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
(4/80)
04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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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
2022.08.12.
진우와 회사 근처 보이는 식당 아무 데나 들어갔다. 작고 허름한 식당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모님이 갖다 준 스테인리스 물병을 들고 물을 따르는 진우의 유난히 희고 긴 손가락을 보며 지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서진우.”
이름만 부르기 어색한 탓에 고민 끝에 간신히 이름 석자를 불렀다. 지나의 앞에 물이 따라진 컵을 놓으며 진우가 따뜻한 밤갈색 눈을 지나에게 향했다.
“네. 누나.”
북극의 빙하도 녹일 것 같은 진우의 해사한 미소에 지나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 남자친구 있어.”
앞뒤 없이 불쑥 꺼낸 말에 진우의 부드럽게 휜 입꼬리가 미세하게 굳었다.
“우리 회사에 볼 일이 있다니, 오늘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따로 못 만나. 그게 맞는 거고.”
어차피 친했던 사이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한쪽이 고백했고 한쪽은 찬, 그런 사이였다.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남자친구가 있어서 내가 불편해.”
차분하게 말을 마친 지나가 얼른 물컵을 들어 입을 축였다. 시원한 물을 마시자 열이 오른 얼굴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지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진우가 천천히 답했다.
“오늘은 회사에 서류 내러 온 거예요.”
“회사에 무슨 서류를......?”
지나가 묻자 진우가 피식 웃었다.
“입사 서류예요. 오후에 면접있어서 기다리는 중에 누나를 우연히 본 거고.”
그의 말에 지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입사 지원하는거야?”
“네.”
진우가 상체를 등받이에 천천히 기댔다. 그 단순한 모습조차 우아했다.
“아, 그랬구나.”
지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십 년 동안 진우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완전한 남자다운 몸으로 자란 외모 뿐 아니라 뿜어내는 분위기도 달랐다.
어두운 표정으로 음울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진우와의 십 년 전 첫 만남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처럼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 그의 얼굴이 밝았다.
“그리고.”
지나를 바라보던 진우의 시선이 살짝 어두워졌다.
“누나를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조심했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어요.”
진우가 눈을 아래로 내리자 그의 기다란 속눈썹을 따라 음영이 졌다. 순간 햇빛이 구름에 가린 듯, 그의 표정 변화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자신이 너무 정색했나 싶어 지나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오랜만에 만나서 나도 반가웠어. 앞으로 서로 조심하면 되지.”
지나의 말에 그제야 진우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진우가 아쉬운 듯 말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다시 지나를 향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진우는 말을 돌렸다.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 그래.”
지나도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지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서진우.
가끔 상상했던 것만큼 근사했다. 아니, 상상보다 훨씬 더 멋있었다.
‘너랑 안 어울려.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순간 아주 오래전 들었던 민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바로 옆에서 말하듯이 생생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오늘은 이렇게 만났으니까 맛있게 먹자. 여기 메뉴가……”
귓가에 맴도는 민혜의 목소리를 떨쳐내듯 부러 밝게 말하며 지나는 메뉴판을 찾았다.
내장탕, 해장국, 뼈해장국.
위기를 넘기려 메뉴판을 살펴본 지나의 눈이 당황으로 굳었다.
하필.
지나가 못 먹는 메뉴였다. 자신 뿐 아니라 미국에서만 10년 유학하고 온 서진우도 못 먹을 게 뻔했다.
식당 이름도 안 보고 불쑥 들어온 제 실수였다.
다시 나갈 수도 없고……지나는 곤란한 상황을 면할 방법을 머릿속으로 얼른 생각했다.
‘그냥 나갈까? 다시 온다고 하고. 그러기엔 물까지 얻어 마셨는데. 하…… 어쩌지.’
그때 진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모님, 여기 해장국 한 그릇 주세요.”
난데없는 주문에 지나가 고개를 휙 돌려 진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일행이 못 먹어서 그러는데 혹시 다른 반찬은 없나요?”
주문을 받던 이모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진우가 이모를 향해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실은 친구 못 먹는 거 알면서도 이모님 해장국 먹으려고 제가 오자고 했거든요.”
진우의 말에 이모의 태도가 호의적으로 변했다.
“아이고, 잘생긴 총각이 일부러 온 거면……여기 된장국 있는데 공깃밥이랑 같이 먹을 테야?”
“네. 감사합니다.”
누가 보면 여기 10년째 단골인 줄.
지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진우를 따라 이모님께 웃어 보였다. 진우의 능청맞은 대처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위기에 대처하는 수업이라도 배운거야?”
“아, 모르셨구나. 제가 그 수업에서 우등생이었는데.”
장난스런 지나의 질문에 진우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처음으로 둘의 시선이 허물없이 맞닿았다. 꼭 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조금 뒤, 두 사람 앞에 음식이 올려졌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진우는 해장국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건 내가 살게.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다.”
선을 긋듯 딱 부러지게 말하자 진우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처음 먹는데 맛있네요. 커피는 제가 살게요.”
그래, 라고 답하며 지나는 회사 앞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여름답게 한낮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런데 나 해장국 못 먹는 건 어떻게 알았어?”
메뉴판을 보고 당황한 제 얼굴이 그렇게 티가 났나 싶었다.
“얼굴에 딱 쓰여 있던데요.”
진우의 장난스러운 말에 지나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버석버석한 피부결이 느껴져 곧바로 손을 내렸지만.
“메뉴판을 보는 누나 표정이 엄청 살벌했어요.”
표정을 못 숨기는 게 너무 티가 났나 싶어 민망해졌다. 지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아, 그랬나. 아무튼 네가 우리 부서에 오면 좋겠다.”
“누나 부서요?”
