이는 거 아니지? 신의 걸작품같은 오브제라니.”
지혜의 혼이 나간 듯한 말에 지나는 미처 대답할 수 없었다.
서진우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지금 나와 눈 마주친 거 맞지? 나 본 거지?”
지혜의 호들갑에 반응할 여유 또한 없었다.
진우가 지나를 발견하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누나.”
지나를 기다렸던 것이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지나 옆에 서 있는 지혜에게 여유롭게 인사하자 지혜는 얼떨떨하게 인사를 받았다.
“아, 안녕하세요.”
방금까지 극찬한 환상 속의 남자와 말을 섞다니, 답지 않게 지혜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누나,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죠? 같이 먹어요.”
반가움은 잠시였다. 지나는 어젯밤과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진우의 행동이 당황스럽기만 한 지나는 얼른 지혜를 내세웠다.
“나 지혜 씨랑 밥 먹기로 해서…….”
“아, 이름이 지혜 씨구나. 이름도 예쁘시네요. 저도 껴도 될까요?”
구김살 없이 묻는 진우의 얼굴은 반짝거렸다. 다소 과한 척 휴대폰을 꺼내 보던 지혜가 팔짱을 풀더니,
“어머……제가 갑자기 선약이 있는 줄 깜빡했네요.”
지혜의 난데없는 말에 지나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자기, 이따 만나.”
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선약이라니……입사 이후에 단 한 번도 점심에 선약이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이런.”
진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지나는 고개를 돌려 진우를 바라봤다.
“진우야. 여긴 어쩐 일이야.”
“일이 있어서 왔는데 누나가 다니는 회사인줄 미처 몰랐네요.”
어젯밤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진우는 햇살을 머금은 듯, 눈을 반짝이며 지나를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지혜가 감탄한 ‘신의 걸작품같은 오브제’답게 오가는 주변 사람들의 쏟아지는 시선을 지나도 느낄 수 있었다.
“하아..…… 일단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하자.”
계속 로비에 서 있을 수도 없기에 지나는 걸음을 뗐다. 갑작스러운 진우의 등장에 평범한 자신의 일상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지나 씨?”
익숙한 목소리에 뒤돌아보자 단정한 모습의 도진이 서 있었다. 평소와 달리 그의 긴 눈매가 좀 더 가늘어진 듯 보였다. 아마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있어서일 테지.
“아, 과장님.”
사적인 호칭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삼켰다. 지나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데도 도진의 시선은 여전히 진우에게 꽂혀 있었다.
“서진우입니다.”
지나가 뭐라 하기도 전에 진우가 해사하게 미소지으며 먼저 인사했다. 아까 지혜에게 한 것처럼.
진우의 인사에 도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인사를 받는 것이 분명했다. 도진의 눈빛에는 경계심이 잔뜩 실려있었다.
“김도진입니다.”
간단하게 통성명을 마치고 도진은 지나에게 물었다.
“점심 먹으러 가는 길?”
“아, 그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지나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대충 얼버무렸다. 점심을 진우와 함께 먹으러 간다는 자체가 마치 그에게 부정을 저지르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나는 용기를 냈다.
“과장님도 같이 드실래요?”
지나의 말에 도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음.. 아니. 나는 외근이 있어서. 그럼 맛있게 먹고.”
손목에 찬 시계를 슬쩍 확인한 그는 깔끔하게 인사하고 그들을 지나갔다.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는 지나에게 진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가요. 누나.”
설마 오해는 하지 않겠지…… 아무래도 도진이 신경 쓰인 지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과장님! 여기요!”
도진이 식당에 들어서자 먼저 가 있던 윤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늘따라 더 화사한 윤주의 모습에 딱딱한 도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많이 기다렸지? 거래처에 가져갈 서류 정리하느라.”
“아뇨아뇨.”
윤주가 애교스럽게 말하며 메뉴판을 펼쳤다.
“과장님, 어제 제가 실례를 많이 저지른 것 같아서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골라보세요.”
“실례는 무슨.”
윤주의 말에 도진이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대리님한테는 말해야겠죠?”
“응?”
지나의 말이 나오자 도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방금 전 로비에서 만난 지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싱그럽고 화사한 윤주에 비하면 지나는 답답할 정도로 고루해보였다. 늘 바둑돌 같은 옷차림만 고수해서 그런지. 쯧. 어딘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혀를 찬 도진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내가 나중에 말할게.”
대수롭지 않은 도진의 말투에 윤주가 눈을 접으며 생긋 웃었다.
“역시 우리 과장님.”
애교 섞인 호칭에 도진이 흠칫 놀랐다. 한 손으로 얼굴을 괸 윤주가 눈을 반으로 접은 채, 도진을 향해 웃자 도진도 이내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과장님이라. 듣기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