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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이제 놓치지 않아 (5/80)


05 이제 놓치지 않아
2022.08.16.



 


“옷을 벗으라고요?”

진우가 한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귓가에 닿는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졌다.

지나가 허둥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아, 미안. 여기서 말고. 그러니까 옷을... 너 면접 본다며. 어떻게 해.”

미안함에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지나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진우가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누나, 괜찮아요.”

정말 문제없다는 얼굴로 말하는 진우는 오히려 지나의 상태를 보고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누나야말로 괜찮은 거예요?”

진우는 손을 들어 지나의 뺨을 살짝 만졌다.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지만 지나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생각해보니 여기 근처에 옷가게가 있어. 내가 가서 사 올게.”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지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진우의 손이 아주 잠깐 스쳤던 뺨이 홧홧했다. 심장 박동은 빠르게 뛰었다.


“이지나, 정신 차려.”

진우는 그저 아는 동생일 뿐이다.

도진이 윤주와 너무 친해 보여서 지금 혼란스러운 것뿐이야.

정신 차리려는 듯, 지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다행히 근처에 남자 정장을 파는 옷가게가 있었다. 평정을 되찾은 지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유리문을 열었다.

***



“음...”

너무 작은가? 지나는 제 눈대중을 속으로 원망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이즈라도 제대로 물어보고 살걸.’

오늘따라 허당짓을 시리즈로 하고 있는 자신의 이마를 콩콩 찧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가 봐도 짧은 소매는 진우의 손목을 덮지 못했다. 껑충 자란 아들이 한 해 전의 옷을 입은 것 같은 모습에 지나는 안 되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내가 한 사이즈 더 큰 걸로 사 올게. 조금만 기다려. 면접 시간이 언제야?”

“아니에요. 딱 맞아요.”

가장 윗단추를 마저 채운 진우가 씩 웃었다. 자켓을 걸치자 와이셔츠 소매가 보이지 않아 어색했다.


“이 옷은 내가 깨끗하게 세탁해서 돌려줄게. 오늘 정말 미안해. 내가 오늘따라 정신줄을 놨는지...”

지나가 커피에 젖은 진우의 옷을 손에 들고는 사과했다.


“면목 없지만 면접 잘 봐. 응원할게.”

손목이 훤히 내보이는게 전체적인 옷의 핏까지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지나는 말을 마치고는 다시금 입술을 꼭 물었다. 옷 때문에 신경 쓰여서 면접을 못 보면 어떡하지? 행여라도 떨어지면 어떡하지, 등의 걱정이 물밀 듯 들이닥쳤다.


“누나 덕분에 철썩 붙을 것 같아요. 고마워요.”

걱정 말라는 듯, 진우의 미소가 여름 햇살처럼 빛났다.

***

한편, 회사로 돌아온 진우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가 사준 셔츠 소매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지나의 모습에 새어 나오던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지나의 손가락은 텅 비었다.

그 흔한 커플링조차 없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그 과장이란 남자,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이제 놓치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에서의 10년 동안 그녀를 보지 않으면 잊을 줄 알았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공부와 운동에 몰두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파티도 다니고 다른 여자들과 연애도 해봤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차가운 침대 위에 누우면 어김없이 지나가 생각났다. 제 노력 따위는 우습게도.

잊지 못한다면 그녀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닌, 그녀에게 당당한 남자로 서기 위해 노력했다. 언젠가는 그녀 앞에 서기 위해……

한국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그녀를 찾아갔다.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던 그녀는 진우를 불편하게 생각했다. 한 발이고 두 발이고 물러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보같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진우의 눈빛이 다소 어두워졌다.

띵, 해당 층에 도착했다는 안내 목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진우는 곧 자세를 바로 하고 걸어 나갔다.

***

사무실에 돌아온 지나를 기다린 거 지혜였다.


“자기자기!”

기다렸다는 듯이 부리나케 지나를 탕비실로 끌고 간 지혜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신이 만든 오브제! 누구야! 무슨 사이야! 남친이야?”

숨도 안 쉬고 연달아 질문하는 지혜를 향해 지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냥 아는 동생이야.”

“아는 동생?”