어쩐지 기분 좋은 얼굴로 되묻는 진우에게 저도 모르게 말이 툭 튀어나왔다.
“얼굴이 마케팅이잖아.”
아차,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그대로 튀어나와버렸다.
“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 뜻은.”
흘린 말을 주워 담으려고 허둥대는데, 진우가 쿡, 웃으며 물었다.
“누나는 어디 부서에요?”
“난 기획마케팅.”
다행히 제 속마음에 대한 해명은 자연스레 넘어갔다.
“누나가 무슨 일 하는지 궁금해요. 저도 곧 입사할지도 모르니 설명해 줄래요?”
진우가 눈을 빛내며 묻자 지나는 쑥스러운 얼굴로 회사 이야기를 꺼냈다. 주로 지나가 하는 전반적인 일에 관해서였다. 얼마 걷지 않아 목적지인 카페 앞에 도착하자 지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재미없지?”
“아뇨. 누나한테 들으니 한결 정리가 잘 되네요.”
진우가 미소지으며 카페 유리문을 열었다. 동시에 시원한 냉기가 훅 끼쳤다.
먼저 들어가라는 듯이 진우가 문을 잡아주자 지나가 어색한 얼굴로 먼저 카페로 들어섰다. 그의 배려가 낯설었다. 도진은 단 한 번도 문을 열어준 적이 없었기에.
무의식 중에 비교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생각을 지우려는 듯, 지나는 얼른 카페 안을 살폈다.
“어?”
동시에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외근을 나가겠다던 도진이 카페에 있었다. 허윤주와 함께.
“역시 카페는 시원하네요.”
지나를 따라 들어선 진우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지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도진은 윤주와 함께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지나에게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그린 채로.
“누나 뭐 마실래요?”
진우의 질문에도 온 신경은 도진에게 향해 있었다.
왜, 도대체 왜. 둘이 같이 있지?
언제부터 저렇게 친해진 걸까?
지나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를 믿어야 하는데……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몰려왔다.
도진과 윤주가 함께 있는 모습에 가슴이 술렁거렸다.
“누나.”
진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처음 보는 진우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달콤한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어딘지 화가 난 듯 낯설어 보였다.
“어? 어, 미안. 내가 딴생각을 잠깐 하느라.”
지나는 저 때문이라고 생각해 서둘러 사과했다. 제 앞에서 계속 웃기만 해서 부드러운 이미지라고 생각했는데 웃음기가 걷힌 진우의 얼굴은 의외로 선이 굵고 또렷했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진우는 별말 없이 지나의 말대로 주문했다.
“누나 혹시 추워요?”
싸늘한 냉기가 마음에 파고든 것처럼 양 팔뚝을 감싸고 있는 지나를 보며 진우가 물었다.
“아, 아냐.”
도진에게 들었던 질책 때문인지 지나는 얼른 팔을 내렸다. 혼자 유난을 떠는 것처럼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제가 커피 받아서 나갈게요. 먼저 나가 있어요.”
그래서였을까. 지나는 진우의 배려가 자꾸만 이상했다. 생경하고 낯설고 이 세상의 온갖 단어를 갖다 붙여도 모자랄 만큼.
“으응……그럴까.”
조금의 질책도 없는 따뜻한 진우의 눈빛에 지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카페 밖으로 나왔다. 후끈한 공기가 몸을 감싸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도진으로부터 도망 나온 것만 같은 기분에 지나는 그저 발밑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남자친구를 의심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어머, 이 대리님.”
윤주의 발랄한 목소리에 지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슨 얼굴로 봐야 할지 몰라 금방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커피 마시러 오셨어요?”
오늘도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윤주는 예뻤다. 그래서인지 도진과 차마 눈을 마주치기 힘들었다.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볼 줄 뻔히 알았기에.
“응. 그런데 둘이 어디 가?”
“아. 저희 오늘 외근 나가요. 과장님께서 특별히 알려주신다고.”
윤주의 자랑하는 듯한 말에 도진이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 보며 윤주에게 말했다.
“음, 빨리 이동하지.”
“네. 과장님.”
하이톤의 음색은 마치 새가 지저귀는 듯 활기찼다.
“보고서 준비 잘하고.”
지나에게 짧게 말을 마친 도진은 윤주와 함께 금세 멀어졌다.
‘외근……’
지나는 멍하니 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알 수 없는 불안의 실체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거기 계속 서 있을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기댈 생각에 손을 뻗어 유리문을 잡으려는데 문이 열렸다.
거의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
지나의 손이 진우의 가슴팍에 닿는 순간, 지나가 풀썩 주저앉았다. 놀란 진우는 들고 있던 커피를 놓고 지나를 잡았고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커피가 진우에게 튀었다.
“아……”
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셔츠에 짙은 커피가 물들었다.
“미안.”
지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를 붙든 진우는 셔츠 따위야 상관없다는 듯이 지나를 바라봤다.
“누나 얼굴이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자신이 진우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기댄 걸 깨달은 지나는 서둘러 한발 물러났다.
“아냐……잠깐 현기증이 났어.”
지나는 대충 둘러대며 난감한 얼굴로 셔츠를 바라봤다.
“세탁소가…… 여기 근처에……그러니까……”
“진짜 괜찮아요.”
진우는 지나를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그녀의 하얗게 질린 안색과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는 카페에 들어온 직후부터였다.
회사 로비에서 짧게 인사한 과장 때문인가. 진우의 표정이 굳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눈에 띄게 달라진 지나의 태도에 기분이 저조해졌다.
“그래도 이대로 두면 물들어서 안 빠질 거야. 화장실이라도 가서 내가 빨아줄게. 옷 좀 벗을래?”
상관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던 진우의 눈빛이 변한 건, 그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