충격적인 사실을 들은 것처럼 지혜가 잠시 멈췄다가 통탄하듯 말했다.


“하,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네. 걸어다니는 조각상을 그저 아는 동생으로만 취급하는 친구라니. 오호통재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그냥 아는 동생이야.”

지나의 항변에 지혜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아는 동생이 친한 동생이 되고 친한 동생이 여보자기 되는 거지.”

“어우, 아냐. 나 남친 있어.”

엉겁결에 남친이 있다고 밝혀버린 지나는 말하고 나서 입을 얼른 다물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지혜의 눈이 번뜩거렸다.


“뭐어어어? 뭐가 있다고?”

“아…….”

당황한 지나가 얼른 변명을 하려는데, 지혜가 더 빨랐다.


“남친 누군데! 회사 사람이야? 나도 아는 사람이야? 빨리 말해봐. 언제부터 사귄 거야.”

융단폭격과도 같은 취조에 지나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지혜가 내뿜는 콧김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나중에 말할게. 지금은 좀……”

“혹시 남친이 회장님 후계자 그런 거는 아니지? 회사를 위해 야근도 밥 먹듯이 하는 이유가 남친 때문인가……”

지혜가 목소리를 시사프로 엠시처럼 따라 하며 눈을 가느다랗게 만들자 지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저었다.


“우리 지혜 씨,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네.”

“맞아. 요즘 내가 하는 연애는 오직 드라마 뿐이야. 나 너무 안타깝지 않아? 그래서 아까 신의 완벽한 피조물 아는 동생님 진짜 연예인인 줄 알았잖아. 우리 회사로 촬영나온 줄.”

지혜가 땅이 꺼지라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 궁금했으면 같이 밥 먹으러 가지.”

지나의 말에 지혜가 부끄러운 듯 두 뺨을 감싸며 말했다.


“어머! 나 낯 가려. 자기.”

“세상에. 여태 몰랐어.”

지나와 지혜가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커피는 마셨어?”

지혜의 물음에 지나가 먼저 종이컵을 꺼내 들었다.


“아니.”

커피를 옷에 양보해버리는 바람에.


“어머, 잘생긴 아는 동생님이랑 밥 앤 커피는 기본 아니야?”

“하하.”

지혜의 너스레에 지나는 작게 웃으며 커피머신을 눌렀다.


“내가 없어서 그랬군. 할 수 없지. 다음에는 꼭 같이 가줄게.”

장난기가 다분한 목소리로 지혜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다음이 있을까. 서진우와 이제는 만날 일이 없을텐데.

지나가 종이컵을 들어 입에 댔다. 입안에 맴도는 커피가 유난히 쓰게 느껴졌다.

***

오후가 되자 사무실 안으로 한껏 기울어진 햇빛이 쏟아졌다. 아침보다 나른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무실의 키보드 소리는 기운이 빠진 듯 키보드를 치는 타자 소리가 한결 느려졌다.

한참 보고서 마무리 작업을 하던 지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진은 외근이 길어지는지 아직도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지나는 뭉친 어깨를 툭툭 치면서 그의 빈 자리를 슬쩍 보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이 정도면 되겠지……”

집중하다 보니 어깨와 팔이 뻐근했다. 지나는 하늘 높이 팔을 길게 뻗었다. 이번 주말에 오랜만에 등산이라도 할까 싶었다. 등산 또한 도진 때문에 생긴 취미였다.

입사 초반에 회사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주말마다 부지런히 산에 다니던 도진의 모습이 문득 생각났다. 도진을 따라 엉겁결에 다니던 것이 이제는 혼자서도 가게 될 만큼 능숙해졌다.

도진과 함께 산에 안 간지 꽤 오래 된 듯 했다.


[도진 씨,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으면 등산 갈래요?]

지나는 생각난 김에 도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과장이 되기 전에는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아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못했다. 그의 승진을 돕기 위해 밤샘 근무도 마다치 않았다.

도진의 문자를 기다리며 작성한 보고서를 서둘러 정리했다. 그가 부탁한 일 외에도 제 몫의 일거리가 꽤 있었다. 오늘도 제때 퇴근하긴 글렀다.

지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머신을 꾹 누르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어? 이거 왜 그러지?”

기계에 대해 모르는 지나는 당황한 얼굴로 커피머신 여기저기를 살폈다.

평소보다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걸 보니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커피머신이 이상하다고 지혜가 말했던 것도 같았다.


‘하필……’

커피머신만 만지작거리다 탕비실을 다시 나왔다. 총무팀에 연락할 생각으로 자리로 돌아가는데 웬일로 정 부장이 바쁜 걸음새로 부장실에서 나왔다.


“어, 이 대리.”

마침 잘 만났다는 듯이 지나를 발견한 부장이 손짓했다.


“인턴들 내일부터 올 건데 업무 인수인계목록 좀 정리해줘.”

인턴이란 말에 갑작스러워 지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인턴이요?”

본래 상반기에 받았는데……지나의 표정에 떠올려진 의아함을 읽은 부장이 손사래를 치며 채근했다.


“올해부터 필요한 시기에 비정기적으로 채용한다고 했어. 우리 부서가 요즘 새 프로젝트로 인력이 부족하다고 요청했더니 다행히 보내줬어.”

“네. 알겠습니다.”

지나는 일단 예의 바르게 답했다. 지금 당장 인턴이 아니더라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

반듯한 정방형의 사무실, 건물 가장 높은 층을 전부 다 사용하는 듯 넓었다. 벽 한 면은 통유리로 노을이 내려앉은 도시의 경치가 훤히 보였다.

서인그룹 회장 서일준이 가죽 소파에 앉은 채, 부리부리한 눈으로 앞에 앉은 사람을 바라봤다.


“아까 온다더니 왜 이제 나타나.”

“죄송합니다.”

진우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옷을 새로 구해 입고 오느라 늦어진 사정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었다. 마뜩지 않는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던 서일준은 혀를 끌끌 찼다.


“미래전략실로 들어오라니까 인턴……?”

“마침 인턴공고를 봤습니다.”

“기껏 유학 끝나고 와서 하는 말이 인턴이라니.”

“당분간입니다.”

진우는 반듯한 얼굴로 제 아비, 서일준을 바라봤다.


“바닥부터 배워야 할 것 같아서요. 요즘 낙하산이다 뭐다 말이 많잖아요.”

“유학 가서 혓바닥에 기름칠만 했구먼.”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일준은 이미 진우의 말대로 지시한 후였다.


“너는 서가의 장남이다. 아무리 배다른 동생들이 있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해도 네가 서가의 장남이자 이 회사의 후계자다.”

“……네.”

진우를 향해 눈을 번뜩이는 일준의 말에 무게가 있었다. 새삼스레 느껴지는 무게감에 진우는 그저 고요히 감내할 뿐이었다.


“두 달이다. 그 이상은 양보 못 해. 그 이후에는 바로 전략실로 올릴 테니까 그런 줄 알아.”

목구멍을 긁는 듯한 쇳소리가 흘렀다. 서일준의 건강이 많이 안 좋다는 걸 반증하듯, 형형한 눈빛을 제외하면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다.

유학 중이던 진우를 급하게 한국으로 부른 것도 건강 때문이었다. 일준은 죽어가고 있었다.

제 뒤를 맡을 든든한 후계자가 필요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쿨럭이며 기침을 뱉는 일준이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진우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제 아비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어미를 내치고 새 여자와 가정을 꾸린 아비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주먹만 꼭 움켜쥘 뿐이었다.


“꼴이 그게 뭐냐.”

진우의 짧은 소매를 발견한 일준이 못마땅한 얼굴로 핀잔했다. 누가 봐도 얻어 입은 꼴이 분명한 옷차림에 일준은 한마디 더 보탰다.


“생활비가 모자라냐.”

“아닙니다.”

제 소매를 보며 옅게 미소짓던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이만 가거라.”

간단한 대화에도 일준은 힘겨워했다. 테이블에 올려진 차의 김도 식지 않은 시간이었다. 진우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회장실을 나왔다.

회장실 바깥에 미리 서 있던 비서들은 진우가 나오자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진우 또한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진우는 복잡한 눈빛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띵- 중간에 문이 열리고 누군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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